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34화 마침내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3호선 플랫폼에 모였다. 일행들은 제각기 자신의 병장기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현성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독자 씨께서 부탁하신 대로 모두 나눠 줬습니다.” 그동안 쓰던 무기가 많이 낡았기 때문에, 나는 이현성에게 부탁해 새로운 무기를 제작하도록 했다. 재료는 어젯밤 사투를 벌이던 중 잡았던 8급 지하종 [그롤]이었다. [그롤]의 뿔을 깎아 만든 칼과 창들. 이것도 오래 쓰기는 무리겠지만, 임시방편으로는 적당할 것이다. 정희원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훨씬 가볍고 튼튼한데요?” “아······ 독자 씨, 현성 씨. 고맙습니다 정말.” 유상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롤]의 뿔로는 둔기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이길영만이 여전히 땅강아쥐 무기를 들고 있었다. 이길영은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식이 시무룩해하기는······ 나는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만만치 않을 겁니다. 어제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요. 모두 준비는 되셨습니까?” 일행의 고개가 무겁게 움직였다. “그럼, 작전대로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건물주 연합’이 사태를 눈치채기 전에 말이다. 정희원과 유상아, 이길영이 각자 맡은 임무를 위해 해당 층으로 사라지자, 나는 이현성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현성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독자 씨,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가 이 작전의 핵심인데, 그딴 소릴 하면 안 되지. 나는 일부러 더 강고한 목소리로 답해주었다. “잘 돼야 합니다.” 그러나 이현성은 여전히 주눅 든 얼굴이었다. “일행들이 생각보다 저를 의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부담이 됩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현성 씨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군대에 있을 때도 이렇게 누군가의 신뢰를 받아본 적은 없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이현성의 군생활에 대해 나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멸살법에서도 간단히 언급되고 지나갈 뿐이고. “이번 일이 끝나면, 현성 씨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무심코 지나가며 한 말이었는데, 이현성은 생각보다 더 동요하는 듯 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당신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독자 씨랑 이야기하고 있다 보면, 가끔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네? 어떤···?” “마치 오래 전부터 저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달지······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현성이 볼을 벅벅 긁으며 말을 흐렸다. “아, 이상한 뜻으로 한 말은 아닙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네, 무슨 뜻인지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얘기하다 보니 독자 씨 이야기도 궁금해지는군요.” “제 이야기요?” “예. 독자 씨처럼 신기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이 사태가 터지기 전엔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여러 가지가 궁금합니다.” 어쩐지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내가 읽던 소설의 ‘조연’이 나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하다니. 조금 꺼림칙하면서도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래도 듣고 싶습니다.” 문득 머릿속에 어떤 의문이 스쳤다. ‘멸살법’이 현실이 되지 않았을 때에도, ‘이현성’은 나와 같은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아니면, 소설이 현실이 되면서 갑자기 ‘생겨난’ 인물인 걸까. 답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든 이현성은 이제 ‘살아있는 인물’이 되었고, 내 눈앞에 있다는 것······ 그 뿐이다. “오, 유중혁이 친구. 협상하러 오셨나?” 전방에서 다수의 중년인들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왔군, 건물주 연합. “흠······ 근데, 여자 분들은?” 그 말을 하는 중년인의 손아귀에는, 한 여자의 머리채가 붙들려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5칸짜리 ‘그린 존’을 가지고 있던 일행 중 하나였다.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피식 웃었다. “아아, 이 친구가 땅을 안 팔아서······. 그쪽은 신경 쓸 것 없어.”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여자의 눈이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으로 ‘절대선’ 계열의 성좌들이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기다렸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나 대신 앞으로 나서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그 분을 놔 주시죠.” 이현성이었다. “뭐야 넌?” 중년인의 아니꼬운 물음에, 이현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스스로의 의지로 정의를 실천하길 원합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의 특성 진화가 임박하였습니다.] 연합원들이 병장기를 빼들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여분의 코인으로 능력치를 올렸다. [1200코인을 ‘체력’에 투자합니다.] [체력 Lv.15 -> 체력 Lv.18] [체력 레벨이 증가합니다!] [1200코인을 ‘근력’에 투자합니다.] [근력 Lv.15 -> 근력 Lv.18] [근력 레벨이 증가합니다!] 