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358화
이현성은 생각했다.
언젠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던 외할아버지의 기분이 이런 것이었을까.
무성한 잎으로 우거진 삼림. 비정상적인 크기의 밑동을 자랑하는 나무들 사이에 숨으면서, 이현성은 서바이벌 훈련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인근 지역의 갈대숲까지 낮은 포복으로 이동한다.’
낮은 포복과 높은 포복을 번갈아 사용하며, 이현성은 천천히 삼림지대를 이동해갔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벌판 쪽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쪽으로 이동하는 성좌들의 무리가 적지 않았다.
퍼뜩 풀숲을 헤쳐오는 기척에, 이현성은 재빠르게 나무 밑동에 숨어 숨을 죽였다.
[구원의 마왕이 분명 이 섬을 택하는 걸 봤는데······.]
[놈을 사냥하면 분배는 어떻게 할 거지?]
[목을 따는 놈이 절반을 갖기로 하지.]
웅성거리는 성좌들의 기척. 모두 김독자를 노리는 녀석들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놈들의 목을 효수하고 싶었다.
―무조건 섬의 중앙을 향해 달리십시오.
김독자는 말했다. 그래야만 이 빌어먹을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이 세계의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전언이었다.
순간 김독자에게 ‘멸살법’에 관해 더 자세하게 물어볼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매뉴얼에 관한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까.
미래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이현성은 양손을 들어 뺨을 찰싹찰싹 쳤다.
김독자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부스럭.
가까운 곳에서 다시 한번 기척이 들려왔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중한 움직임. 은엄폐의 기본을 어느 정도 꿰고 있는 자였다.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부스럭.
저쪽에서 먼저 방향을 틀지 않는다면, 조만간 들킬 수밖에 없는 위치.
이현성은 긴장하며 품속에서 단도를 꺼냈다.
김독자는 무조건 전투를 피하라고 했지만, 항상 그럴 수는 없다.
‘피해갈 수 없다면 선공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각혈을 토하는 수련을 거치며, 이현성은 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이제 그는 첫 번째 시나리오의 ‘불의를 외면한 군인’이 아니었다.
마침내 적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성긴 갈대 사이로 언뜻 보이는 특전복의 무늬.
이현성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희원 씨?”
“으와앗!”
풀숲을 불쑥 뚫고 나온 [심판자의 검]. 이현성은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여 그 검을 피해냈다.
잠시 후, 풀숲 사이로 정희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현성 씨? 이런,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으십니까?”
안 그래도 절박하던 상황에 동료와 조우하게 되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한숨을 돌리고 보니, 정희원의 허리춤에 두 아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신유승과 이길영. 이현성은 핼쑥한 두 아이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애들 상태가 왜 이렇습니까?”
“······저도 확실히는 몰라요. 방금 만난 거라. 뭔가 충격적인 광경을 봤나 봐요.”
충격적인 광경.
확실히 이 섬은 기묘한 데가 있긴 했다.
이현성은 아까부터 등에 찬 [헤라클레스의 방패]가 몹시 무겁게 느껴졌다. 평소였다면 무게조차 못 느낄 아이템이었는데······.
이현성은 한 손으로 신유승을 업으며 말했다.
“일단 섬 중앙으로 가서 독자 씨와 조우하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어디가 중앙일까요?”
“연기가 피어오르는 방향이라고 들었으니······.”
슬쩍 고개를 들어 방위를 살피자 커다란 나무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자락이 보였다. 그리 멀지 않은 위치.
이현성은 정희원과 함께 포복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든든한 동료와 함께하기 때문인지, 군번줄을 통해 느껴지는 심박이 아까와는 다른 박자로 뛰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기었을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삼림 지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눈앞으로 펼쳐진 것은 너른 벌판지대. 이제 연기의 발화 지점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문제는, 그 벌판을 가로막은 일련의 무리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정희원이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우릴 쫓아온 녀석들인 것 같죠?”
