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화

351화 Episode 66. 선악의 저편 처음에는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왕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아스모데우스가 내게 박수를 치고, 얼떨떨한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김독자 컴퍼니>가 대상을 받았다. 하지만 기쁜 마음보다는 불길한 마음이 앞섰다. 대상이라고? 우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선악의 이중주’에서? 불길함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올해의 수상작은, 아직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습니다.]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다는 메시지에, 몇몇 마왕들과 성좌들이 동시에 술렁였다. [선악이 판별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도깨비가 곧바로 대답했다. [역대 ‘대상’ 수상작들은 대도깨비들과 절대 선, 절대 악의 성좌들이 함께 합의해 정하게 되어 있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그 ‘대도깨비’들이?] 성좌들과 마왕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들이었다. ‘절대 선’이나 ‘절대 악’에 속한 성좌들이야 당연히 팔이 안으로 굽을 게 당연했지만, 대도깨비들까지 합의점이 나지 않았다니. [‘선악의 이중주’가 만들어진 이래 그런 적은 한 번도 없네. 아니, 성마대전(聖魔大戰)이 종료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야!] [판별할 수 없다니? 그런 이야기가 있을 리 없다. 선악의 저울은 어느 쪽으로든 기울 수밖에 없어!] 흥분한 성좌와 마왕들의 고성이 오갔다. 그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거대 설화 시나리오는 성운들의 합의나 조작으로 승자가 결정된다. <기간토마키아>가 일종의 관광상품으로 팔려나갔던 것처럼, 다른 거대 설화 시나리오 또한 우선주(優先株)가 팔려나가듯 선악의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간토마키아>를 무너뜨리고 만들어진 우리의 설화는, 그 탄생 경위가 완전히 달랐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올림포스>에서 시행하는 거대 설화 시나리오가 무너지며 탄생한 설화. 애초에 예정에 없던 설화였으니 선악을 미리 결정할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도깨비가 웃었다. [뭐, 대도깨비님들의 의견을 저 같은 것이 어찌 알겠습니까? 아무튼 이번 대상은 이 자리에서 ‘선악’의 판별을 직접 내리게 되었습니다.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손들어 발표해 주십시오.] 그제야 도깨비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 망할 자식들이. 애초에, 이 녀석들에게 <김독자 컴퍼니>의 수상 여부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쌓은 설화의 선악 여부였고, 그로 인해 달라질 자신들의 위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 설화는 ‘악’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서열 50위의 마왕인 ‘예제공’이었다. 예제공. 그의 진명은 50번째 마계의 주인인 ‘푸르카스’다. [‘구원의 마왕’은 ‘마왕’이지. 덜떨어진 마왕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는 마계의 주인이고, 고로 그의 모든 행동은 악할 수밖에 없다.] 과연, 맞춤법도 제대로 못 지키는 예제공 답게 한심한 논리였다. 그러자 반대편 진영에서 누군가 손을 들었다. [그 의견엔 이의가 있심.]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이었다. 라파엘은 쯧쯧, 하며 손가락을 내젓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령 물건을 훔치고 악인이 된 사람이 있다고 쳐보셈. 세상 모두가 그를 악인으로 불렀고, 그렇기에 그는 악인이 되었음. 그런데 이 악인이 알고 보니 훔친 돈으로 사람들을 구한 거임. 가난한 사람에겐 빵을 주고, 목마른 이들에겐 물을 주며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면?] 나는 라파엘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 사람은 계속 ‘악인’인 거임? 한 번 ‘악인’으로 규정되었으니까?] [글쎄, 그건······ 그러니까.] 말을 잘 못하는 예제공은 라파엘의 논리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때, 내 곁에 있던 마왕이 손을 들어 예제공을 도왔다. [지금 이곳에서 ‘선한 악인의 역설’을 논해보자는 것인가요?] 아스모데우스의 붉게 물든 동공이 격앙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는 라파엘에게 빚이 있었지.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심.] 구름 침대에 엎드린 라파엘이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무대의 대형 스크린에서, 나와 일행들이 <기간토마키아>를 수행하는 장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며 라파엘이 말을 이었다. [결국 존재란 설화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설화는 존재가 행한 사건들의 총체로 만들어지는 것임. 그런데 아무리 봐도, 이 설화에 누적된 사건에서는 악을 찾아보기는 힘듦.] 「선한 악인의 역설」. 이 역설은 모든 존재의 ‘선악’은 곧 그 존재가 쌓은 이야기로 규정된다는 함의를 품고 있다. 라파엘은 분할 화면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 화면은, 내가 명계에 방문해 거신들을 해방시키는 장면이었다. [‘구원의 마왕’은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던 시나리오의 약자들을 해방시켰음.] 