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352화
내 선언과 함께, 허공의 시스템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당신은 현재 해당 설화의 최고 담화자입니다.]
[당신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33.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선언으로 인해 해당 설화는 ‘악’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당황한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일행들을 안심시키듯 손을 들었다. 그리고 유중혁에게 [한낮의 밀회]를 전했다.
―유중혁, 이대로 가면 우리 설화는 ‘악’으로 확정되게 돼. 그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한 내 지분율은 33.7%.
그리고 유중혁의 지분율은 22.8%.
내가 10.9%나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두 담화자의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담화자들은 합의를 통해 선악을 판결해 주십시오.]
[제한시간 내에 합의가 이행되지 않을 시 판결은 지분이 더 높은 쪽의 선택을 따릅니다.]
[판결 종료까지 10분이 연장되었습니다.]
유중혁은 답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메시지를 보냈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선악’이 결정되어서는 안 돼. 빨리 선언을 철회해. 그럼 나도 철회할 테니까.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노려봅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당신의 판단에 즐거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에 당황합니다.]
우리엘에겐 미안하지만, 여기서 절대로 선악이 결정되어선 안 된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마왕들의 최상석.
2번째 마계의 주인,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악’의 편을 들기 위해 나선 것이 아니었다.
조급해진 내가 다시 한번 외쳤다.
―야! 내 말 안 들려?
그리고 유중혁이 움직였다.
테이블을 넘어 무대로 걸어 나온 유중혁이 스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뽑았다.
[화신 ‘유중혁’이 당신과의 합의를 거절합니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녀석의 칼날을 피했다.
테이블이 쪼개지고 무대가 난장판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놀란 마왕들의 고성과 동시에, 나 역시 품에서 검을 꺼내 쥐었다.
유중혁의 [흑천마도]와 내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충돌하며 파찰음을 터트렸다. 욱신거리는 손목.
“이런 미친······.”
놀란 우리엘이 이쪽으로 달려오려고 했지만, 무대에 설치된 푸른 막이 성좌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츠츠츠츠츳!
[현재 ‘선악의 이중주’에 참석한 성좌 및 마왕들은 서로 적대할 수 없습니다!]
[지분 판결에 관한 타성좌들의 조력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도깨비 ‘바람’이 당신의 선택을 기대합니다.]
[대도깨비 ‘하롱’이 당신의 결정을 지켜봅니다.]
심지어 대도깨비까지 자신의 존재를 노출했다.
관리국도 우리 설화의 ‘선악’ 판결을 주목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지금 이곳의 시나리오는 또 다른 채널을 통해 성류방송에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고오오오오!
나는 점점 격을 키우는 유중혁을 노려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
유중혁이 왜 갑자기 이런 짓을 벌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3회차 녀석에게 양보할 수는 없었다.
―유중혁, 지금 당장은 이해 못하겠지만 내 말 잘 들어.
어떻게든, 이 녀석을 설득해야 했다.
―만약 여기서 우리 설화가 선이나 악으로 고정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발생해.
원작에 따르면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자존심 싸움은 이번 시즌으로 분수령을 맞게 된다.
‘선악의 이중주’는 지난 몇 개의 시즌을 거치며 줄곧 ‘선’ 쪽이 대상을 받아왔다.
그 말은 즉, 이번 ‘선악의 이중주’의 결과에 마왕들이 칼을 갈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여기서 선이 이기면, ‘제2차 성마대전’이 발발할 거야.」
「반대로 악이 이기면, <에덴>의 입지가 좁아져 멸망이 가속화될 거고.」
나는 아직 성마대전을 대비할 만한 수준의 설화는 쌓지 못했다.
그렇다고 ‘악’이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도 않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지금은 내 말을······.
“그건 너의 ‘예언’인가?”
이글거리는 유중혁의 눈빛에 깊은 불신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예언.
그러고 보면 처음 유중혁을 만났을 때, 나를 ‘예언자’라고 소개했었다.
아직도 그걸 믿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차라리 이런 상황이면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유중혁이 다시 물었다.