제각기 병장기와 성유물들로 무장한 채, 벌판 인근을 기웃거리며 수색하는 성좌들. 개중에는 아까 이현성이 일별했던 무리도 있었다.
“싸우지 말고 달리라고 했으니, 피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긴 한데······.”
이대로 벌판에 진출하면 반드시 저들의 눈에 띄게 된다. 삼림지대를 돌아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 없었다.
등 뒤에 업힌 신유승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아저씨. 저기······.”
푸들거리는 신유승의 손가락이 벌판 건너편에 있는 반대쪽 숲을 가리켰다.
뭔가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거칠고 포악한 울음소리. 삼림을 헤치고 나온 그 괴수종은, 이현성도 익히 알고 있는 괴수였다. 왜냐하면 저 괴수는, 수많은 판타지 만화와 소설에서 단골로 출연하는 몬스터였으니까.
정희원이 물었다.
“저거 ‘오크’ 아니에요? 80번대 시나리오에 있기엔 너무 약한 녀석인데······.”
오크.
수많은 판타지 장르에서 ‘초반 몬스터’의 대표격으로 등장하는 괴물.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오크’와 싸운 적은 없군요.”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오크는 너무 유명해서 일반인들도 모두 알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80번이 되도록, 그들은 한 번도 오크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벌판 지대에서 성좌들이 일갈을 터트렸다.
[우릴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겨우 저런 쓰레기를 풀어 놓은 건가?]
그들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병기를 쓸 필요도 없다는 듯, 성좌 하나가 귀찮은 얼굴로 달려오는 오크를 향해 주먹을 내뻗었다.
평소였다면 그 주먹 한 방에 전신이 터져 나갔어야 할 괴물.
그런데 다음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빠가각!
오크가 휘두른 돌도끼에, 성좌의 주먹이 부서졌다.
당황한 성좌가 뭐라고 외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또 다른 돌도끼가 날아왔다.
퍼거걱!
그대로 터져버린 성좌의 머리통.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지 인지조차 못한 듯, 멍청하게 쓰러지는 성좌의 화신체.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린 오크와 포효와 함께, 벌판은 끔찍한 학살장으로 뒤바뀌었다.
[끄아아아아악!]
산을 부수고 바다를 가른다는 무시무시한 성좌들. 그 성좌들이, 고작 단 두 마리의 오크에 의해 머리가 터지고 몸통이 찢어지며 죽어가고 있었다.
정희원도 이현성도 얼이 빠졌다. 현실감 없는 정경이었다.
저렇게 쉽게 죽었다고? 성좌들이?
······‘오크’에게?
“······도망가요!”
순식간에 열댓 명의 성좌들을 찢어버린 오크들이, 이쪽 삼림지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부디 오크만 만나지 않기를.
나는 무성한 삼림을 헤치며 머릿속으로 그 생각을 반복했다.
더위 속에 숨이 간헐적으로 차올랐고, 발걸음은 무거웠다. 별로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전신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탈진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종합 능력치의 부재가 이렇게나 클 줄은 몰랐다.
역시 태생 체력 1은 어쩔 수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어깨까지 좁아진 듯한 느낌. 착각이라 믿고 싶지만 이게 ‘섬’의 현실이었다.
환생자들의 섬.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 모여 있는 곳.
여기서는 바깥에서 데이터로 쌓아온 모든 능력치 버프가 해제된다.
즉, 순수한 육체 본연의 능력이 주가 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내가 서열 65위의 마왕을 손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성좌위에 오른 대부분의 성좌들은 육체의 수련을 게을리하고, 때문에 이 섬에 막 진입했을 때 자신의 정확한 전투력을 오판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나마도 육체파가 아닌 ‘안드레알푸스’였기에 망정이지······.
[당신은 현재까지 1명의 경쟁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안전 지역으로 진입할 시 추가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간간이 들려오는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무성한 나무들이 만든 그늘을 골라 이동을 계속했다.
