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340화
Episode 64. 길이 아닌 길
<올림포스>의 <기간토마키아>가 붕괴한 직후, 거신들에게 걸려 있던 제약은 사라졌다. 그들은 이제 오랜 설화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시나리오의 참가자로 거듭날 것이다.
[선대의 싸움을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동의하는가?]
[동의합니다.]
그렇게 거신들의 리더인 브리아레오스와, 12신좌들의 임시 대표인 디오니소스는 60번 시나리오의 종료를 코앞에 두고 극적인 타결에 성공했다.
[<스타 스트림>이 ‘신화 붕괴’를 인정합니다.]
[60번 시나리오에 새로운 설화가 피어납니다.]
사실 싸우려면 더 싸울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간토마키아>를 통해 <올림포스>의 전력은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많은 영웅들과 거신들이 죽었고, ‘포세이돈’의 행방이 불분명해졌으며, 침묵하던 ‘명왕’이 자신의 후계를 발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남은 12신좌들과 거신들이 대립해봐야, 성운의 존립만 위태로워질 뿐이었다.
거대 성운 <올림포스>의 몰락.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의 중심에, 한 작은 성운이 있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의 이름을 연호합니다!]
한 작은 성좌의 분투로 시작되었던 그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의 ‘거대 설화’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해당 성운의 구성원들은 ‘거대 설화’의 끝이 고하는 여운을 음미할 틈도 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독자 씨! 독자 씨!”
“형! 장난치지 마요! 어디 숨은 거죠!”
정희원, 이현성, 이지혜, 신유승, 이길영······.
그들은 거신들이 만든 작은 섬 위에서 김독자를 찾고 있었다.
누군가는 불안한 목소리로, 또 누군가는 불신 가득한 표정으로.
모두가 혼란한 와중에 유일하게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사내뿐이었다.
한수영은 그 사내를 유심히 노려보다가 물었다.
“유중혁, 넌 뭔가 알고 있지?”
“······.”
“대답해. 애들 걱정하잖아.”
유중혁의 고개가 천천히 한수영을 향했다.
뭔가를 눈치챈 일행들이 한수영의 뒤쪽으로 모여들었다.
“뭐예요, 사부! 뭔가 알아요?”
“독자 씨한테 또 무슨 일 생긴 건 아니죠?”
유중혁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김독자는 지구로 돌아갔을 거다.”
“뭐야, 우리만 빼 놓고?”
뒤늦게 뭔가를 눈치챈 이지혜가 작게 입을 벌렸다.
“아······ 설마?”
생각해 보면, <기간토마키아>는 그들의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
애초에 <기간토마키아>의 참여는 과정이었을 뿐. 모두가 승리의 기쁨에 취해 들떠 있을 때, 오직 김독자만이 이번 일의 진짜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풀어낸 정희원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혼자만 잽싸게 돌아간 건 좀 따져야겠는데요.”
“우리도 얼른 돌아가요!”
그때,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해당 시나리오의 안정화를 위해 1시간 동안 지역 이탈이 제한됩니다.]
놀란 이설화가 눈을 크게 뜬 채 물었다.
“······독자 씨는 대체 어떻게 나간 거죠?”
“아마 특수한 방법을 사용했겠지.”
“특수한 방법이요?”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유중혁은 그렇게 답하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허공에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쨍한 여름 날씨에 흩날리는 눈. 지구로 치자면 8월의 날씨에 눈이 오고 있는 셈이었다.
그 눈을 바라보던 한수영이, 유중혁에게 물었다.
“······김독자가 먼저 돌아간 거, 유상아 때문이지?”
당연한 것을 굳이 물을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유중혁의 대답이 돌아온 것은, 기적처럼 흩날리던 눈이 태양 볕에 모두 녹은 후였다.
“가 보면 알 수 있겠지.”
*
차원로(次元路)를 달리는 차량 속에서, 나는 짧은 생각에 잠겼다.
처음 <기간토마키아>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울 무렵, 나는 여러 성좌들에게 연락을 했다. 아마 나와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성좌들은 모두 내 연락을 한 번씩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올림포스>와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거나, 60번 시나리오로의 참가가 어려운 처지였다.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성좌라고, <올림포스> 같은 거대 성운과 적대 관계에 놓이고 싶겠는가.
그런데 개중에 한 명, 특이한 제안을 한 존재가 있었다.
―<기간토마키아>를 도와줄 수는 없네. 하지만 자네가 실패했을 때 도망갈 길을 열어줄 수는 있지. 단, 자네 혼자만 가능하네.
그리고 그 제안을 한 존재는, 지금 운전석에 앉아 느긋하게 핸들을 잡고 있었다.
[······설마 그 제안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줄은 몰랐구만.]
