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357화
겨울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65번 시나리오까지 쾌속 클리어를 마친 <김독자 컴퍼니>는 일주일 전, 두 번째 ‘별자리의 맥락’에 도달했다.
마침내 ‘80번 시나리오’의 최소 도전 조건을 충족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양산형 제작자’로부터 광고비가 도착했습니다.]
[2,500,000코인을 받았습니다.]
성운의 잔고도 빠르게 쌓였다. 광고 한방에 250만 코인. [X급 페라르기니]가 꽤 호황인 모양이었다.
판매 수익의 일부를 꾸준히 지급받기로 했으니, 앞으로도 수입은 더 들어올 것이다.
“슬슬 때가 됐군요.”
그리고 마침내 시나리오 당일.
나는 채비를 마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이현성, 정희원, 이지혜, 신유승과 이길영. 거기다 장하영까지······.
“독자 씨, 진짜 이대로 출발해도 괜찮겠습니까?”
뭔가가 불안한 듯, 이현성이 말했다.
이해는 간다. 정확히 일주일 전 내가 내린 지침이 ‘80번 시나리오’가 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강이 해이해진 채로······.”
기강 해이라.
탄피에 안전핀까지 잃어버린 전적이 있는 참군인의 말이었다.
“어차피 지금 뭘 해도 최상위격 성좌들을 따라잡는 건 무리에요. 중요한 건 여기서 뭘 하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뭘 하느냐입니다. ······그나저나, 한 사람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수영 씨는 먼저 갔습니다. 자긴 명령 따윈 듣지 않는다고······.”
하여간 이 회사는 말 잘 듣는 직원이 하나도 없군.
뭐, 한수영이라면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고개를 돌리자 어머니를 비롯한 방랑자들이 [공단]의 정문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몸조심하렴.”
서울의 치안은 어머니와 방랑자들에게 맡겼다. 모두 후반부 시나리오에는 큰 욕심이 없는 사람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는 대신, 각자의 방식대로 삶을 꾸리고자 결심한 이들이었다.
최근 몰려든 화신들을 관리 감독하기로 한 이설화와 공필두도 서울에 남기로 했다.
“서울을 잘 부탁합니다.”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 건너편에서 초반부 시나리오를 공략 중인 화신들에게 둘러싸인 공필두가 퉁명스러운 말투로 뭔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는 거다. 무조건 남들보다 먼저 좋은 땅을 차지해야 한다 이거야! 알겠냐?”
······괜찮아야 할 텐데.
―나와 파천검성은 나중에 합류하지. 먼저 가거라.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는 키리오스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인 후, 나는 허공에 신호를 보냈다.
곧 시나리오 전송을 담당하는 하급 도깨비가 나타났다.
[<김독자 컴퍼니>.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전송 시작해.”
하급 도깨비의 읊조림과 함께 우리는 발밑의 포탈로 빨려 들어갔다.
꽤 고급 포탈인 모양인지, 시공간이 바뀌는 와중에도 현기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80번 시나리오 대기실에 진입하였습니다.]
평화로웠던 광화문의 풍경 대신 창백한 대리석이 깔린 대기실이 나타났다. 대기실은 미리 도착해 있던 성좌와 화신들의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시나리오는 언제 시작하는 거지?]
[빨리 열어! 시간 없으니까!]
성좌들 중에는 내가 익히 얼굴을 아는 녀석들도 있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마왕 선발전’ 이후로 보이지 않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뒤쪽에서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쟁쟁한 성좌들이 많은 것 같네요.”
“아저씨, 저기 란비르 칸이랑 페이후도 왔어요!”
“<파피루스>와 <탐라>도 보이는군요.”
추위를 견디는 펭귄들처럼 내 뒤에 바짝 붙어 있는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 서울에 막 상경한 시골 사람들 같기도 하다.
이지혜가 입술을 비죽이며 쏘아붙였다.
“아저씨, 뭘 그리 실실대?”
“너도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둬.”
멀리서 <올림포스> 출신의 몇몇 성좌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 설마 이번에도 공연을 하러 온 건 아니겠지.
그 뒤로는 <베다> 출신의 몇몇 성좌들과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의 모습도 보였다.
어쩌면 안나 크로프트나 유중혁도 저들 중에 섞여 있을 것이다.
[마왕, ‘예제공’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당신을 견제합니다.]
······역시, 이 녀석들도 왔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합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당신을 향해 사나운 기세를 드러냅니다.]
거기다 <에덴>의 대천사들까지.
확실히 80번 시나리오쯤 되면 규모 자체가 다르다.
우리는 이제 저 무시무시한 설화급 성좌들과 경쟁해야만 한다.
대광장의 중심에서 도깨비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비형이었다.
[다들 모이셨군요. 저는 이번 시나리오의 진행을 맡은 도깨비 비형이라고 합니다.]