“아니면, 그 ‘멸살법’이라는 책에 나오는 정보인가?”
“뭐?”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어떻게?
어떻게, 유중혁이 ‘멸살법’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이 상황을 못마땅해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들의 싸움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예상 밖의 상황에 혼란을 느낍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결정을 지켜봅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녀석은 두통이 오는 듯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어떤 의지에 거역하기라도 하듯, 유중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네놈의 말대로 하면, 이번 시나리오도 무사히 종료되는 건가?”
“유중혁, 너 지금······.”
“그것이, 미래 회차의 내가 사용한 방법이니까?”
쿠구구구구구!
“왜냐하면 그것이,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니까?”
갑자기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사위가 흔들렸고, 몸속 깊은 곳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떨림은 진앙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나는 격렬하게 떨리는 내 오른손을 붙잡았다.
고개를 들자 유중혁은 어깨너머의 일행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은 알고 있나?
유중혁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대답해라, 김독자.
[흑천마도]에서 흘러나오는 격의 반향이 강해졌다.
초월좌의 힘을 개방하는 유중혁.
지금부터는 정말로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를 움직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뜻대로 둘 수는 없다.
[당신은 해당 설화의 최고 담화자입니다.]
[당신의 억제력이 설화를 통제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격’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지배를 거부합니다.]
······뭐?
높은 지분율에도 불구하고 설화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포세이돈의 결계를 부쉈던 우리의 성화가, 유중혁의 [흑천마도]에 휘감기고 있었다.
그 새하얀 불꽃이 한 걸음씩 나를 삼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독자 씨, 정신 차려요!)」
유상아의 말과 함께, 나는 격을 방출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을 보호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함께 쌓았던 두 개의 설화가 공중에서 뒤엉키며 부딪쳤다.
「신화를 삼킨 성화」가 사나운 맹수처럼 「마계의 봄」을 물어뜯고 찢었다. 뜯겨나간 문자열들이 피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지금 둘 다 뭐 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화신 ‘정희원’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사부! 갑자기 왜 그래! 아저씨는 또 왜 ‘악’을 고른 건데!”
[화신 ‘이지혜’가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독자 씨! 유중혁 씨! 둘 다 그만두십시오!”
[화신 ‘이현성’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우리 형 괴롭히지 마, 시커먼 놈아!”
[화신 ‘이길영’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아저씨! 피해요!”
[화신 ‘신유승’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
차라리 지금으로서는 반가운 도움이었다.
「신화를 삼킨 성화」는 우리 모두의 설화.
즉, 이 설화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나와 유중혁뿐만이 아니었다.
[판결에 난입한 담화자들은 선악을 분별해 주십시오.]
[선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대결에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일행들은 혼란에 빠진 모습이었다.
갑자기 선악을 선택하라니, 당황스러울 법도 했다.
혼란 속에서 이길영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난 무조건 독자형 편이야.”
[화신 ‘이길영’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이길영’의 선언으로 인해 해당 설화는 ‘악’의 방향으로 기울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외쳤다.
“더이상 ‘악’을 선택하면 안 돼! 다들 ‘선’을 골라요!”
“네?”
“내 말대로 해요! 빨리!”
만약 유중혁의 선언을 철회하지 못한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선악의 저울을 완벽하게 평형으로 맞추는 것.
현재 차이는 14.2%.
나머지 네 사람의 지분을 합친다면······.
“한 사람씩 천천히 선택해! 유승이부터!”
“네!”
[화신 ‘신유승’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정희원’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6.7%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화신 ‘이현성’은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에 대해 7.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세 명의 담화자가 ‘선’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만!”
내 외침에 마지막으로 선택하려던 이지혜가 멈칫했다.
[저울대가 ‘선’으로 3.1%만큼 더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5분 안에 합의에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내 예상보다 일행들이 가지고 있는 설화의 지분이 컸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이지혜뿐이었다.
“아저씨! 나는 5.8%야!”
