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화
350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생각했다.
딱히 어느 쪽을 선택할 생각은 없지만, 일단 지금 나는 ‘마왕’이다.
그러니, 자연히 앉아야 할 테이블은······.
꾸욱.
[자자, 이리로 와. 내가 미리 자리 깔아 놨어.]
내게 팔짱을 낀 우리엘이 나와 일행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우리엘에게 질질 끌려갔다.
아주 자연스럽게 대천사들이 있는 테이블로 나를 이끌어 가는 우리엘.
반대편 테이블에서, 마왕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잠깐만요. 우리엘. 저는······.”
나는 얼떨결에 우리엘 옆 좌석에 앉았고, 일행들은 내 뒤쪽의 좌석에 차례대로 앉았다.
내 앞쪽에 앉아 있던 라파엘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님 마왕 아니심?]
“저, 그게······.”
그러거나 말거나 내 왼편에 앉은 우리엘은 희희낙락한 모습이었다.
[좋아, 좋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오른쪽을 돌아보자,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뭐야, 네가 왜 여깄어?”
대체 언제 온 것인지, 유중혁이 특유의 무시무시한 살기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타트론도 있었다.
자리 배치를 보아하니 유중혁은 메타트론이 데려온 듯한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나를 일별한 메타트론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우리엘을 타박했다.
[우리엘, 그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구원의 마왕’은 ‘마왕’입니다.]
[얘가 어딜 봐서 마왕이에요, 서기관.]
[수식언부터 마왕입니다. 돌려보내세요.]
[싫어요.]
우리엘과 메타트론이 투닥거림과 동시에, 홀의 중앙에서 사회를 맡은 도깨비가 나타났다. 뿔의 개수와 크기를 보아하니 상급 도깨비인 듯했다.
[자, 지금부터 식순을······.]
도깨비의 시선이, 정확히 나에게 멈춰 있었다.
[흠. 앞서 공지를 드렸는데 지키지 않는 분이 계시는군요. 성좌 및 마왕님들은 ‘전용 좌석’을 지켜 앉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무심코 내 자리에 적힌 수식언을 확인했다.
[이 자리는 ‘타락의 구원자’ 전용 좌석입니다.]
······하필 앉아도 이 자식 자리였나. 미카엘은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뒤쪽의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러분은 그냥 이쪽에 계십시오. 그게 더 안전할 겁니다.”
“그럼 독자 씨는요?”
“전 괜찮습니다.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연말 시상식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다들 그동안 고생했으니 가끔은 이런 시나리오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행들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여전히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이번 ‘선악의 이중주’를 계기로 선악의 균형은 흐트러지게 되니까.
나는 ‘히잉’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우리엘에게 미소를 지어준 후,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홀의 중심을 혼자서 건너갔다.
[마왕, ‘예제공’이 당신을 덜떨어진 마왕이라 생각합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습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당신의 품격을 의심합니다.]
입학식 때 혼자 다른 반에 가서 앉아 있었던 때 뒤로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정말 간만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멍청함을 좋아합니다.]
······심연의 흑염룡? 이 자식도 와 있는 건가?
잠시 후, 나는 간신히 내 지정 좌석을 찾아냈다.
[이거 우연이군요, 또 짝꿍이 되다니.]
마침 내 옆자리는 아스모데우스였다.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순서는 간단한 다과와 함께 특별 게스트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식순만 보자면 정말로 연말 시상식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눈앞의 접시에 놓인 스테이크를 내려다보았다.
「필레산 최고급 소드마스터의 절규」
하여간 취향들은 여전하시구만.
나는 포크를 내려놓고 번쩍거리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특별 게스트의 공연이라······, 또 무슨 화신들이라도 섭외한 모양이었다.
[오늘 무대는 매우 특별합니다. 평소 섭외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왔지만, 한 번도 응해주시지 않던 분들이시거든요.]
누구길래?
[소개합니다! ‘술과 황홀경의 신’! 그리고 ‘사랑과 미의 여신’!]
······뭐?
화려한 조명과 함께, 무대 위에는 수트를 입고 다이아몬드 장갑을 낀 디오니소스와 블랙 점프 수트를 입은 아프로디테가 등장했다.
그리고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뒤쪽을 보니 오르페우스의 대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워~ 화려한 조명은 나만의 것.]
노래를 시작하는 디오니소스.
노래는 계속되었다.
[너희는 절대 흥을 깨선 안돼― 안되지 안돼]
당최 무슨 노래인지 모르겠다.
성좌들은 뜻밖의 이벤트에 신난 듯했다. 특히 아프로디테와 그녀의 화신들이 보여준 박력 넘치는 군무 댄스에는 모두가 환호하는 눈치였다.
