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346화 아스모데우스는 계속해서 물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화신들 사이에서는 아마 ‘계시록’이라 알려졌던 이야기일 텐데······ 들어본 적 없습니까?] 아스모데우스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진 한수영이 앞으로 나섰다. “너! 뭔 헛소릴 하러 온 거야?” 그러나 아스모데우스는 한수영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중혁의 표정을 살폈다. 츠츠츠츠츳! [알 수 없는 힘이 화신 ‘유중혁’의 상상력에 제동을 가합니다.] 유중혁의 주변에 다시 한번 스파크가 쳤다. 실제로 아스모데우스의 말은, 유중혁에게는 이런 느낌으로 들렸다. [멸■■ ■■■■ 살■■■ 세■■ ■법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 유중혁이 물었다. “······뭘 들어봤냐고?” 아스모데우스가 탄식했다. [흐음, 아직 그대에겐 허락되지 않는 것인가······.] “······대체 무슨 소리냐?” [뭐, 별 얘긴 아닙니다. 그보다······ 상황을 보니 우리 ‘구원의 마왕’께서는 아직 잠들어 계신 모양이군요.] 싱긋 웃어 보인 아스모데우스는 [공장] 쪽을 일별하며 말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돌아가겠어요. ‘구원의 마왕’께 전해주십시오. 당신이 벌이는 일들로 인하여, 선과 악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고. 그리고 그 불균형을 틈탄 승냥이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잠깐, 기다려라!” 관자놀이를 짚은 유중혁이 돌아서는 아스모데우스를 불렀다. 아스모데우스는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회귀자 유중혁. 세계의 진실을 알고 싶습니까?] “······진실?” [알고 싶다면, 언제든 ‘종말의 구도자’를 찾아오십시오.] 그 말만을 남기고,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비틀거리는 유중혁을 향해 한수영이 재빨리 다가갔다. “유중혁. 괜찮냐?” “······.” “유중혁?”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큰 고뇌에 빠져 멍해져 버린 것 같기도 했다. 잠시 허공을 노려보던 유중혁은 이내 한수영을 뿌리치고 어딘가로 비척비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는 거야!” 한수영의 고함에도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한수영이 다시 한 번 외쳤다. “김독자 아직 안 깨어났어!” “······그놈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유중혁은 그 말만을 남기고 [주작신보]를 발동해 사라졌다. 졸지에 [공장]의 입구에 남은 것은 한수영 하나뿐. 휑해진 주변을 멀거니 바라보던 한수영은 사탕 막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슬슬 필터링들이 해금될 시기이긴 하지만, ‘멸살법’에 관한 정보마저 필터링이 풀리기 시작했다고?’ 하필 김독자도 없는 시점에 이런 일이 벌어졌기에, 한수영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만약 유중혁이 ‘멸살법’에 관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어떤 참사가 벌어질지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걸리는 점은 과연 ‘마왕들이 어떤 경로로 멸살법의 존재를 알았는가’하는 것이었다. 가만히 남쪽 하늘을 바라보던 한수영이 사탕 막대를 바닥에 뱉었다. 김독자가 깨어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생겼다. * 유상아는 모처럼 ‘신입’이 된 기분을 한껏 만끽하며 도서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난 이틀간, 유상아는 세 명의 선임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이 ‘도서관’이 어떤 곳인지부터, 그녀의 선임이 어떤 존재인지에 이르기까지. 「(천천히 정리 하시오. 어차피 김독자가 쓸데없는 생각하기 시작하면 잔뜩 어지럽혀지니까.)」 극장 던전의 주인 ‘시뮬라시옹’. 「(손이 두 개라 정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겠군. 후임은 손이 많은 녀석이 왔으면 했는데.)」 이계의 신격 ‘꿈을 먹는 자’. 「(내가 [천수관음] 가르쳐 줄까?)」 환생자 ‘니르바나 뫼비우스’까지. 선임들은 모두 조금씩 이상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녀에게 친절했다. 미노 소프트의 인사팀이 이 정도만 되었어도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책으로 덮인 서가. 모두 김독자가 읽거나, 잊은 책들의 나열이었다. 그리고 그 책의 대부분은 어떤 ‘소설’이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책을 좋아했던 유상아답게,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새로 얻은 직장의 프로세스를 빠르게 파악했다. 이 장소가 김독자에게 어떤 장소고, 이 이야기가 김독자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유상아는 희미한 절망감과 동정심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유상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상처 받은 이를 돌보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일에 관해 생각했다. ‘만약 원작의 전개 대로 라면······.’ 다음에 벌어질 지구의 시나리오는 몇 가지로 함축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열심 히 하 네 유 상아」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상아가 고개를 들었다. 「(아무렴 열심히 해야죠.)」 셋방살이 신세가 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는 게 어디랴. 