362화
362화
돌멩이는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 위에서 부르르 떨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돌멩이와 나’가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어합니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냥 돌멩이를 만졌는데 설화가 발생했다고?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가설들이 스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해답은 없었다.
[1세대의 개연성이 당신의 주변을 감돌고 있습니다.]
[현재 ‘제4의 벽’이 매우 얇아진 상태입니다.]
그나마 의심이 가는 건 저 두 줄의 시스템 메시지인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유호성이 말했다.
“······그렇군, 네놈도 환생자로군. 그렇지?”
그사이 나에 관해 엉뚱한 가설을 세운 모양이었다.
“전생에 돌팔매에 맞아 죽기라도 한 모양이구나? 그래서 저 돌이······.”
“아닙니다만.”
“오호라, 네놈 돌머리로구나. 그래서 하필 돌멩이가―”
나는 말 없이 유호성이 내던진 나뭇가지를 집어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설화, ‘나뭇가지 같은 김독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는 유호성을 향해, 겸손한 무림의 후기지수처럼 말해보았다.
“말씀드리기 외람되오나, 제 머리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닙니다.”
옆에서 이지혜가 나를 재수 없다는 듯 노려보았다.
눈을 부릅 뜬 유호성이 외쳤다.
“어디, 이것도 쥐어 보아라!”
나는 유호성이 건넨 꽃을 받아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설화, ‘꽃을 든 김독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유호성은 계속해서 내게 설화 소재가 될 만한 것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족족 받아 들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품습니다!]
[설화의 소재가 당신에게 호기심을 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던 유호성이 결단을 내린 것은 내 주변이 노래하는 꽃과 돌멩이들로 가득해졌을 무렵이었다.
“······나를 쥐어라.”
“어딜 말입니까?”
“여기, 내 어깰 잡아 보란 말이다.”
이글거리는 유호성의 눈빛.
그의 분노는 이해가 갔다. 말마따나 십 년, 백 년, 천 년을 쌓아야 한 줄을 이룰 수 있다는 ‘진짜 설화’가 내게서 너무도 쉽게 봉오리를 틔웠으니······ 열 받을 수밖에 없겠지.
“정 그러시다면······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유호성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무슨 어린애 어깨가 이렇게 단단하지?
유호성이 말했다.
“별다른 변화는 없군. 무생물에 한정인가? 흠······.”
[등장인물 ‘유호성’이 당신에게 미미한 호감을 갖습니다.]
흠칫 놀란 유호성이 내 손을 뿌리치며 물러났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리고 다음 순간, 내 귓가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설화, ‘만물의 사랑을 받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
유호성이 충격에 빠진 사이, 내게 관심을 보인 것은 마을의 다른 주민들이었다.
“이런 미친 재능은 간만이군.”
“허, 보기 드문 친구일세······ 바깥에서 온 자가 맞나?.”
“혹시 소여물에도 관심이 있니?”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아낙이 건넨 소여물을 받아들었다.
인간 김독자.
근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어영부영 살면서, 이렇듯 좋은 일로 관심을 받아본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재능이 있다고?
「(독자 씨는 확실히 재능이 있어요. ······이런 소설을 10년이 넘도록 완독하셨잖아요.)」
최근 사서 일이 고된 모양인지, 유상아는 살짝 지친 목소리였다.
‘······역시 소설을 읽은 것과 관련이 있을까요?’
「(그렇게 밖엔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동안은 이런 일이 있었던 적이······.’
생각해 보니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등장인물 중에는 나를 보자마자 호감을 가졌던 이들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벽’이 얇아진 것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요?)」
유상아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지만, [제4의 벽]의 기능이 떨어진 것이 세계와 나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이 능력은 어디까지 적용되는 거지?
곁을 돌아보니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듯한 이지혜가 손에 나뭇가지를 꼭 그러쥔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팔을 쿡 찔렀다.
“으엑!”
깜짝 놀란 이지혜가 성질을 냈다.
“아저씨 미쳤어? 어디서 똥 묻은 손가락으로······!”
일단 얘는 안 먹히는 것 같고. 그럼, 어디 보자······.
나는 역시나 바로 곁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던 척준경의 어깨를 콕 찔러 보았다.
“도전인가?”
“아닙니다.”
······이쪽도 적용이 안 되는군.
그럼 대체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재능의 작용 원리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빌어먹을 재능이로군. 그렇게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 말을 한 것은, 한참이나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유호성이었다.
