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347화
위풍당당한 보무로 다가온 사내는, 이번 회차에 나와 부딪친 적이 있는 녀석이었다. 지난번 ‘감금 사건’ 때 내게 혼쭐이 나서 달아난 적이 있는 녀석.
‘경기 연합’의 수장, 십악 조진철.
이번 회차에서는 우리 일행들이 너무 강해져서 나부랭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용케도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정희원이 피식 웃으며 검을 빼 들었다.
“당신이?”
하지만 그 말을 하면서도, 정희원은 전혀 방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조진철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도를 그녀도 읽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기(魔氣)였다.
굳어진 정희원의 표정에 살기가 머물렀다.
[암흑성]을 클리어했고, 이름 뿐이지만 그래도 ‘마왕’을 죽이며 열 번째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던 그녀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너······ ‘마왕’에게 먹혔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마왕’의 기운을.
짧게 헛웃음을 흘린 조진철은, 이미 조진철 본인이 아니었다.
새카만 마기에 집어 삼켜진 권속.
[마왕, ‘뱀지옥의 군주’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뱀지옥의 군주.
지고한 마계의 72마왕 중 하나.
녀석은 ‘72번째 마계’의 주인인 ‘안드로말리우스’였다.
게다가 다른 두 명의 화신체도 비슷한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왕, ‘거짓과 비밀의 사색가’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마왕, ‘연주하는 일각공’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무려 세 명의 마왕이, 자신의 권속을 통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마왕이라는 것을 안 후에도 정희원은 태연했다.
“일대일로 붙는 거겠지?”
[물론 일대일로 붙을 것이다. 겁 없는 화신이여.]
격이 담긴 진언에 솜털이 바짝 서는 상황에서도, 정희원은 웃었다.
“그래, 언젠가 꼭 한번 상대해보고 싶었어. 그 잘난 ‘마왕’이라는 거 말이야.”
말투에 깊은 분노가 담겨 있었다.
우리엘의 영향일 수도 있고, 아니면······ 평소 나한테 분노가 쌓여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간 정희원은 오히려 잘 됐다는 표정이었다.
[대전이 시작됩니다!]
사실 이해 못 할 자신감도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마왕이라도, 정희원이 물러설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저쪽은 대리 권속을 통해 빙의한 상태. 여기서 물러선다면 대천사의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쿠구구구구!
정희원의 눈동자에서 붉은 귀화가 터져 나옴과 동시에, [심판자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물처럼 허공을 수놓는 검의 궤적.
스가가각!
피할 틈도 없이 조진철의 왼팔이 허공을 날았다.
[감히······!]
놀란 안드로말리우스가 노호성을 터트렸으나, 정희원은 검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두려움도 보이지 않았다. 그 무지막지한 패기에 안드로말리우스가 당황하고 있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오직 살해를 목적으로 닦인 검도(劍道). 그녀의 검은 평범한 시나리오를 겪어온 화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거걱!
다시 한 번 핏줄기가 쏟아지며 조진철의 오른쪽 허벅지가 깊은 검상을 입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 명백해진 승세에 군중들이 입을 벌렸고, 일행들은 감탄했다.
저것이 ‘멸악의 심판자’ 정희원의 진짜 힘이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합니다!]
마무리를 위해, 정희원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이 연이은 [지옥염화]의 콤보.
정희원은 이 ‘대표전’을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눌러버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동조율을 높인 ‘안드로말리우스’의 격이 본격적으로 조진철에게 강림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잘려 나간 조진철의 팔에 새카만 마기로 빚어진 팔이 솟았고, 난자 당한 상처가 흘러 넘치는 마력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72번째 마왕의 권능.
[장난은 여기까지다.]
번개처럼 튀어 나간 주먹이 정희원의 칼날을 때렸다. [심판자의 검]이 휘청이며 정희원이 순식간에 열발자국을 물러났다. 조진철은 멀어지는 정희원을 곧바로 쫓아가 계속해서 연격을 퍼부었다.