그나마도 저 귀여운 보스가 이곳의 총 책임자라는 것이, 유상아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취직시켜 주셔서 감사해요. 전 여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흥」 「(진심이에요.)」 「유상 아 책좋 아?」 「(굉장히 좋아해요.)」 「어 떤 책」 「(예를 들면······ ‘반지의 제왕’도 좋아하고······.)」 「호 오」 다행히, 귀여운 보스께서는 그녀에게 제법 흥미가 있는 듯했다. 유상아는 이 틈을 타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요?)」 「뭔 데」 「(‘제4의 벽’님은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는 건가요?)」 킥킥킥킥 거리는 웃음소리가 도서관 전체를 떠돌았다. 「나 는 김독 자를 지 켜」 「(지킨다고요?)」 「김 독자 나 없 으면 죽 어」 굳건한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 「그 런데 도 나 한테 함 부로 대 해 멍청 한 김독 자」 도서관 전체가 희미하게 떨렸다. 「최근 에는 많이 힘들 어 다 너때 문 이 야」 「(······저 때문이요?)」 「내 일 부가 새어 나갔 어」 츠츠츳,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도서관의 일정한 방향을 가리켰다. [제4의 벽]이 가리킨 곳에는, 유상아의 주먹보다 조금 더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다. 「막 아도 제대 로안막 혀 김독 자가 부 숴놔 서」 구멍을 막고 있는 것은 낡은 책의 표지였다. 급한 대로 임시로 취한 조치인 듯했다. 유상아는 책의 표지를 조심스레 들춰 보며 물었다. 「(이 구멍, 혹시 밖으로 통하는 건가요?)」 「응」 잠시 후, 구멍을 곰곰이 들여다보던 유상아가 장난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제4의 벽’님. 저한테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요.)」 * 나는 모처럼 푹 잠을 잤다. 언젠가 강제로 감금당했을 때만큼이나 깊은 잠이었다. 아주 푹신한 깃털 같은 것이 머리를 포근하게 감싸는 느낌이랄까. 아니면, 누군가가 내 머릿속에 들어와 불편한 걱정들을 깨끗하게 정돈해준 느낌이랄까. 「(독자 씨, 큰일 났어요. 독자 씨.)」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울려퍼졌을 때, 나는 깜짝 놀라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병실. 스파크로 인해 그을린 피부 곳곳이 쓰라렸다. “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침상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금이니 뭐니 들들 볶던 일행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날 깨운 건 누구지? 일단 상황을 살피기로 했다. 아직 미약한 개연성의 여파가 남아 있긴 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병동의 복도에 불온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어떤 일이 터지기 직전의 예감. [공장] 바깥이 소란스럽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후였다. 복도의 창문을 열자 사람들의 함성이 귀를 찔렀다. “서울을 해방해라!” ······뭐? “우리는 더이상 ‘마왕’ 따위의 지배를 받지 않겠다!” “[공장]의 독재자는 물러나라! 모든 성흔과 스킬을 대중에게 개방하라!” [공장]의 흉벽 너머로 까마득한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서울 및 인근 지역의 화신들이었다. 몰려온 세력의 구성을 보아하니, 어떤 종류의 사람들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은 시나리오에 실패한 사람들. 그리고 몇몇 핵심 인물들은 ‘연합’의 인간들이었다. “이것은 정당한 투쟁이다! 시나리오를 선점하고 자본을 독점하는 ‘구원의 마왕’과 악덕 기업 <김독자 컴퍼니>는 각성하라!” 자본 독점에 시나리오 선점이라······. 나와 일행들이 얼마나 힘들게 시나리오를 헤쳐왔는지 안다면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흉벽 안쪽에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의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스킬로 청각을 키우자, 제일 먼저 들려온 것은 공필두의 목소리였다. “그냥 포를 쏴버릴까?” “아저씨 미쳤어? 쟤들 대부분 초보 화신이야!” “여러분! 이러지 마십시오! 오해입니다!” 이지혜와 이현성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쳤지만, 애초에 그들의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닥쳐라! 성문을 개방해! 아이템을 나눠라!” “아이템 같은 거 없어요!” “코인을 나눠라!” “이 무슨 깡패들도 아니고······.” 이런 규모의 ‘선동’은 보통의 인간들이 모여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반도의 각 연합은 내 일행들이 떠맡고 있었고, 가장 걸림돌이 되던 경기 연합은 얼마 전 유중혁에 의해 박살이 났으니까. 그런데도 이만한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었다는 건······ 외부 존재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그나저나 유중혁이랑 한수영은 어디 있지? [공장]이 이 사단이 났는데, 대체······. 아무래도 이틀간 내가 모르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 것 같았다. [상당수의 성좌들이 ‘공단’에서 벌어지는 일에 흥미를 갖습니다.] 이거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막아야겠는데.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계산하던 내가 슬그머니 일행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혁명······! 민주주의를 제창하시는 여러분들답군요!] 