몇몇 성좌들이 디오니소스를 향해 포크를 던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기간토마키아>가 끝난 뒤 디오니소스가 그런 말을 했었다.
―······너네 때문에 당분간 우리 <올림포스> 고생 좀 하겠다.
설마 그게 이런 의미였을 줄은 몰랐다.
아마 이번 게스트 출연료로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는 막대한 코인을 받을 것이다.
<올림포스> 성좌들의 드높은 자존심을 생각하면 얼마를 받든 수치스러운 건 마찬가지겠지만.
[워어! 흥을 깨지마! 흥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 <바쿠스와 여신도단> 많이 사랑해 주세요!]
한동안 음식물 세례를 얻어 맞던 디오니소스가 머리에 스파게티를 얹은 채 웃으며 퇴장했다.
저렇게 신나게 웃고 있다니······ 연기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무대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주변에 앉은 마왕들을 관찰했다.
물론, 관찰당하고 있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위권의 마왕들이 극성이었다.
[마왕, ‘시체를 철학하는 군주’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당신을 견제합니다.]
하루 만에 순위가 73위에서 67위로 격상되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녀석들은 언제 내가 ‘승격전’을 요청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슬슬 시상식을 진행하겠습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래도 지금부터가 진짜인 듯했다.
[좋은 설화란 성좌와 화신 사이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성좌와 화신뿐만 아니라, 화신과 화신 간에도 훌륭한 케미를 보여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위한 ‘작은 시상’을 준비했습니다.]
성좌들의 환호가 홀을 가득 채웠다.
원작에 이런 내용도 있었나?
[이번 시즌의 ‘베스트 케미’상 후보들입니다!]
그와 동시에 영상들이 떠올랐다.
후보군들 중 몇몇 인물들이 무척 익숙했다.
―무리야, 저건 절대로 안 된다고.
―어차피 이대로면 죽어.
화면에 떠오른 것은 두 아이였다.
[첫 번째 후보, 화신 ‘신유승’과 화신 ‘이길영’!]
갑작스레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에, 휘둥그레 커진 신유승과 이길영의 눈이 보였다.
······이건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도개교 넘을 때 베스트 케미 상 어쩌구 하는 플래카드를 본 거 같았다.
화면에 소개된 영상은 언젠가 [암흑성]에서 ‘키메라 드래곤’을 길들일 때 아이들의 모습이었다. 괴수들의 파도를 헤치고, 용기를 내어 드래곤을 향해 나아가는 두 아이의 모습.
어쩐지 내가 뭉클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후보 소개는 계속되었다.
[두 번째 후보, 화신 ‘정희원’과 화신 ‘이현성’!]
······또 우리 성운?
―희원 씨,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자료 화면은 언젠가 이현성이 [강철화]를 익혔던 순간의 영상인 듯했다. 니르바나에 의해 폭주하는 정희원의 [지옥염화]를 소화(消火)하기 위해, 몸 바쳐 자신을 희생했던 이현성의 모습.
테이블 건너편으로 얼굴이 새빨개진 이현성과 이마를 짚은 정희원이 보였다.
저렇게 보니, 둘이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어서 세 번째 후보입니다!]
잠시 후 화면에 떠오른 장면을 목격한 나는 경악했다.
······뭐야 저거?
―김독자, 기회는 한 번뿐이다.
―내겐 늘 한 번뿐이었어.
자료 화면이 나오자, 우리엘과 에덴의 대천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화면에 나온 두 사람은, 나와 유중혁이었다.
아무래도 ‘헤라클레스’를 해치우기 위해 함께 창을 던지던 순간인 것 같았다.
도깨비가 웃으며 말했다.
[최근 가장 떠오르는 세 번째 후보, 성좌 ‘구원의 마왕’과 화신 ‘유중혁’입니다!]
테이블 건너편에서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긴 유중혁이 보였다.
······저 자식이, 나도 싫거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이지혜와 정희원은 뭐가 웃긴 지 깔깔거리다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자, 그럼 시상의 주인공을 발표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3번은 안 된다. 3번은 안 돼.
두구두구두구!
[이번 시즌의 베스트 케미는 화신 ‘신유승’과 ‘이길영’ 커플입니다!]
터지는 폭죽과 함께 발표되는 이름.
다행히 성좌들은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었다.
천사들의 탄식과 함께, 이길영과 신유승이 우물쭈물하며 무대로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에, 어. 그러니까······ 이런 상을 주셔서······ 감사하고요······.”
엄청나게 긴장한 신유승이 말을 더듬으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마이크를 빼앗은 것은 이길영이었다.