선과 악의 차이는 3.1%.
그리고 이지혜가 가진 지분은 5.8%.
이지혜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저울대의 평형을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만약 여기서 다른 일행들이 가진 ‘지분’을 일부만 내쪽으로 가져올 수 있다면?
[선악 판결에 참가 중인 담화자끼리는 ‘지분 증여’가 불가능합니다.]
젠장, 역시 이런 편리한 방법은 안 통하는 건가.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다시 내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멈추라니까!”
결투에 끼어들 수 있게 된 정희원이 나를 대신해 유중혁의 검을 막았다. 달려든 이현성이 유중혁의 몸을 뒤에서 껴안았고, 아이들이 나를 보호하듯 둘러섰다. 이지혜는 중간에 서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체 둘이 왜 싸우는 건데! 하필이면 지금······!”
유중혁의 두 눈이 나와 일행들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너희는 속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녀석의 동공이 나를 향해 분노를 토하고 있었다.
「저 녀석은, 우리 모두를 기만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곤 생각했다.
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했다.
“모두 꺼져라.”
자신의 격을 증폭시킨 유중혁은 이현성을 날려버리고, 이지혜를 쓰러트린 후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정희원과 유중혁이 검을 부딪쳤다.
하지만 [심판의 시간]을 발동할 수 없는 정희원이 유중혁을 상대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을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당신을 응원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당신의 승리를 원합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선의 승리를 원합니다.]
[다수의 성좌와 마왕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지켜봅니다.]
걸음을 내딛는 나를 관음하는 성좌들의 메시지.
이들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선’과 ‘악’에 집착하는 것일까.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설화, ‘권선징악의 실천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백악(百惡)의 수호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악보다 더 큰 악’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 ‘적당한 선’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
성좌들과 마왕들의 눈동자에 무수한 문자열들이 벌레처럼 들끓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설화들. 그들을 조종하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들은 더이상 ‘성좌’나 ‘마왕’이 아니었다.
오직 이 세계에 ‘선’과 ‘악’을 실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
그들 중 대부분은 오래된 ‘설화’들이 자신을 전파하기 위해 이용하는 번식 도구일 뿐이었다.
마침내 그 설화들은 우리 성운의 설화마저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2분 안에 합의에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다.
나는 재빨리 판단을 마친 뒤 외쳤다.
“지혜야! ‘선’을 선택해!”
“어? 하지만······.”
“빨리!”
이지혜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이미 ‘선’이 우세한 상황인데, 그쪽을 선택하라고 했으니 이상하기도 하겠지. 이지혜는 곧바로 선택했다.
[저울대가 ‘선’으로 8.9%만큼 더 기울었습니다!]
[앞으로 40초 안에 합의에 실패할 시 ‘신화를 삼킨 성화’는 ‘선’으로 확정됩니다.]
아까보다 더욱 벌어진 차이.
8.9%······ 그래, 역시 이게 최선이다.
나는 쓰읍 숨을 들이켠 후 온 힘을 다해 어떤 존재의 수식언을 불렀다.
[심연의 흑염룡!]
녀석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이곳의 풍경을 놈의 화신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 유일한 사람.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광기 어린 웃음을 짓습니다.]
초월좌의 격이 휘감긴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내 목덜미를 노리고 쏘아졌다.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일격.
홀의 천장에 쩌저적 금이 가더니 폭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흠칫 놀란 유중혁이 천장을 올려다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콰아아아아!
달려오던 유중혁은 통째로 쏟아진 천장 무더기에 깔렸다.
큼지막한 덩어리 몇 개는 피했지만, 쏟아지는 돌의 양이 너무 많았다. 뽀얗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모양인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 반쯤 풀린 왼손의 붕대가 바람에 흩날렸다.
흙먼지 속에서, 유중혁을 짓밟고 올라선 녀석이 인상을 찌푸린 채 웃고 있었다.
“하여간 너넨 나 없으면 안 된다니까.”
[화신 ‘한수영’이 ‘거대 설화’의 판결에 난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