자력 개연성으로 ‘시나리오’의 포탈을 주파할 수 있는 존재이자, 차원로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스페셜 페라르기니]의 소유자.
‘양산형 제작자’가 웃으며 말했다.
[원래 자네는 다른 이에게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 타입이었는데.]
“다른 세계선에 다녀와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더군요.”
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거기다 실수로 [X급 페라르기니]를 두고 왔거든요. 아직 할부도 안 끝났는데, 요즘도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납니다.”
[하하, 나한테 샀던 그 차 말인가?]
“그래서 앞으로는 자차 몰지 않고 남의 차에 얻어 타기로 했습니다.”
[저런, 판매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결정이로군. 이번에 신형 모델이 나와서 자네에게 한 대 쯤 공짜로 주려고 했었는데.]
“······공짜로요?”
[거짓말일세.]
······그럴 줄 알았다. 저 능구렁이 같은 성좌가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을 자초할 리가 없지.
‘양산형 제작자’는 굵은 궐련을 입에 문 채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흩날린 연기는 조수석에 앉은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글로브 박스 앞쪽에 설치된 환풍구로 빨려 나갔다.
[자네 성운과 ‘계약’을 맺고 싶네.]
“계약이요?”
[자네들이, 이번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당신의 설맥(說脈)을 타고 흐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내가 저지른 일의 ‘결과’가 내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흐르고 있었으니까.
「신화를 삼킨 성화」.
이 설화는 내가 본래 얻고자 했던 「신의 지문을 지우는 자」나 「신화의 문을 닫는 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비슷했다. 거대 성운과 맞서 싸우고, 신화를 전복시키며 얻은 설화. 이 설화는 앞으로 내가 싸우게 될 무수한 성운들에 대한 카운터가 되어줄 것이다.
[이번 일로 많은 성좌들이 <김독자 컴퍼니>를 알게 되었네.]
“그렇겠죠.”
[심지어 그들 중 몇몇은, 자네의 성운을 <12대 성운>의 하나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12대 성운이라. 벌써 그 이야기를 들을 만한 위치에 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3강(强), 4중(中), 5약(弱)으로 이루어진, <스타 스트림>을 지배하는 열두 개의 성운들. 개중 3강과 4중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던 <올림포스>가 이번에 크게 화를 당했으니, 누군가는 그 빈칸을 채우려 들 법도 했다.
“성급한 별들이 많군요.”
[호사가들이야 늘 그렇지.]
“그리고 ‘양산형 제작자’께서는 그 호기를 틈타 저희 성운과 계약을 맺고 싶다는 말씀이시고요.”
[바로 그렇다네.]
양산형 제작자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번 신제품 광고를 자네 성운에게 맡길까 하는데, 어떤가?]
“저야 좋죠. 성운 사람들에게도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좋지. 개인적으로 출연해줬으면 하는 화신은······.]
나는 ‘양산형 제작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페라르기니]의 창밖으로 스쳐 가는 정경을 응시했다. 스쳐가는 풍광 속으로 무수한 이야기의 계절이 흐르고 있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로.
그렇다. 어느새······.
“······빠르군요.”
무심코 그 말을 하며, 나는 품속에 담긴 성유액 병을 움켜쥐었다.
지금껏 나는 원작의 그 어떤 회차보다도 빠르게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 빠름 또한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속도일 뿐. 이것이 ‘충분히’ 빠른 것인지 어떤지, 나는 알지 못했다.
‘양산형 제작자’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번 신제품이 좀 빠르긴 하지. 자네도 직접 운전해 보면 알게 되겠지만, 주행감이 아주······.]
“주행 속도에 비해 시간이 너무 지체되네요. 계약 얘기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고 계신 건 아니죠?”
[험, 무슨 소린가. 가장 빠른 길로 가고 있는 걸세. 보게, 벌써 마지막 교차로야.]
‘양산형 제작자’의 말대로, 새카만 차원로의 건너편으로 세 개의 포탈이 하얀빛을 뿜고 있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양산형 제작자’가 설명하듯 덧붙였다.
[하나는 지구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내 ‘별자리의 맥락’으로 통하는 길이네.]
“나머지 하나는 뭐죠?”
[‘길처럼 보이는 길’.]
양산형 제작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다른 포탈보다 훨씬 어둡고,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포탈.
[저 끝에 뭐가 있는지 아나?]
물론, 나는 알지 못했다.
아무리 ‘멸살법’이라고 해도 차원로의 모든 포탈에 대한 설명을 써놓은 것은 아니니까. 말하자면 저 ‘포탈’은, ‘멸살법’에는 존재하지 않는 어떤 길일 것이다.
“뭐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네. 그냥 막힌 길이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
내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양산형 제작자’가 말을 이었다.