“독자 형 사랑해요!”
“사랑해요 아저씨!”
“<김독자 컴퍼니> 최고!”
대천사들은 그런 아이들이 귀엽다는 듯 박수를 보냈다.
사이좋게 상금과 상패를 받은 아이들은 투닥거리며 자리로 돌아갔다.
[험험. 그럼 계속해서 시상에 들어가도록 하죠.]
‘베스트 케미’ 시상이 특별했을 뿐, 사실 ‘선악의 이중주’에서 주어지는 대부분의 상들은 ‘거대 설화’에 주어지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번 시즌에 괜찮은 ‘거대 설화’를 얻은 주요 후보들은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이곳에서 받은 ‘상패’는 모두 격을 높여주는 성유물들이다.
그러니 성좌들이 환장하지 않을 수 있나.
곁에 있던 아스모데우스가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기대되지 않나요? 당신이 무슨 상을 받게 될지.]
“내가 받을 턱이 없잖아.”
받아봤자 고작 신인상이겠지.
애초에 이런 시상식에서 신인 마왕인 내게 큰 상을 줄 턱이 없었다.
아스모데우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어지는 시상을 지켜보았다.
수상 여부는 둘째 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애초에 ‘선악의 이중주’는 단순한 ‘시상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악의 이중주.
시나리오의 선악을 판단하는 선과 악의 연회.
말이 연회지, 사실 이 이벤트는 일정한 주기를 간격으로 펼쳐지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우주 각지에서 펼쳐진 ‘거대 설화’의 정경이 허공에 떠오르고 있었다.
[신악상(新惡賞) 수상작은 거대 설화, 「치우의 후예」입니다!]
치우의 후예. <황제> 쪽에서 발생한 거대 설화였다.
아마 화신 ‘페이후’가 참가했던 설화일 것이다.
지금부터 수상할 ‘거대 설화’들은, 모두 ‘선’과 ‘악’의 구도로 나누어진다.
즉, ‘선’에서 주는 상과 ‘악’에서 주는 상이 다른 것이다.
페이후는 악인으로 판단되었고, 때문에 마왕들이 주는 상을 받은 거겠지.
[신선상(新善賞) 수상작은 거대 설화, 「스핑크스의 수호자」 입니다!]
스핑크스의 수호자. <파피루스>의 거대 설화다.
아마 ‘란비르 칸’이 받았겠군.
란비르 칸은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베푸는 선인인 만큼, 절대 선 계통의 지지를 받은 듯했다.
[수상자들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시상 대표로 나온 페이후와 란비르 칸이 간단한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일대일 격투의 달인인 페이후.
그리고 대군 전투의 귀재인 란비르 칸.
지금쯤 거대 설화 시나리오에 돌입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벌써 저런 대단한 설화들을 모았다니 놀라웠다.
역시 ‘원작’의 등장인물들은 다르다.
[자, 다음 순서는······.]
신인상의 순서가 지나가고, 각 분야의 우수상 시상이 이어졌다.
한 번은 악이, 한 번은 선이. 마치 나눠 갖기라도 하듯 주어지는 상들.
아마 저 상들 중 몇 개는 일부 성좌들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갔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이 선과 악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이니까.
[먼저 이 상을 주신 절대 악 계통의 성좌 및 마왕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성에 계신 배후성님, 채널을 운영해주신 도깨비님, 그리고······.]
기나긴 우수상 수상 소감까지 끝나자, 나는 기분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당연히 이쯤에서 상 하나 정도는 받을 줄 알았는데, 순서가 훌쩍 지나가 버린 까닭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김독자 컴퍼니> 정도면 신인상 정도는 줄만하지 않나? 그래도 우리가 만든 설화가 있는데······.
[이번 시즌의 최우수상 수상작은, 거대 설화······.]
최우수상을 받은 것은 안나 크로프트의 ‘차라투스트라’였다.
사정상 참석을 못했는지, 대신 수상 소감을 읊은 것은 셀레나 킴이었다.
생각해 보니 원작에서도 이 연회의 최우수상은 안나 크로프트였지.
어느새 남은 것은 대상뿐.
그쯤 되자 나는 뭔가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선악의 이중주’는 ‘대상’의 발표를 통해 그 해의 ‘선악 균형’이 가려진다.」
사실 이 연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이다.
오직 ‘대상’의 수상에 따라, 선과 악의 권력 위상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번 시즌의 가장 위대한 ‘설화’는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웃고 떠들던 마왕들과 천사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번 시즌의 대상 수상작은―]
그리고 도깨비의 입술이 열렸다.
녀석이 토해내는 음절들을 들으며, 세상의 현실감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균형이 삐거덕거리고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