불길한 서두였다. [이 정도 규모의 개연성이 모였다면, 시나리오를 열어드려야 인지상정이겠죠?] + <서브 시나리오 ― ‘서울 혁명’>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현재 서울은 <김독자 컴퍼니>의 슬하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운의 지배권에 반발하는 화신들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서울의 지배권을 놓고, 다수의 성좌들은 두 그룹이 한 판 붙기를 원합니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300,000코인 실패시 : ― +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불쾌한 예감이 더해졌다. 지난 격전으로 인해 두 개의 ‘거대 설화’을 쌓은 <김독자 컴퍼니>는 이제 제법 <스타 스트림>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런데 마침 성운의 대표인 나와 유중혁은 부재중인 상태. 누군가가, 다 된 밥을 노리고 의도적인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실패 조건이 없어! 해 볼만 하겠는데?” “30만 코인이다! 우리도 돈 좀 벌어보자!” 이지혜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바보 같은······ 모두 나누면 얼마 되지도 않을 금액 때문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순간, 앞으로 나선 이가 있었다. 정희원이었다. [확성] 스킬을 사용한 정희원이, 무지막지한 패기가 담긴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그쪽 대표는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정희원의 말에 성벽을 타고오르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떨어졌다. “여기서 전쟁을 벌여 봐야 무의미한 희생만 낳을 뿐이야. 그럴 바에는 수장끼리 대결을 펼쳐 승부를 가리는 편이 낫지 않겠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정희원은 계속해서 말했다. “만약 우리가 진다면, 그쪽 소원대로 [공장]을 넘겨 줄게!” “희원 씨! 왜 그런 약속을······!” 당황한 이현성을 보며, 정희원이 침착하게 말했다. “저 사람들, 대부분 아직 10번 시나리오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여기서 진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희원의 말에 이현성이 입을 다물었다. 일행들은 말을 거드는 대신 침묵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희원 씨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이현성도, 이지혜도, 신유승도, 이길영도. 공필두는 영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시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이라는 걸 모두가 은연중에 합의한 것이다. 허공에서 일의 진행을 보던 도깨비가 헛웃음을 흘렸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 이벤트는 ‘대표전’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서브 시나리오의 내용이 바뀌었다. [서브 시나리오 ― ‘서울 혁명’의 내용 일부가 갱신됩니다!] [양 세력의 대표전을 통해, ‘서울’의 주인이 결정됩니다!] 정희원이 흉벽 너머의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자, 그쪽 대표도 이제 올라와. 이쪽은 준비가 됐으니까.” 자신만만한 미소. 어쩌면 정희원의 저 결의는, 그동안 보냈던 충실한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방금전까지 혁명이니 서울의 봄이니 떠들던 사람들은, 정희원이 그렇게 당당하게 나오자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웅성거림만이 커져갔다. “대, 대표! 어디 있어! 빨리 나가!” “싸워서 이겨라! 우리의 권리를 찾아줘!” 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군중을 일으켰다는 건 비이성적인 선동 상황을 이용하고 싶었다는 것. 그런데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의미가 없어진다. 답답해진 화신들이 외쳤다. “누가 좀······!” 대열을 이탈한 군중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는 약간 감격했다. 내가 없던 3년 간 일행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마 정희원은,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정의를 지키면서도 실리를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쪽은 이미 ‘서울 최강’의 멤버들. 일대일의 화신전이라면, 절대로 질 턱이 없었다. 허공에서 턱을 쓰다듬던 도깨비가 물었다. [<김독자 컴퍼니> 측은 대표 두 분이 모두 부재중이신데, 누가 나서시렵니까?] 일행들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정희원이었다. “제가 할게요.” “희원 씨.” “걱정 마세요. 저 강한 거 알잖아요.” 확실히 정희원은 우리 성운에서 나와 유중혁을 제외하면 거의 최강의 전력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현성도, 이길영도, 신유승도, 공필두도······ 단일 전투력으로는 누구도 정희원을 능가할 수 없다. 게다가, 아무래도 정희원은 뭔가를 눈치챈 듯한 낌새였다. 일행들 중 정희원이 ‘대표’로 나서야만 하는 이유. 「······내가 가야 해.」 그 이유가, 지금 군중을 가르고 다가오는 세 명의 ‘화신’에게 있었다. 개중 한 녀석의 얼굴이 특히 익숙했다. ······저 녀석. 한달음에 흉벽을 넘어온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내가 대표로 상대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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