탈수를 방지하기 위해 드문드문 발견되는 개울에 코를 박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기도 했다.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맑고 차가운 물이었다.
“······1세대 물 참 맑네.”
사실 나라고 무조건 옛날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독자로서 말하자면, 나는 오히려 오래된 이야기들을 더 좋아했다. 꿈과 모험으로 가득한 영웅들의 이야기. 잊혀진 산맥의 드래곤과 싸운다거나, 아름다운 엘프, 용맹한 난쟁이들과 함께 전설의 검을 찾아 떠난다거나······.
문제는 지금 내가 그 ‘옛날 이야기’ 속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성창의 힘도 못 쓰고, 어떤 편의 기능도 없는 세계.
이곳에서 위험은 괴수뿐만이 아니었다. 스킬의 효과를 받을 수 없으니 자연히 면역도 떨어지고, 추위나 질병도 조심해야 했다. 원작에서는 전염병에 걸린 성좌들이 몰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멸살법’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특성창과 시스템이 주는 편의에 익숙해져 있던 성좌들은, 그들의 감수성으로 읽어낼 수 없는 세계를 맞닥뜨리자 제대로 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무력하게 죽어갔다.」
<스타 스트림>의 권좌에 군림하며 강력한 위상을 빛내던 성좌들은 고작 전염병이나 오크 따위를 이겨내지 못해 죽어갔다. 개중 어떤 성좌들은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861번 섬의 참가자들이 전멸하였습니다.]
[1896번 섬의 참가자들이 전멸하였습니다.]
······시작됐군.
아마 지금쯤, ‘소섬’ 전역은 끔찍한 비극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동안 무시했던 하급 괴수종들에게 죽어 나가는 성좌들······.
[다수의 성좌들이 ‘환생자들의 섬’의 난이도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에 항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항의해도 소용없다.
이 섬은 원래 그런 섬이다.
마왕이든, 대천사든······ 누구든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목이 떨어지는 곳.
뀌룩.
근처의 수풀에서 들려오는 울음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이 섬에서 저런 식으로 우는 괴수는 내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다. 연녹색 피부를 가진, 내 키의 반 정도 되는 난쟁이 괴수.
······‘고블린’인가.
나는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토해냈다.
오크가 아니라 고블린이라면, 정신만 바짝 차리면 해볼 만하다.
퀴에에에에!
귀청이 찢어지는 고성. 나는 반사적으로 울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검을 휘둘렀다.
형편없는 근력 때문인지 내 몸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휘둘러진 방향을 향해 쭉 끌려갔다.
푸슈슛!
운이 좋게도 풀쩍 뛰어오른 첫 번째 녀석이 눈먼 칼날에 맞아 바닥을 뒹굴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1세대의 법칙 하나. 고블린들은 절대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다친 고블린을 밟고 도약한 두 마리의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가시 곤봉을 휘둘러왔다.
찌이이익!
개중 한 녀석이 휘두른 곤봉에 허벅지 바깥쪽에 긴 찰과상이 남았다.
빌어먹을······ 여기선 마왕보다 고블린이 더 무섭다더니.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그나마도 [제4의 벽]이 없었더라면, 나 역시 고블린들의 난타에 허둥대다 다른 성좌들처럼 죽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섬의 관리자’가 당신이 사용 중인 스킬의 불공정성을 염려합니다.]
[‘섬의 관리자’가 이곳에서 해당 스킬은 사용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 관리자의 항의에 동의합니다.]
츠츠츠츳······!
[‘제4의 벽’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김독 자 미 안」
‘응?’
「이 섬에 서 는 힘 이 빠 져」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내 정신을 감싸던 장벽의 일부가 희미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들어 있던 감각이 활성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았다.
[‘제4의 벽’의 두께가 얇아집니다.]
[‘제4의 벽’을 통해 강화된 당신의 정신력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제4의 벽’을 통해 경감되던 육체적 고통이 원래대로 돌아옵니다.]
······이런 망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