여기서는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치의 효율을 봐야 한다. [보유 코인 : 20,450 C] 남은 코인은, 꼭 써야 할 곳이 있으니까. 콰아아앙! 지하철의 곳곳에서 작은 폭파음이 들려왔다. 이어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란들. 일행들의 신호였다. “현성 씨!”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대로 앞 열의 사내들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당황한 연합원들이 외쳤다. “뭐야, 이 새끼들!” [전용 스킬, ‘백청강기’가 발동합니다!] 스가각! “끄아아악!” 여자의 머리채를 잡았던 중년인의 팔이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에 순간 중년인들이 얼어붙었다. 이현성과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중년인들이 우리를 쫓아 왔다. “저 미친놈들이! 막아!” 지하 2층의 복도. 이제 곧 공필두의 ‘사유지’였다. [당신은 사유지를 침범하였습니다!] “포위해!” 앞쪽에 대기하고 있던 건물주 연합원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연합원들 중 일부가 빠졌는지, 예상보다 인원이 적었다. 뒤쪽에 스물, 앞쪽에 열둘. 그래도 둘이서 감당하기엔 많은 숫자다. 뭐, 감당하려는 생각도 없지만. 선두의 연합원들과 충돌하려는 순간, 이현성이 철제 방패를 앞세우며 내 앞으로 나섰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밀기 Lv.1’를 사용합니다!] 콰가가가각! 엄청난 근력을 바탕으로 달려간 이현성이 사내들을 도미노처럼 넘어뜨리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성흔 「무장지대 Lv.4」가 발동합니다!] 곧이어 사유지 곳곳에서 포탑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새빨간 마력탄을 충전한 포탑이 발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니 포탑의 숫자는 총 다섯. 그새 또 무장지대의 레벨이 올라간 모양이었다. “독자 씨!” 나는 이현성을 제치며, 동시에 이현성의 철제 방패를 넘겨받았다. 단단한 방패의 감촉이 손아귀에 감기자마자, 둔중한 충격이 나를 밀어냈다. 쾅! 콰앙! 콰아앙! 마치 대포라도 맞은 듯한 묵직함. 방패를 쥔 팔에 통증이 일었다. 역시 마력 레벨 19의 무장지대는 강력하다. 하지만, 이제는 버틸 만했다. [아이템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보정 효과로 체력 레벨이 20을 돌파하였습니다.] [한 단계 높은 강인함이 당신의 육체를 보호합니다.] “건방진 세입자가 오셨군.” 방패 너머로 공필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력한 마력탄의 견제 때문에 우리의 발이 묶이자, 연합원들의 표정에도 여유가 돌아오고 있었다. 철제 방패의 내구는 움푹움푹 깎여 나가고 있었다. 앞으로 막을 수 있는 탄환은 이제 열댓 발정도일 것이다. 공필두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무장을 하고 온 걸 보면 벌금을 내러 온 것 같진 않은데. 무슨 일이지?” “이제 세입자는 그만두려고.” “재미있군. 내 땅을 탐내는 거냐?” “글쎄. 그렇다기보다는.” [등장인물 ‘공필두’의 ‘사유지’ 효과로 불법 침입자들의 능력치가 일부 감소합니다.] ······시작됐군. 공필두의 능력이 무서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사유지’ 디버프에 이은 ‘무장지대’의 특수 수성(守城) 효과. 발갛게 익은 포탑의 포신에서 붉은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미니 포탑’이 ‘강화 마력탄’을 준비합니다.] 적어도 ‘사유지’와 ‘무장지대’의 콤보가 깨지지 않는 한, 초반에 한해서 공필두를 상대할 수 있는 화신은 거의 없다. “죽어라.” 강화 마력탄이 발사되려는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건물주 연합원들이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피, 필두 씨! 땅이······!” 날카로운 장도에 다친 흔적들. 이지혜가 움직인 것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나는 이현성을 보았다. “현성 씨, 지금입니다.” 이현성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다 부숴 버리세요.” 기다렸다는 듯, 이현성이 주먹을 높게 치켜들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깃든 눈빛이었지만, 동시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로 확고한 표정. [등장인물, ‘이현성’의 특성이 진화합니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이현성의 몸에 은빛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감동적인 심경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현성의 ‘특성 진화’는 ‘멸살법’ 안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강철검제 ‘이현성’이 최강의 조연 중 하나일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특성 진화로 인해, 새로운 성흔이 개방됩니다.] 적어도 이 ‘한 방’에 관한한, 이현성은 ‘멸살법’ 최강에 손꼽히는 까닭이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태산 부수기 Lv.1’를 사용합니다!] 이현성의 주먹에 모여든 마력이 새하얗게 응집되더니, 이내 이현성의 팔이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앗!” 이현성의 주먹이 그대로 바닥을 내리 찍었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이 주변을 휩쓸며, 부서진 바닥이 허공으로 비산했다. 대경한 연합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뭐, 뭐야!” 쩌저저저적! 위태로운 균열이 순식간에 바닥을 점령해 나가며, 포탑의 위치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잘못 발사된 마력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폭발이 확산되며, 자욱한 먼지 구름이 사위를 장악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구구구구! 거대한 진동과 함께 지하 2층의 지반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린 존’이 파괴되었습니다.] [등장인물 ‘공필두’의 ‘사유지’가 파괴되었습니다.] 무너지는 바닥을 보며, 사색이 된 공필두를 향해 나는 씩 웃어주었다. “우리, 자기 땅이 없던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자고.”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