두 번째 화면은, 일행들이 파천검성과 함께 관광지로 변한 <기간토마키아>에 저항하는 장면이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구성원들은, <기간토마키아>의 불합리한 시나리오 구성에 반발했음.] 마지막 화면은, 역시나 나와 일행들이 성화를 불태워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과 대적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거대 성운의 지배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불가항력의 대상과 맞서 싸웠음. 보셈.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의 어느 구석에서 ‘악’을 찾을 수 있다는 거심?] 장면의 디테일을 들어 조목조목 설명하는 라파엘의 화법에, 다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마왕들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정확히는, 아스모데우스만을 제외하면 그랬다. [재미있군요. 이토록 천사들의 비호를 받으니, 어쩌면 ‘구원의 마왕’은 정말로 ‘선한 마왕’일지도 모르겠어.] [인정하는 거임?] [아뇨. 당신의 말에는 허점이 있으니까. 일단 당신의 말대로 ‘존재는 설화’고, 설화란 곧 ‘사건의 총체’라 치죠.] 아스모데우스가 싱긋 웃으며 나를 일별했다. [아시다시피 설화라는 것은 결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설화는 반드시 다른 설화와 관계되어 있고, 그에 영향을 미칩니다. 「신화를 삼킨 성화」도 마찬가지죠.] 그와 동시에, 전방의 스크린에서 다른 화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젠가 있었던 첫 번째 시나리오의 장면이었다. 화면에는 내 손에 의해 터져 나간, 수태한 메뚜기의 알들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구원의 마왕’은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죠.] 몇몇 천사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스모데우스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런 일은 또 있었습니다.] 뒤이어 화면에 떠오른 것은 ‘여덟 번째 시나리오’였다. 서울 최강의 화신이 희생하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었던 시나리오. 화면에는 특성 효과로 ‘여덟 개의 목숨’을 가진 내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구원의 마왕’은 여분의 목숨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최강의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더 커다란 희생이 생기기 전에 얼마든지 시나리오를 끝낼 수 있었다는 거죠.] 성좌들의 웅성거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원하는 사람은 살리고, 원하지 않는 생명은 방관하는 자. ‘구원의 마왕’은 그런 존재입니다. 그는 당신들이 싫어하는 차별을 행하는 마왕입니다. 이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끔찍한 죄인 ‘차별’ 말입니다.] 승리를 선언하듯, 아스모데우스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묻겠습니다, <에덴>. 그대들은 아직도 ‘구원의 마왕’을 ‘선한 마왕’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순간 좌중이 잠잠해졌다. 천사들 중 일부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고, 마왕들 중 다수는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한 성좌가 있었다. [■■, 그딴 모순은 누구나 가지고 있어.] 우리엘이었다. [중요한 것은 죄의 누적이 아니라, 그 사건들을 통해 변화하는 방향이야. 그리고 ‘구원의 마왕’은 정의로운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었다고!] [요즘 천사들은 선악의 정의에 대해 굉장히 관대하군요. 최근 당신이 마왕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뭐?] [흐음, 사실인가 보군요. 지난번에 봤을 때도 혹시나 싶었지만―] 우리엘이 벌떡 일어섰다. [이 ■같은 ■■가 지금······!] 파츠츠츠츠······! 양 테이블을 중심으로 엄청난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대천사들과 마왕들의 욕설이 난무하고, 곧이어 여기저기서 의견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제 타깃은 나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정희원의 살인을 공격했고. 다른 누군가는 첫 번째 시나리오에서 이현성의 비겁함을 공격했으며. 이지혜가 자신의 친구를 죽인 것을 물고 늘어지는 이도 있었다. 우리의 생(生)이, 우리가 쌓아온 역사가,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빨을 드러냅니다.] 일행들의 표정이 점차 창백해지고 있었다. 이미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받아온 사람들. 삶이 관음되고, 성좌들의 유희 거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어떻게든 여기까지 버텨온 사람들이었다. [잠깐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우리엘이 소리쳤으나, 이미 성좌들과 마왕들은 <김독자 컴퍼니>의 상처를 헤집기에 여념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신유승과 이길영의 과거마저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선 것은 마침내 이길영의 트라우마와 배후성이 언급된 순간이었다. “그만들 하시죠.” 내 말에, 순간적으로 좌중이 나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잘못 발언하면 위험해진다는 것은 안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는 두 개의 거대한 조류 사이에 놓인 돛단배나 다름없었다. 