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33화 Episode 8. 긴급 방어전 「이현성은 지통실의 당직사관처럼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 멸살법이었다면 그런 묘사가 있었겠지. 거기다 어쩌면, 이런 문장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이현성은 모를 것이다. 오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현성 씨?” “······아, 으흠, 잠깐 졸았군요. 독자 씨, 잘 쉬셨습니까?” “네, 저야 뭐. 그런데 잠꼬대하시던데요. 당직사관이 어쩌구······.” “엇, 정말입니까?” “이병 이현성이 어쩌구······.” 이현성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 그게. 병사 생활할 때 트라우마가 좀 남아서 말입니다.” “병사 생활? 이현성 씨는 장교시지 않습니까?” “그게······, 저는 상병 때 3사로 편입했습니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군대가 잘 맞으셨나 봅니다.” 이현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웃음이었다. 군대가 잘 맞아서 남는 사람은 좀처럼 없다. 다른 일이 맞지 않아서 남는 사람은 있어도. 그럼, 슬슬 돌을 좀 던져 볼까. “그래도 이현성 씨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예?” “이현성 씨가 앞에서 막아주고 있으면, 안심이 되거든요. 누군가가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렇습니까?” 이현성이 미묘하게 웃었다. 힘없는 미소였지만, 분명 위안을 얻은 미소였다. 나는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이현성과 멀어졌다. 본래 3회차의 전개대로라면, 이현성은 금호역에서 철두파로부터 사람들을 지키며 특성 진화 이벤트를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그 기회는 정희원이 가져갔다.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온 정희원과 유상아, 그리고 이길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마주보며 소곤거렸다. “시범은 잘 보셨습니까? 제가 하신 것처럼 하시면 됩니다.” “네. 뭐··· 대충은요. 근데 왜 이런 걸 해야 되는 거예요?” 왜긴, 저것 때문이지. [등장인물 ‘이현성’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순진한 얼굴로 철제 방패를 벅벅 닦는 이현성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전지적 독자 시점]이 사기는 사기다. 적어도 ‘등장인물’에 한해서는 말이다. “현성 씨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요즘 의기소침해 보이시고······. 주변에서 조금씩 북돋아 주면 빨리 기운을 차리시지 않을까요?” 나는 정말로 이현성을 위한다는 듯이 말했다. 순진한 유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같은 건가요?” “비슷하죠.” “알겠어요. 힘내볼게요!” 그런 유상아와는 달리, 정희원은 살짝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독자 씨.” “네.” “독자 씨 배후성이 혹시 ‘외눈 점쟁이’ 같은 건 아니죠?” “···그게 뭡니까?” “궁예 몰라요?” 잘도 수식언을 갖다 붙이는군. 잠깐 정희원이 멸살법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연히 그럴 턱이 없었다. 왜냐하면 궁예의 수식언은 ‘외눈 미륵’이니까. “그런 건 아니고, 특별한 스킬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스킬이라고 해둘게요.” “···뭔지 물어도 어차피 안 알려 줄 것 같으니까 그냥 안 물어볼게요.” “고맙습니다.” “근데 혹시 저한테도 비슷한 거 쓰신 건 아니죠?” 하마터면 표정에 감정이 드러날 뻔했다. 정희원에게 [거짓 간파]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이길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전 남자한테만 씁니다.” “어머.”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직 정희원의 속마음을 읽은 적은 없으니까.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다들 신경 좀 써 주세요. 제일 먼저 정희원 씨, 그 다음은 유상아 씨, 마지막은 길영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시간 날 때마다 한 번씩 말해주세요.” “‘어머나, 저는 현성 씨를 믿어요!’ 그런 느낌이면 되는 거죠?” “그렇게 까진 아니고, 아무튼 요령껏 말해 주세요.” “어휴, 오글거려 죽겠네, 진짜.” 오글거려도 해야 한다. 이번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이현성의 ‘특성 진화’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유중혁이 저렇게 나올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일찍 계획을 꾸렸을 텐데······ 그래도 열심히만 하면, 빠듯하긴 해도 오늘 안에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행들은 그럭저럭 잘 해내는 듯했다. “현성 씨는 뭔가 한결 같은 부분이 듬직해요. 