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349화
‘선악의 이중주’는 ‘메인 시나리오’가 아니다.
분류는 히든 시나리오에 속하고, 엄밀히 따지면······ 시나리오라기보다 차라리 ‘이벤트’에 가깝다.
나는 아스모데우스를 잠시 제쳐두고 일단 일행들을 맞이했다.
무턱대고 시나리오부터 진행하기엔,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형! 이제 괜찮아요?”
일행들은 제각기 다른 얼굴들이었지만 표정에 묻은 염려는 모두 같았다.
아마 궁금한 것이 많겠지.
나는 기절하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일행들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어머니를 살리고, 유상아 씨까지 살려낸 대가로 개연성의 후폭풍을 맞은 일까지.
차분히 이야기를 다 들은 정희원이 물었다.
“······유상아 씨 영혼을 독자 씨 안에 가뒀다구요?”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왜 진작······.
“저도 성공을 확신하진 못했거든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정희원이 허리를 숙인 채 무릎을 짚었다.
“나, 진짜 상아 씨가 죽은 줄로만······.”
“그럼 상아 언니 살아 있는 거야?”
이지혜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되물으며. 그렁그렁 눈물이 고인 신유승과 이길영. 그 옆에는 곰처럼 우뚝 선 이현성도 있었다.
“살아 있어. 그리고······.”
나는 이지혜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살려낼 거야.”
유상아는 분명 살았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살아도 살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정희원이 물었다.
“어떻게요? 혹시 비유처럼······.”
“환생시킬 생각은 맞지만, 도깨비로 만들진 않을 겁니다. 애초에 도깨비가 될 수 있는 존재는 정해져 있어요. ‘범람의 재앙’은 특별한 경우였습니다.”
41회차의 신유승에겐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스타 스트림>을 떠돌며 쌓은 격이 있었다. 하지만 유상아에겐 그런 격이 없다.
“유상아 씨를 살리려면 어떤 ‘별’에 가야 합니다. 초월좌들 사이에서는 ‘섬’이라 불리는 곳이죠.”
‘섬’이라는 말에 멀리서 키리오스가 이쪽을 향해 작은 귀를 여는 것이 보였다.
아마 키리오스는 그 섬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 그는 이미 그 섬에 다녀왔을 테니까.
“······문제는, 지금 당장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정희원이 뒤쪽에서 [공장]을 두리번거리는 아스모데우스를 일별하며 소곤거렸다.
“저 마왕이 가져온 초대장 때문이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유상아를 살리러 ‘섬’에도 가야 하고, ‘선악의 이중주’에도 참가해야 한다.
당장 더 급한 쪽은······.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도움을 청합니다.]
생각이 복잡해진다.
설마, 그 우리엘이 이렇게 말할 줄이야.
<에덴>의 상황이 그 정도로 안 좋은 건가?
하지만 ‘선악의 이중주’에 참석하면 유상아의 환생은······.
「(독자 씨, 말했잖아요. 퀘스트는 언제나 선행 퀘스트부터 해야 한다고.)」
······어?
‘유상아 씨?’
「(네.)」
‘혹시 아까 절 깨운 게 유상아 씨 였습니까?’
「(맞아요.)」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유상아가 [제4의 벽]을 넘어 나한테 말을 걸었지?
이건 니르바나 녀석도 함부로 못 하는 일인데······.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당면한 문제부터 집중해요. 본론부터 말할게요. 독자 씨는 ‘선악의 이중주’에 참석해야만 해요.)」
‘하지만······.’
유상아는 [제4의 벽] 안에서 ‘멸살법’을 읽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멸살법’을 통해 내 계획들을 미리 짐작했을지도 모른다.
「(제 환생은 늦어져도 상관없어요. 모르시겠지만 이 도서관도 꽤 편안한 곳이거든요.)」
‘하지만······.’
「(그리고 제 생각엔, 오히려 ‘선악의 이중주’에 참석해야 다음 메인 시나리오로 향하는 텀을 당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유상아의 말은 맞았다.