보통 이만한 규모의 시나리오는 대도깨비가 주최하는 게 보통인데, 비형이 나온 걸 보면 [관리국] 내부에서 녀석의 위상이 꽤 올라간 모양이었다.
[본래 ‘성마대전’의 무대는 다른 곳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만, 이번에는 특수한 사정으로 ‘환생자들의 섬’이 시나리오 지역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뭐, 우리 윗 대가리들께서 하시는 일이 다 그렇잖아요?]
몇몇 성좌들이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든 <스타 스트림>이나 [관리국]을 욕하는 유머는 잘 듣는 법.
비형 자식, 개연성이 무섭지도 않은 모양이다.
[어떤 성좌님들은 이 무대가 낯설게 여겨지실지도 모릅니다. 워낙 오래된 장소인데다, 이젠 거의 사용되지 않는 곳이니까요. 시대의 흐름에 도태되었다고나 할까······.]
비형의 말과 함께, 하늘의 스크린에서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 시작될 시나리오의 무대인 ‘환생자들의 섬’이었다.
[우린 ‘성마대전’에 참가하러 온 거다. 무대 따윈 어디든 상관 없어!]
[별로 기대도 안 돼. 보나마나 또 소드마스터나 9서클 대마법사 같은 놈들을 잔뜩 풀어 놓은 세계관이겠지.]
벌써 시나리오를 체험하기라도 한 것처럼 성좌들이 비아냥거렸다.
그러자 비형이 말했다.
[소드마스터라······ 이번에는 그런 걱정은 고이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세계관은 좀 특별하니까요.]
비형의 말에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비형은 계속해서 말했다.
[애초에 ‘이 섬’이 막 열리던 시절에는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심지어는 마법 서클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오래된 섬이죠.]
비형의 말에, 다수의 성좌들이 귀를 기울였다.
개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쏟는 이들은 ‘미식협’의 회원들이었다.
아마 그들은, 이 섬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뭐, 자세한 건 직접 겪어보면 아실 테죠. 일단 시나리오에 필요한 설명부터 하겠습니다. ‘성마대전’의 무대가 될 ‘본섬’에 진출하기 전, 여러분들은 튜토리얼 지역을 먼저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곧이어 영상에 떠오른 것은 섬의 약도였다.
우주의 한복판에 떠 있는 거대한 섬과, 그 주변을 에워싼 작은 섬의 군도(群島).
비형은 군도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들은 섬의 가장자리인 ‘소섬’에서 시작하시게 됩니다. 이곳의 튜토리얼을 통해 여러분은 섬의 적응법을 배우고, 추후 ‘성마대전’의 주요 무대인 ‘본섬’으로 진출할 시나리오를 받으시게 되는 거죠.]
설명을 들어 보니 기존 ‘환생자들의 섬’의 규칙과 같은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다른 성좌들은 아니었다.
[튜토리얼? 우린 성좌다. 지금 장난치는 건가?]
[아휴, 물론 말이 튜토리얼이지, 반드시 수행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곧장 ‘본섬’으로 진출할 방법도 얼마든지 있으니 너무 화내시지 마세요.]
보통 도깨비가 저딴 식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튜토리얼을 진행하지 않으면 시나리오가 엿같이 굴러갈 것이란 뜻이다.
실제로 저 섬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다면 아마 이곳의 성좌들 중 절반 정도는 참가 신청을 철회할 텐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비형이 이쪽을 보며 윙크를 했다.
[원래 시나리오는 설명 없이 시작해야 참맛인데, 제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그럼 다들 시작할 ‘소섬’을 골라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섬에서 시작하고 싶으신 분들은, 같은 섬을 고르셔도 됩니다.]
비형의 맺음말과 함께, 성좌들이 자신의 출발지를 고르기 시작했다.
나와 일행들은 같은 섬을 골랐다. 함께 갈 수 있다는데 굳이 떨어질 필요는 없었으니까.
몇몇 성좌들이 눈치를 보다가 내가 고르는 섬을 따라 선택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일행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어제 제가 한 말 기억하시죠?”
정희원이 대답했다.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섬의 중앙으로 달려가라고 했던 것 말이죠?”
“예. 절대 다른 녀석들과 싸울 생각 말고, 무조건 섬 중앙의 마을을 찾아 달리십시오.”
이번 시나리오는 지금껏 우리가 겪었던 시나리오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평범한 형태로 튜토리얼에 임해서는, 아무리 일행들이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내가 ‘멸살법’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이제 일행들은 내 제안에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뭔가 씁쓸한 배덕감이 들었다.
모든 성좌들의 준비가 끝나자, 비형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제 시나리오 전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았다.
이번 시나리오는 검을 뽑는 일 분 일 초까지 중요하다.
“모두, 마을에서 만납시다.”
동시에 일행들과 내 몸이 동시에 빛무리로 바뀌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80 ― ‘환생자들의 섬’이 시작되었습니다.]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어둠으로 물들었던 사위가 밝게 개었다.