퍼버버벅!
화신체와 개연성의 손상을 각오하고, 강림 상태에 가깝게 동조율을 높인 안드로말리우스. 조진철의 전신에서 위협적인 격을 뿜어져 나왔다. 아무리 정희원이 강하다고 해도, 우리엘 없이 마왕 본인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결국 힘싸움에서 밀린 정희원이 허공에서 튕겨져나갔다.
“큿, 빌어먹을······!”
나는 그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안드로말리우스가 저런 선택을 했다는 것부터 이상했다.
마왕이라고 해서 모두 동급은 아니다.
저런 짓을 하면 개연성의 저울이 움직이고, 대천사 우리엘이 개입할 개연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녀가 강림하면, 겨우 저 정도 순위권의 마왕들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이 정희원을 본격적으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었다.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강제로 취소되었습니다.]
믿는 구석이 무엇이었는지는, 금방 밝혀졌다.
“······우리엘?”
우리엘이 응답하지 않고 있었다. [심판의 시간]도, [지옥염화]도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 [지옥염화]야 그렇다 쳐도, [심판의 시간]까지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우리엘 뿐만 아니라 다른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에게도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다.
······설마?
순간, 나는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갑자기 왜 이 ‘마왕’들이 이런 난장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놈들이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내 ‘마계’에 방문한 것인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멀리서 허공에 둥둥 뜬 키리오스가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마주보았다.
내가 언제든 끼어들 수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리오스는 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나서야 할 일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가능하면 힘을 일찍 드러내고 싶지 않다.
기와 승을 얻었다고 해서 그 힘을 만천하에 함부로 공개했다간, 도로 역풍을 맞는 수가 있으니까.
키리오스가 말을 이었다.
―힘을 보여줘야 할 때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날 것이다.
······어쩌면, 그 말도 맞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는 한창 상승세에 있고, 지금 저 마왕들은 그런 우리 성운의 기세를 꺾기 위해 손수 찾아온 녀석들이었다.
지금 제대로 힘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 성운은 더 별 볼 일 없는 녀석들에게까지 얕잡히겠지.
한숨을 쉬며 허공을 올려다보자, 비형이 웃고 있었다.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
아마 비형 녀석도 여러 가지를 계산하고 있었겠지.
굳이 내가 깨어난 후에야 이 ‘시나리오’를 연 것부터가 그렇다.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영악한 도깨비놈이다.
―어서 가보라고. 마왕에도 격이 있다는 걸 보여줘라.
나는 가볍게 [공장]에서 뛰어내려 대전장에 난입했다.
놀란 일행들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와 함께, 나는 뒤에서 정희원의 어깨를 붙잡았다.
“희원 씨.”
“······독자 씨?”
“여기서 싸울 필요 없습니다. 당신이 약해서 말리는 게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희원을 뒤로 한 채 앞으로 나섰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격’을 방출합니다!]
세 명의 마왕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진언을 사용했다.
[마왕 여러분. 놀이터를 잘못 정하신 것 아닙니까? 아마 제게 전할 말이 있을 텐데, 그것만 전하고 꺼지시죠.]
내가 뿜어낸 진언에, 안드로말리우스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소문대로 건방진 놈이군.]
[우리가 온 이유를 알고 있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마왕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명백했다.
지구의 화신들이 60번대 시나리오를 돌파했으니, 시기상으로도 슬슬 ‘그 이벤트’가 열릴 때가 됐지.
아마 녀석들은 나를 그곳에 초대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 터다.
정희원이 우리엘의 힘을 쓸 수 없는 것도 그 일과 관계되어 있을 것이고.
마치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유희였다는 듯, 마왕들이 낄낄거렸다.
[너 같은 말단을 위해 선배님들이 친히 방문한 것을 영광으로 알도록 하라.]
[너는 우리와 함께 간다. 지금 바로 채비하도록. 곧장 떠날 터이니.]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시러 오셨다는데, 가긴 가야지. 그런데 말이야.]