‘조금만 견뎌주세요, 유상아 씨. 금방 다시 살려 드리겠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유상아의 미소가 아른거렸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현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아직 지난 시나리오의 여파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새로운 일을 벌여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꼭 참가해야 합니다.”
내 말을 들은 이현성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독자 씨,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미 쉴 만큼 쉬어서, 빨리 몸을 움직이고 싶습니다.”
“그건 현성 아저씨나 그렇겠죠. 난 모처럼 쉬나 싶었는데······.”
“우리 전부 가는 건가요?”
“설화 씨와 공필두는 두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공단]을 관리할 최소한의 인원은 필요해서요.”
그리고 다음 순간, 허공에서 빛살이 번뜩였다.
[‘선악의 이중주’가 당신을 부릅니다.]
“······아무래도, 시작된 것 같군요.”
메시지와 함께, 나와 일행들의 몸이 빛살에 휩싸였다.
시나리오로의 강제 전송이 시작된 것이다.
*
‘선악의 이중주’는 말 그대로 선과 악의 연회다.
하나의 긴 시나리오 시즌이 끝나고, 그간 있었던 시나리오들의 ‘선악’을 판별하는 연회.
대체 그런 행위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지만, 어떤 성좌들에게 그 ‘판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선악의 총체적인 판별 결과에 따라, 다음 분기에 이어질 절대 선과 절대 악의 위상이 달라지는 까닭이다.
[이만한 규모의 연회는 오랜만이군요.]
“그쪽은 자주 와 봤을 텐데?”
[나도 늘 참석했던 것은 아닌지라. 이번에는 좀 이례적일 정도로 규모가 크군요.]
성대한 연회장의 외경을 바라보며, 아스모데우스가 떨떠름한 웃음을 흘렸다.
실제로 연회는 규모뿐만 아니라 입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우리가 소환됨과 동시에, 성채의 도개교가 내려오며 무수한 인파가 내비쳤던 것이다.
도개교를 지나는 성좌와 화신들을 성류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대기 중인 도깨비들.
거기다 <스타 스트림>의 독립 언론사에 소속된 성좌들까지.
아스모데우스가 말했다.
[그럼, 나 먼저 입장하죠. 너무 불편하게만 생각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그대는 이번 시즌의 ‘유력한 수상 후보’니까.]
······수상 후보?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손가락을 튕긴 아스모데우스의 의상이 화려한 검정색 프릴 드레스로 바뀌었다.
녀석은 우아한 걸음걸이로 도개교를 넘어 연회장으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정욕과 격노의 마신!]
[마왕 아스모데우스가 왔다!]
쏟아지는 셔터 소리와 함께 도개교가 환한 빛으로 물들었다.
도깨비들을 향해 눈웃음을 흘린 아스모데우스가 매혹적인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새삼, 아스모데우스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실감이 났다.
아스모데우스의 걸음마다, 녀석이 싸운 전장의 영상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녀석의 승격전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 현재 마왕 서열 13위>
얼마 전까지만 해도 32위였던 녀석은, 어느새 순위권 피라미드의 최상위권에 올라가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승격인 셈이었다.
“우리도 입장하죠.”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런데 일행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저씨. 우리도 들어가도 괜찮은 거야······?”
“도, 독자 씨. 저, 이런 곳인 줄은 모르고 아까 그런 호언을······.”
그나마 <에덴>을 방문한 적이 있는 정희원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찾고 있었지만, 다른 일행들의 상태가 자못 심각했다.
이지혜는 불안한지 손톱을 뜯고 있었고, 이현성은 소변이 급한 큰 곰처럼 어깨를 떨고 있었다. 내 양손을 꼭 쥔 신유승과 이길영의 기척도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우리도 초대를 받았으니까요.”
나도 긴장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일행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웃으며 말했다.
“주눅 들지 마세요. 우리 그동안 열심히 싸워왔잖아요. 저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쌓았는가가 더 중요하죠.”
“독자 씨 말이 맞아요. 까짓거, 저게 뭐라고. 우리도 빨리 입장해요.”
정희원의 박력에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볼이 발갛게 물든 이지혜가 손으로 자신의 뺨을 탁탁 쳤다.