언제든, 조류를 잘못 타면 침몰할 수 있는 작은 배. 하지만, 아무리 작은 배라도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 정도는 선택할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배의 선장이었다. “이쯤 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결론이 나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아셨을 텐데요?” 내가 지금껏 개입하지 않은 것은, 성좌와 마왕들이 스스로 모순에 빠지길 기다렸기 때문이다. “대도깨비들도 판단하지 못한 일을, 당신들이 여기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독자 컴퍼니>는 선도 악도 아니다. 애초에 남들이 정한 ‘선악’의 개념에 놀아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의 말이 맞다.] 뜻밖에도 그 말을 한 것은 서열 5위의 마왕인 ‘검은 갈기의 사자’, 마르바스였다. 그는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확실히, 여기서 우리가 떠들어 봐야 무용한 일이다. 불필요한 논쟁은 그만두지.] [마르바스! 하지만······.] [애초에, 본인에게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등골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직접 정하게 하지. 이 ‘설화’가 선인지, 아니면 악인지. 그러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나?] 그 말과 함께 모든 마왕과 성좌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며 서늘한 감각이 스쳤다. 곧이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한 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해당 설화의 선악을 판별해 주십시오.] 만약 내가 여기서 선악을 선택한다면, 나는 이들이 주장하는 ‘선’과 ‘악’ 중 하나의 편을 드는 셈이 된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김독자 컴퍼니>의 행보만이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우리가 선악을 선택하게 되면 앞으로의 시나리오에 끔찍한 미래가 도래할 수도 있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성좌들이나 마왕들의 지탄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善)이다.” 나는 멍하니 그 말을 한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어떤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던 검은 코트의 사내. 유중혁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설화는, 선이다.”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던 나머지 입만 뻐끔거렸다. 유중혁이 미친 걸까 싶기도 했고, 저 녀석이 뭔가 함정에 빠진 걸까 싶기도 했다. 유중혁의 곁에 앉은 메타트론이 나를 향해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팔뚝에 서서히 소름이 돋았다. 설마, 메타트론이 유중혁을 데려온 이유는······. [해당 ‘거대 설화’의 지분을 가진 존재들은 ‘선악’의 판별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뒤이어 떠오른 메시지에 성좌와 마왕들의 입이 희미하게 벌어졌다. [화신 ‘유중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22.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유중혁’의 선언으로 인해 해당 설화는 ‘선’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지금 이 설화를 ‘선’ 또는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김독자 컴퍼니>의 모두는 이 설화에 대한 지분이 있으니까. [해당 설화를 ‘선’으로 승인하시겠습니까?]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이제 어떻게 할 거냐는 듯이. ―미친놈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한낮의 밀회]를 통해 녀석에게 말을 걸었지만,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녀석을 노려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현재 해당 인물이 당신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뭐? [만약 다른 담화자의 반론이 없을 시, 해당 설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확정 완료까지 30초 남았습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줄어드는 숫자와 함께, 마왕들이 고성을 질러대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란 일행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희원, 이현성, 신유승, 이길영······. 이 세계의 끝까지 반드시 데려가고 싶은 사람들. 나는 으드득 주먹을 쥐었다. 결코, 우리의 설화는 성좌들 기준의 선이나 악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는 이 세계의 올바른 결말에 도달할 수 없다. 유중혁이 ‘선’을 선언했으니, 이제 판결을 뒤집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자신의 격을 드러냅니다.] 어깻죽지를 뚫고 나오는 검은 깃털 날개와, 머리 위로 돋아난 작은 뿔. 강렬한 스파크와 함께 웅성거리던 소음이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천천히 숨을 들이켠 내가, 유중혁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설화는 악(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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