나는 뒤쪽에서 쓱 코피를 닦는 정희원과, 아픈 몸을 이끌고 나온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아직 <기간토마키아>의 여파가 남아 충분히 쉬지도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냥 보내주긴 힘들 것 같아.]
[무슨 헛소리지?]
[마왕쯤 됐으면 그에 걸맞은 격을 갖춰야지. 안 그래?]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대표전’의 대표 변경을 요구합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새로운 ‘대표’가 되었습니다.]
내 의도를 깨달은 마왕들이 경악했다.
[지금 우리와 싸우겠다고? 네놈······ 마왕과 마왕이 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알지. 아주 잘.]
나는 마왕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마왕 승격전’을 신청하였습니다.]
마왕 승격전.
그것은 순위가 매겨진 ‘마왕’들이, 자신의 순위와 명예를 걸고 겨루는 지고한 결투였다.
[승격전이라니! 네놈, 미친 것이냐?]
이 정도면 많이 참았다.
마왕이든 성좌든, 저런 놈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도 이제 지친다.
[받아들일 거야 말 거야? 다들 보고 있다고.]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아랫것들의 전투에 흥미를 품습니다.]
[마왕, ‘예제공’이 역시 싸움은 조빱 싸움이라고 말합니다.]
[마왕, ‘별과 논리학의 군주’가 ‘예제공’의 맞춤법을 지적합니다.]
[마왕, ‘정욕과 격노의 마신’이 흥미로운 표정을 짓습니다.]
대체 언제들 몰려온 것인지 무수한 마왕들이 이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73좌의 마왕들 중 최하위인 ‘73번째 마왕’.
그런 내 도전을 거부한다면, 대대로 놀림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쿠구구구구!
세 마왕이 가공할 격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보며 한없이 침착한 마음이 될 뿐이었다.
「언젠가의 유중혁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치욕스런 표정의 안드로말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도전을 받아들이지.]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넌 빠져. 너한테 신청한 거 아니니까.]
[뭐라?]
[안드로말리우스 넌 72위잖아.]
나는 손가락으로 녀석의 뒤에 있는 또 다른 마왕을 가리켰다.
[난 저기 있는 67위, ‘연주하는 일각공’ 암두시아스한테 신청한 거야.]
어차피 싸울 거면, 조금이라도 랭킹이 높은 녀석을 죽이는 편이 낫지.
내 말에 얼굴이 붉게 변한 안드로말리우스의 화신체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72번째 마계의 가공할 설화가 집약된 주먹이, 나를 향해 격을 내뿜었다.
[설화, ‘천년을 웅크린 뱀’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확실히, 순위는 낮아도 오래 살아온 만큼 나쁘지 않은 설화다.
하지만 녀석들은 모른다.
나는 너희보다 훨씬 짧은 역사를 살았지만.
훨씬 치열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웅크린 이빨을 드러냅니다.]
다음 순간, 백청의 전격이 주변을 까마득하게 물들였다.
[책갈피]를 통한 [전인화].
간만에 방출하는 백청의 마력이 아주 찌릿찌릿했다.
멀리서 희미한 미소를 짓는 키리오스의 모습이 보였다.
[해당 등장인물과 당신의 수준 격차가 크지 않습니다.]
[등장인물에 대한 당신의 이해도가 스킬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電人化) Lv.23(+13)’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소형화] 없이 [전인화]를 사용하는 것은 정말 간만의 일이었다.
[현재 당신의 육체 구성이 해당 등장인물의 육체 구성과 상이합니다.]
[당신의 ‘격’이 육체 조건의 패널티를 극복합니다.]
안드로말리우스의 주먹은 내 코앞에서 멈춰있었다.
경악한 눈으로 나를 보던 녀석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뱃가죽을 향했다.
처참하게 찢겨나간 녀석의 몸통은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녀석의 몸에 박힌 검을 뽑으며 말했다.
[일단 7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