[어떤 길들의 끝은 그래. 다른 길들과는 달라 보여서, 혹은 누구도 걷지 않은 길인 것 같아서 걸었던 그 길들은, 사실 그냥 길조차 아니었던 경우가 많아.]
[페라르기니]가 속도를 내며 음습한 포탈을 지나쳤다. 반짝이는 내비게이션에 지구로 가는 경로가 표시되고 있었다.
화면 속에, 방금 지나친 포탈은 ‘길 없음’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 길들은 대개 애매한 곳에서 끊어져 버리지. 그리고 그 길을 선택해 걸어간 사람들은, 그것이 끝이라 믿으며 살아가야 해.]
“······말씀의 저의가 뭡니까?”
[부디 길을 잘 선택하게.]
어느새 궐련의 불을 꺼뜨린 ‘양산형 제작자’가, 특유의 젠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때론 길처럼 보였던 것이, 길이 아니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차원의 정경이 바뀌었다. 푸른 행성의 외양이 언뜻 보인다 싶은 순간, 나는 어느새 지상에 착륙해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말했다.
[도착했네. 이번엔 다행히 잘 온 모양이구만.]
*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말할 필요도 없이 [공장]이었다. 그중에서도, 환자들이 입원한 병동.
내가 병동으로 발을 디디자마자, 어디선가 [진언]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느냐.]
그것은 [진언]처럼 들렸지만, [진언]이 아니었다. 초월좌의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
허공에서 푸르스름하게 튀는 백청의 마력.
······역시, 어떤 스승이든 제자 앞에서 보이고 싶은 모습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불초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시간이 없으니, 인사는 나중에 받겠다. 가거라.]
‘귀환 전쟁’의 여파인지, 키리오스는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혈마와 천마는······.”
[내가 죽였다. 잔말 말고 빨리 가거라.]
그 담담한 선언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전생의 파천검성조차 당해내지 못했던 혈마와 천마를 단신으로 상대하고서, 심지어 살아남았다니. 이번 회차의 내 스승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아일렌이 달려오고 있었다. [공장]을 지키는 유일한 설화 전문가.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미 일행들 중 두엇은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나는 품에서 꺼낸 성유액을 흔들며 외쳤다.
“성유액을 가져왔습니다!”
“그게,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멀리서, 붉은빛을 띤 두 개의 병실이 보였다.
하나는 유상아의 병실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는 좀 어떻습니까?”
“유상아 씨랑 증상이 거의 비슷해요.”
“증상의 정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한 수준은······.”
어머니가 평소 무리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본래 ‘거대 미래’를 예지하는 성흔들은 사용자에게 큰 부담을 준다. 더군다나 성운 자체와 애매한 형태로 계약을 맺은 유상아나, 배후성이 힘을 거의 잃어버린 어머니의 경우라면 그 부담은 훨씬 더했겠지.
내게서 성유액을 받아든 아일렌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론 부족할 것 같아요.”
“그래서 두 병을 구해왔습니다. 종류도 다릅니다.”
내가 가져온 성유액은 하나가 아니었다. 본래 받기로 되어있었던 수르야의 [소마]에 더불어, 디오니소스에게 빼앗은 [넥타르]까지.
두 병의 성유액을 받은 아일렌의 표정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의료진!”
그녀의 신호에 달려온 의원들이 두 개의 병실을 향해 일제히 이동했다. 누군가 내 곁을 툭 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포세이돈에게 맞은 옆구리가 몹시 욱신거렸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되돌아왔다.
······이거, 나도 치료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긴, 신화급 성좌의 공격을 맞았는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하지.
상처의 고통을 감추기 위해 애써 호흡을 골랐다. 의식이 불안정해서일까. 의원들이 들어가는 병실의 문이, 꼭 ‘양산형 제작자’가 내게 보여주었던 포탈의 입구처럼 보였다.
[괜찮으냐?]
허공을 날아온 키리오스가 내게 물었다. 나는 괜찮습니다, 라고 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답했던 것도 같고, 잠깐 의식을 잃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동의 의자에 누워 있었다.
내 눈앞에는 아일렌이 서 있었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는 흐려지는 의식을 바로잡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일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부족해요.”
“부족하다고요? 뭐가요?”
“두 분의 병세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악화되어서, 성유액 두 개를 다 써야 간신히 한 분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아일렌의 말은 머나먼 외계의 말처럼, 말하자면 이계의 신격의 헛소리처럼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구원의 마왕님.”
아일렌이 나를 수식언으로 부르는 것은 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그렇게 부를 때는, 오직 내 명령을 필요로 하는 순간뿐이었다.
두 개의 병실이, 나를 기다리는 포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