말간 유호성의 얼굴에 흉흉한 분노가 배어 있었다.
유호성은 아이의 보폭으로 나를 향해 성큼 다가오더니 말했다.
“네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세상에서 기연을 제일 싫어한다. 특히 너처럼 노력도 안 하고 쉽게 뭔갈 얻는 녀석을 제일 증오하지.”
일권무적 유호성은 그런 사람이다.
악바리처럼 덤비는 사람을 좋아하고, 극복할 수 없는 재능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아끼는 무인.
그런 유호성의 눈에, 나 같은 녀석은 재능빨로 1세대를 능멸하는 대역죄인처럼 보이겠지.
“······오늘 처음으로 내 신념을 어기게 되는군.”
응?
“네놈에게 ‘설화 통제법’을 가르쳐 주겠다.”
*
왜 유호성이 변심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가 내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마치 일생일대의 제자라도 남기려는 듯, 유호성은 그날부터 밤낮으로 나를 괴롭혔다.
“현상과 진리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설화를 제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곧 현상을 자신의 언어로 이해한다는 뜻이다.”
“추상으로 도약하기 위한 단단한 지반. 그것이 바로 네가 쌓아야 할 설화의 세부(細部)다.”
······등등.
이건 뭐 ‘멸살법’을 다시 읽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
나는 마을 주민이 가져다 준 귤을 하나 까먹으며 일단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멍청한 놈.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로군.”
“송구스럽네요.”
“모르겠으면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 없다.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통제법을 체득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럼 어쩌란 말씀이신지.”
나는 딱밤을 맞았다.
“고얀 놈. 너는 일단 말버릇부터가 문제다. 연장자에 대한 공경이 부족하단 말이다.”
“······.”
“너는 일단 듣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이보다 더 잘 듣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네가 가진 설화의 말에 귀를 기울이란 뜻이다!”
······설화의 말?
‘멸살법’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던가?
“너는 이미 설화와 소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감정과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재능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랬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설화들이 가지는 의사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그들이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저는 설화를 통제하고 싶은 거지, 잡담을 나누고 싶은 게 아닙니다.”
“설화는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설화 통제법을 가르치는 사람의 말이었다.
“너는 네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느냐?”
“그야 당연히 제 생각이니······.”
“그럼 지금부터 5분간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 보아라.”
나는 그쯤이야 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말자······.
빌어먹을, 이건 ‘생각하지 말자’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잖아.
나는 열심히 내 상상을 피해 달아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5분도 채 안 되는 사이, 내 머릿속에서는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났다.
가령 개연성 없는 원인으로 인해 미소녀가 되어버린 유중혁이 마왕들을 썰어 죽인다거나, 역시나 원인 불명의 정신 착란에 걸린 한수영이 “김독자님 역시 그때 표절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선언한다거나······.
나는 솔직하게 양손을 들고 항복했다.
“······안 되네요.”
“얼빠진 놈.”
[설화, ‘구원의 마왕’이 당신을 향해 히죽거리며 웃습니다.]
“오늘부터 네가 할 일은 그것이다. 설화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아무리 거대한 설화라도, 결국은 네가 쌓은 설화들이니까.”
그 말을 하며 돌아서는 유호성은, 처음으로 스승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화는 우리를 지배하려 들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하는 법이다.”
그날부터 나는 ‘설화 통제’의 수련을 시작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설화의 목소리를 듣는 연습이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관심을 귀찮아합니다.]
설화들은 그런 내 모습을 낯설어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귀를 기울였을까, 지금껏 감정 표현을 자제하던 설화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그땐 참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설화는 이야기를 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는, 다시 우리가 쌓은 기억이 된다.
하늘을 수놓은 사인참사검의 별빛과, [절대왕좌]를 부수던 쾌감의 순간.
맞아, 그때 정말 즐거웠지.
네가 내 ‘첫 번째 설화’였으니까.
[설화, ‘이적에 맞서는 자’가 그 귀환자는 정말 골치 아팠다고 말합니다.]
맞아, 명일상 그 자식은 정말 까다로웠어.
유중혁이랑 한수영이 같이 있었는데도 죽을 뻔했지.
[설화, ‘재앙의 왕을 사냥한 자’가 뱀술의 맛을 그리워합니다.]
[설화, ‘이계의 신격을 살해한 자’가 혹시 이것도 기억하냐고 묻습니다.]