코를 찌르는 풀숲의 냄새. 나는 섬의 삼림지대에 내던져져 있었다. 주변에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모두 섬의 다른 장소로 전송되었을 것이다.
[현재 당신은 ‘531번 섬’의 탐험지대에 있습니다. 안내원이 있는 마을을 찾으세요.]
[히든 시나리오― ‘생존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하늘에서 쏟아지는 도깨비의 메시지.
[이대로는 재미가 없겠죠? 시작은 서바이벌이 제맛이니까요. 성좌님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모처럼 예전으로 돌아간 기분을 마음껏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생존 게임>
분류 : 히든
난이도 : SSS
클리어 조건 : 함께 진입한 경쟁자들을 피해 섬의 마을로 진입하거나, 경쟁자들을 살해하세요.
제한시간 : 24시간
보상 : 50,000코인, 튜토리얼 지역 클리어.
실패시 : 사망
+
내 이럴 줄 알았지.
굳이 이 섬을 무대로 택한 도깨비들이 그냥 넘어갈 턱이 없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주변에서 불길한 기척이 느껴졌다. 모습을 숨기기엔 너무 늦은 타이밍이었다.
[마왕, ‘기하학의 마공작’이 당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 녀석은 나를 쫓아온 마왕들 중 하나였다.
서열 65위의 마왕, ‘기하학의 마공작’ 안드레알푸스.
[구원의 마왕. 마왕 암두시아스를 해치웠다지?]
화려한 깃털로 덮인 녀석의 손아귀에서 짙푸른 청염의 마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안드레알푸스는 모든 종류의 마법을 극성으로 익혔다고 알려진 마왕이었다.
[종마 하나를 해치운 정도로 기고만장하지 마라.]
공작새처럼 생긴 녀석은 뾰족한 부리로 말을 도도도 내뱉고는 마법 주문을 영창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아마 첫 사냥감을 나로 정한 모양.
나 역시 녀석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안드레알푸스가 중얼거렸다.
[보법도 형편없고, 스킬 숙련도도 터무니없군. 평범한 인간 수준이야. 고작 그 정도로 암두시아스를 꺾었단 말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열심히 달려갔다. [바람의 길]도 사용하지 않아 평소보다 훨씬 느린 발걸음이었다.
안드레알푸스가 조소했다.
[죽어라.]
녀석이 발동한 마법은 9서클 마법인 [헬파이어]. 말 그대로 지옥의 불길을 빌려오는, 직격으로 맞는다면 나조차도 무사할 수 없는 대마법이었다.
그런데 녀석이 마법을 발동한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푸슈슛.
삼림 전체를 불태워야 할 헬파이어가, 작은 불꽃을 만들더니 힘없이 꺼져버렸던 것이다.
[섬의 개연성이 마법 ‘헬파이어’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당황한 안드레알푸스가 퍼뜩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녀석의 코앞에 있었다.
“이 섬에는 소드마스터도 9서클 대마법사도 없다고 했잖아.”
경악한 안드레알푸스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 ‘헬파이어’도 당연히 없지 않겠어?”
믿어지지 않겠지.
하지만 이게 이 섬의 법칙이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강력한 개연성이 지배하는 곳.
[이 섬에는 강력한 개연성의 힘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섬에서는 ‘특성창’을 사용할 수 없으며, 시스템 데이터로 환산되는 모든 종류의 종합 능력치가 초기화됩니다.]
이 섬에서는 시스템을 사용할 수 없고.
[이 섬에서는 1세대 이후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스킬’ 사용이 제한됩니다.]
[이 섬에서는 ‘성흔’ 및 ‘설화’의 숙련치가 초기화됩니다.]
지금껏 얻은 모든 전투 기술들이 무용해진다.
뒤늦게 방호 스킬을 외우려던 안드레알푸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아무런 기교도 없이 무식하게 검을 내질렀다.
어떤 스킬도 성흔도 담겨 있지 않은 일격에, 마왕 안드레알푸스의 가슴이 허망하게 꿰뚫렸다.
평소보다 몇 배는 무거운 [부러지지 않는 신념].
칼을 쥔 손아귀가 덜덜 떨렸다.
종합 능력치의 혜택이 사라진 것은 녀석만이 아니었다.
무더운 삼림 속에서, 뜨거운 볕이 내 피부를 태우고 있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은 마왕의 화신체에서 검을 빼냈다. 빈약한 근육 때문인지, 검을 쥐는 것조차 버거웠다.
“······이래서 내가 옛날이야기를 안 좋아한다니까.”
소드마스터도, SSS급 헌터도, 시스템도 특성창도 없는 세계.
[오래된 설화들이 당신의 시선에 반응합니다.]
환생자들의 섬.
이곳은 별들의 흐름 속에 도태된 ‘1세대 설화’들의 무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