대강의 준비가 끝나자, 나는 일행들과 함께 도개교를 향해 곧장 걸어갔다.
흑요석과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휘황한 광물들로 뒤덮인 보석의 길. 그리고 그 도개교의 아래를 흐르는 설화의 강.
아스모데우스를 비롯한 유명 성좌들이 막 지나간 후였기 때문에, 우리가 나타났음에도 인파들은 우리에게 별다른 주목을 쏟지 않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그랬으면 싶었다.
[앗, 저 자는······!]
[‘구원의 마왕’이다!]
이제 내 수식언이 제법 알려진 까닭인지, 몇몇 성좌들이 나를 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방송을 진행하던 도깨비들이 동시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탄성은 작은 박수처럼 시작해서, 이내 도개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올림포스>의 대적자!]
[<김독자 컴퍼니>가 왔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마어마한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간신히 걸음을 이어가던 일행들도 무척 당황한 눈치였다. 심지어 몇몇 성좌들은 도개교 사이로 끼어들어 손을 내밀기도 했다.
곳곳에서 쏟아지는 메시지와 함께, 플래카드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잘 생겼다 김독자!]
[9158 FOREVER]
가능하면 일행들이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으면 했지만, 기어코 정희원이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독자 씨, 완전 아이돌인데요?”
“그러는 희원 씨도 저 못지않으십니다만.”
―멸악의 심판자! 네 시나리오 잘 보고 있어!
―희원 언니 너무 멋져요!
―강철검제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깜짝 놀란 이현성이 질겁하며 말했다.
“도, 독자 씨! 제 얘기도 있습니다.”
―‘한국 역사 보존 전우회’는 충무공의 후예 이지혜를 응원한다.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렸다.
“저 아저씨들은 뭐야······.”
―신유승 ☆ 이길영 ‘베스트 케미상’ 기원!
내 손을 잡은 신유승의 손바닥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저거 엄청 기분 나빠요.”
“왜 내가 신유승이랑······.”
지난번 <기간토마키아>로 인해 우리 성운의 인지도가 올라간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양산형 제작자’도 그렇게 말했었고.
그런데 이렇게 엄청난 반응을 불러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구원의 마왕’, 한 말씀 해주시죠!]
[이번 시즌의 유력한 수상 후보로 지목되셨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여기저기서 들이대는 마이크 때문에 나는 공황장애가 올 지경이었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이만한 주목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 도깨비들로 난처해진 나를 구해준 이가 있었다.
[■■, 다들 안 꺼져?]
특유의 화려한 백금발이 허공에 퍼져 나가며,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슬 퍼런 격을 발했다.
[도, 도망가!]
[미친 천사다!]
갈라지는 도깨비들 사이로, 검은 실크 드레스의 대천사가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김독자! 어서 와!]
우리엘이 와락 안겨들며 품에 볼을 부볐다.
나는 반가움과 민망함을 동시에 느끼며 우리엘을 떼어냈다.
“우리엘, 오랜만입니다.”
[응응!]
반짝이는 우리엘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려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반가워 해주다니······ 고맙긴 한데.
······<에덴>이 위험에 처했다고 날 부른 거 아니었나?
“······저기요? 여기, 자기 화신은 안 보이시나요?”
[희, 희원아! 하하핫! 물론 희원이도 반갑지이! 자아, 입장하자고!]
어설프게 말을 돌린 우리엘이 가로막는 인파들을 치워버리고 우리를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홀 내부로 들어서며 펼쳐진 정경에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쿠구구구.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히 격을 헤아릴 수 없는 마왕과 성좌들이, 두 개의 롱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
왼쪽에는 72좌의 마왕들─이젠 73좌겠지만─을 비롯한 절대 악의 성좌들이, 오른쪽에는 <에덴>의 대천사들을 비롯한 절대 선 계통의 성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입장과 함께, 그곳의 모든 존재가 나에게 집중했다.
마치, 내게 두 테이블 중 어느 쪽에 앉을 것이냐고 묻는 듯한 시선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의 선택을 궁금해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성좌, ‘새벽별의 여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안타깝게도,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지가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