소나무 같다고나 할까.” “하하, 감사합니다, 희원 씨. 제가 좋아하는 군가도 마침 ‘푸른 소나무’입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뿌듯함을 느낍니다.] “그런 건 안 물어봤는데요.” [등장인물 ‘이현성’이 조금 시무룩해합니다.] “현성 씨처럼 정의로운 사람은 좀처럼 못 본 것 같아요.” “아···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등장인물 ‘이현성’이 정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현성이 형 근육 최고.” “고맙다, 녀석.” [등장인물 ‘이현성’의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저렇게 영혼 없는 칭찬들이 잘도 먹히다니, 이현성이 단순한 캐릭터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인가 비슷한 대화를 반복하고 나자, 슬슬 시스템 메시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특성 진화의 계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 순조롭구만. 유상아가 조금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근데 현성 씨가 좀 부담스러워 하시는 것 같아요······.” 역시 유상아는 착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이 신경이 쓰이는 거겠지. 나는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이다. “조금 그렇기도 하겠죠. 하지만 필요한 일일 겁니다. 세상에는 더 많은 짐을 짊어질수록 더 강해지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아······.” “잘 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리고······ 길영아, 내가 부탁한 건 알아봤어?” “네, 형.”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길영이 대답했다. 작은 머리통 위에서 바퀴벌레 한 쌍이 더듬이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그 누나, 지하 1층에 있대요.” “고맙다.” 이현성은 이정도면 됐다. 이제 남의 전력을 훔치러 갈 때다. 나는 홀로 환승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건물주 연합’의 연합원들이었다. “하하, 이게 누구야. 불법 세입자 아니신가.” “······.” “그런 일을 벌이고 잘도 위로 올라 오셨구만. 듣기론 어제 ‘방’ 없이 살아남았다던데, 진짜야? 유중혁이가 도와준 모양이지?”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연합원들이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유중혁이 따까리로 사는 거 힘들지 않아? 우리 연합에 들어와. 필두 씨가 생각해 본다고 했거든.” 못 들은 척 지나가며 층마다 남은 ‘그린 존’을 센다. 하나, 둘, 셋······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하나라도 빠뜨려선 안 된다. “물론, 그 여자들도 모두 데리고 온다는 조건 하에 말이야.” 이제 남은 그린 존은 총 열 한 개. 어제의 시나리오로 인해 숫자가 많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계획을 실행하기엔 아슬아슬한 숫자다. “어이,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듣고 있어. 생각해 본다고 전해 줘.” 내 말에 서로를 쳐다본 연합원들이 킬킬 웃었다. 지금은 그렇게 웃겠지. 멀어지는 놈들을 뒤로하고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는데, 등 뒤에서 나타난 칼날이 어느새 내 목에 닿아 있었다. 기척이 거의 안 느껴졌는데······ 초반에 이 정도의 은밀 기동을 자랑할 수 있는 스킬은 하나뿐이다. [귀신 걸음걸이]. “실망이네, 아저씨.” 이지혜. 싸가지가 없어서 그렇지 실력 하나는 출중한 여자애다. 괜히 충무공의 선택을 받은 게 아니다. “아저씨, 저 새끼들이랑 거래하면 그쪽 여자들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지?” “물론 알지.” “아는 사람이 그래? 차라리 어제 죽어버리지 그랬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칼 치워. 얘기하러 왔으니까.” “얘기? 일부러 나 찾아 온 거야?” “그래.” 그 말에 이지혜가 순순히 칼을 치웠다. 돌아보니 이미 이지혜는 뒤쪽에 없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지하 1층 개찰구를 넘어가는 길목에 선 이지혜가 보인다. 그새 스텝을 밟아 저기까지 멀어진 모양이다. “할 얘기가 뭔데?” “근데 거긴 왜 서 있는 거냐?” “사부가 여기 지키랬어.” “···지켜?” “그러니까 아저씨도 못 넘어가.” 이지혜가 개찰구를 툭툭 건드리며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나는 개찰구 너머로 이어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출구 번호들. 하지만 모든 번호가 곧 지상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유중혁 이 새끼, 그 ‘루트’를 타고 있는 건 아니겠지? 유중혁이 여길 지키라고 했다면, 녀석의 목적은 하나뿐이다. 