그렇게 한 마디 한 마디가 늘어갈 때마다, 나는 설익은 추억에 잠겨갔다.
한편으로는 여기서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곤란하다는 조급함도 있었다.
한수영, 유중혁, 안나 크로프트······.
나와는 다른 결말을 추구할 그들은, 이미 다음 시나리오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너는 더이상 도망가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부터 쏟아지는 설화들의 목소리가 늘어나며, 나는 현실과 가상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다. 시공간의 감각이 흐려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설화들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설화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화, ‘은막의 혁명가’가 새로운 혁명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래, 미안해.
내가 너희를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구나.
[설화, ‘미식협의 이단아’가 배고픔을 호소합니다!]
[설화, ‘기적의 도박사’가 또 한 판 크게 벌이자고 말합니다.]
중간중간, 꿈 같은 정경이 스쳐 가기도 했다.
―독자 씨. 우리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알아요?
―아저씨이!
어디선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
―······와, 치사하게. 혼자만 먼저 수련하고 있었다고?
―우리도 얼른 배워요! 누구한테 가면 배울 수 있는 거죠?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이게 정말 꿈이라면, 정말 달콤한 꿈이구나.
―······난 왜 설화 안 생기지? 독자 형은 이렇게 하면 설화 생겼다며.
―그 손 떼라 이길영.
―너나 떨어져 신유승.
꿈결 속에서, 아이들이 “아저씨와 나”라거나 “독자 형과 이길영” 따위를 열심히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그런 설화를 가져서 어디 쓰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바라봅니다.]
왜일까. 아이들의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포근한 마음이 되었다. 몽롱한 시야 속에서, 무수한 설화들이 나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봅니다.]
[설화, ‘거신의 해방자’가 애틋한 눈으로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이 모든 설화는 나를 닮았고, 나는 다시 그 모든 설화들을 닮는다.
그렇다면 저기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저 녀석도, 분명 우리의 일부일 것이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을 외면합니다.]
나는 말한다.
‘그만 심통 부리고 이리와.’
그러나 녀석은 대답이 없었다.
산만한 덩치로 다른 설화들을 위협하던 녀석은, 몸을 웅크린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뭔가를 읽고 있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인 채로.
어쩌면 나는 저 등을 알고 있다. 자신만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작은 아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설화’는 혼자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나는 녀석의 등 뒤로 조심스레 다가가 말했다.
‘재미있어 보이네.’
흠칫 놀란 「신화를 삼킨 성화」가 나를 돌아보며 몸을 키웠다.
「너······!」
어마어마하게 커진 몸으로, 설화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녀석이 두렵지 않았다.
녀석은 설화다. 그리고 모든 설화는, 어딘가로 흘러간다.
‘네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야?’
녀석은 내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아마 대답할 수 없겠지. 그 마음을 안다.
‘나와 함께 가자.’
「······어디로?」
천천히 입을 열어 이야기한다.
내가 원하는, 내 모든 이야기의 ■■.
설화가 묻는다.
「그 모든 이야기의 끝엔 뭐가 있지?」
‘나도 몰라. 하지만 적어도 혼자는 아닐 거야.’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설화들이 내 손끝에 감겨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의 파도 속에 떠밀리던 몸이 점차 무거워지고,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대체 시간이 얼마나 흐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리가 저려와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길영과 신유승이 내 무릎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이건 설화가 아니었다. 진짜 육신을 가진 아이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침내, 다음 시나리오로 떠날 준비가 끝났다.
*
그 시각, 331번째 섬의 유일한 생존자가 다음 시나리오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신은 섬의 모든 참가자를 학살하였습니다.]
[당신은 331번째 섬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다음 시나리오의 진입 자격을 얻었습니다.]
흩날리는 검정색 코트와, 등 뒤에서 빛나는 [흑천마도].
다음 시나리오로 향하는 포탈을 바라보며, 유중혁은 이곳에 오기 직전 만났던 음험한 존재를 떠올렸다. 3회차를 살아온 그조차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계의 신격.
―계시의 내용 전부를 알려줄 수는 없다. 아무리 나라도 그건 ‘개연성’에 지나치게 위반되니까. 하지만······ 이 정도는 내줄 수 있겠지. 그래야 제법 공평한 싸움이 될 테니까.
스마트폰을 켜자, 텍스트 파일이 나타났다.
『한수영― 1863회차의 기록 (上).』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유중혁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