놈은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틈을 타서, 몰래 충무로의 ‘히든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것이다. 히든 던전 공략. 말은 좋다. 사실 주인공이 강해져서 내가 나쁠 것은 없으니까. 문제는, 그 던전은 3회차의 유중혁이 끝까지 깰 수 없는 곳이라는 거다. 이거 아무래도 일을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은데. “네 도움이 필요해서 왔어.” “내 도움?” “오늘 공필두 일행을 박살 낼 거야.” “···진심?” 이지혜는 내 진심을 가늠해 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등장인물 ‘이지혜’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아저씨 힘으로는 안 될 걸. 그 떨거지 일행들이 다 덤벼도 무리고.” “네가 도와도?”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이지혜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럴 법도 했다. 이지혜는 이미 이 역에 처음 온 날, 공필두에게 도전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망쳤겠지. 때마침 유중혁이 그녀를 구하러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이지혜는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방법이 있어. 네가 도와준다면 실행할 수 있는 방법.” “···사부가 여길 지키라고 했어.” “네가 돕지 않으면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죽어.”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야.” “유중혁이 그렇게 말하더냐?” 이지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어제 우리랑 얘기하던 남자애가 죽었어. 알고 있지?” “······알아.” “어쩌면, 살 수도 있었어. 오늘도 우리한테 쪼르르 달려와서, 유중혁의 무용담들을 떠들 수도 있었지.” “그건······.” “유중혁이 그 애를 죽인 거야. 충분히 살릴 수 있었는 데도 죽인 거라고.” 말을 하면서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잘도 번지르르 지껄이지만, 나는 유중혁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지하철에서도, 금호역에서도······ 나는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내 안전을 위협받는다는 이유로 외면했으니까. 하지만 위선자일수록 그럴 듯한 말을 지껄일 수 있는 법이다. “지하철에서 네가 나오는 시나리오 영상을 봤어.” 이지혜의 작은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반 친구를 죽이고 살아남는 영상이었지.” “······그만.” “사실 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거야.” [등장인물 ‘이지혜’가 크게 동요합니다.] “아저씨가 뭘 알아?” “알긴 뭘 알겠어. 당연히 모르지. 난 그냥 내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 “하지만 기왕 멋대로 지껄이는 거,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만약 오늘을 외면하면, 넌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반드시.” [등장인물 ‘이지혜’가 깊은 고뇌에 빠집니다.] 나는 ‘인간’ 이지혜는 잘 모르지만, ‘등장인물’ 이지혜는 잘 알고 있다. 이 소녀는 이대로 두면 유중혁의 충성스런 부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고, 아직은 아니었다. 유중혁의 강함을 동경하긴 해도, 그녀는 근본적으로 유중혁과는 다르니까. 이지혜가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었다. “내가 도우면 사람들이 살 수 있어?” “모두는 아니겠지만, 꽤 많이 살아남을 거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오늘 오후 일곱 시에 일을 시작할 거야.” 나는 계획을 들려주었다.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이지혜가 꼭 해야 할 일들만을 골라서. 내 말을 잠자코 듣던 이지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제정신이야? 정말 그걸 하겠다고?” “그래.” “······솔직히 잘 될 것 같지 않은데.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아직 도운다고 말하진 않았어.” “선택은 네 자유야.” 말은 저렇게 하지만, 이지혜는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저 싸가지가 괜히 충무공의 선택을 받은 건 아니니까.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뻔뻔함을 좋아합니다.] [1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이지혜의 배후성이 당신에게 호감을 갖습니다.] [100코인을 추가로 후원받았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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