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화
338화
그 시각, 60번 시나리오에 설치된 <임시 관리국>의 모두는 같은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신화급 성좌의 전투.
하급 도깨비부터 상급 도깨비에 이르기까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 도깨비들은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자신의 채널들조차 잊은 채 시나리오에 몰두했다.
하데스 대 포세이돈.
지난 몇 년간, 이만한 성좌들이 혈투를 벌인 적은 손에 꼽았다.
물론 강력한 성좌들이 부딪친 일을 꼽자면 더러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그 전투의 서사였다.
자신의 후계를 지키기 위한 전투.
거기에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자신의 후계를 발표하지 않았던 하데스의 기습 선언이 이어지며, 성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전투의 정경에 열광합니다!]
절대다수.
상급 도깨비인 비형조차도, 그런 성좌 군집 단위는 처음 보았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해당 전투에 열광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시나리오 참가 의욕을 불태웁니다.]
[성좌, ‘타락의 구원자’가 광기에 찬 눈으로 전투를 지켜봅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참담한 눈으로 전장을 바라봅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서, 성좌들은 절대 악과 절대 선을 가리지 않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좌, ‘흙으로 사람을 빚은 대모신’이 전장을 지켜봅니다.]
[성좌, ‘뇌전의 신왕(神王)’이 <올림포스>의 전쟁에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환생자들의 시조’가 즐거워합니다.]
성운 <황제>에 <베다>, 거기다 <여신의 섬>까지.
중국과 인도, 아일랜드 신화를 가릴 것 없이 모여든 성좌들이 신화급 성좌들의 전장을 관람하고 있었다.
채널의 구독좌들이 급증하자, <관리국> 또한 잔여 개연성을 끌어와 시나리오를 지탱하고 채널을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런 호재를 <관리국>이 놓칠 턱이 없었다.
승세가 조금씩 기울어감에 따라, 성좌들의 반응도 더욱 뜨거워졌다.
드디어 이곳에서, 하나의 신화가 저물 것을 예감한 것이다.
하나의 신화가 쓰러진 자리에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설화가 만년설 위의 꽃처럼 피어나리라.
흥분과 격정에 찬 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비형은 불안한 상태였다.
‘······저 자식들, 대체 뭘 하는 거지?’
화면 속에서 김독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불에 달아 새하얗게 익어버린 강철검제와, 그 검을 쥔 거신병 플루토. 고대 그리스 시대의 태양처럼 빛나는 강철검은 꼭 거대한 횃불처럼 보였다.
독각이 말했다.
“미쳤군. 저놈들, 「성화 봉송」을 하려는 거다.”
모든 도깨비는 곧 이야기꾼.
호기심이 생긴 한 도깨비가 독각에게 물었다.
“성화 봉송? 그게 뭔가?”
“성화가 설화를 태워 만든 불꽃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네.”
“성화 봉송은 ‘평화’와 ‘승전보’의 의식이다. 저놈들은 저 불길을 통해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독각의 말에 도깨비들이 입을 벌렸다.
“미쳤군. 지금 저 전장에 끼어들겠다고······.”
‘구원의 마왕’은 도깨비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신생 성운, <김독자 컴퍼니>의 주인.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마왕이자, 73번째 마계의 지배자.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과 싸워 살아남은 존재이자, ‘이계의 신격’의 가호를 받으며, 심지어는 다른 세계선을 건너 돌아온 ‘귀환자’.
“아무리 저자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무모한 만용이다.”
모두가 혀를 차는 와중에, 홀로 웃는 도깨비가 있었다.
“하핫, 하하하······.”
비형이었다.
몇몇 도깨비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비형은 계속해서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이곳의 도깨비들 중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고오오오오!
혁명의 성화를 치켜든 채 낙하하는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
누가 보아도 그들은 불꽃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들이었다.
하지만 비형은 그들이 쌓아온 설화를 알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주어졌던 난관은, 크기만 달랐을 뿐 언제나 ‘불가능’의 영역에 있었다.
“그래, 그래야 김독자답지!”
<김독자 컴퍼니>가 그리는 별자리를 보며, 비형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역사를 떠올렸다.
그 지하철에서, 처음으로 김독자를 만났던던 순간.
유약했지만 침착했던 김독자와, 처음으로 ‘독점 계약’을 맺었던 순간들.
설화들은 눈송이처럼 쌓여갔다.
믿을 수 없는 것도 있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었다.
하찮은 인간이 설화를 쌓아 성좌가 되고, 마침내 얻은 거대 설화를 통해 ‘단 하나의 설화’의 출발점에 도달하기까지······.
이야기꾼 비형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아 왔다.
독각이 말했다.
“이번에는 실패할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냉정하군. 네놈과 계약한 성좌가 아니었나?”
“그랬었지만, 이젠 아니야.”
비형이 웃었다.
비형도, 김독자의 저 전략이 성공할지 아닐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야기꾼의 예감이 있었다.
김독자의 설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란 예감이.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확장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도깨비들의 눈이 커졌다.
창공을 뚫고 날아오는 황금빛 열차.
수르야의 황금 열차였다.
“저것은······!”
고작 60번 시나리오에서 저런 일이 벌어질 거라 말했다면, 누가 믿었을까.
“저것이라면. 어쩌면······!”
신과 인간의 합작.
단 하나의 설화, 그 두 번째인 승(承)을 향한 성화의 길.
마치 하강하는 황룡(黃龍)처럼 추락하는 열차를 보며, 도깨비들은 숨을 삼켰다.
왜일까.
무모하고, 터무니없고, 심지어는 불가능하기까지 한 저 도전을 보며.
어째서 이야기꾼인 그들은 이토록 심장이 타는 것일까.
어쩌면 독각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저 공격은 실패할 수도 있고, 이대로 저 성운은 <스타 스트림>의 먼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도깨비 ‘하롱’이 60번 시나리오를 지켜봅니다.]
[대도깨비 ‘호롱’이 60번 시나리오에 집중합니다.]
[대도깨비 ‘바람’이 60번 시나리오의 결말을 주시합니다.]
그 순간, 모든 도깨비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도, 저런 시나리오를 만들고 싶다.」
시나리오의 터전 위에 성좌들의 설화가 자라난다.
그 설화를 먹고 자란 성좌들이 또 다른 설화를 꿈꾼다.
그것이 바로 <스타 스트림>의 동력.
가슴이 벅차오른 비형이 외쳤다.
“쟤들! 내가 키운 녀석들이야! 다들 알지?”
어떤 설화가 좋은 설화인가.
어떤 시나리오가, 좋은 시나리오인가.
그곳에 그 답을 아는 도깨비는 아무도 없었다.
그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도깨비 왕’이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도깨비들도 하나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지금 저 이야기를, 아마 그들의 ‘왕’ 또한 보고 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
콰콰콰콰콰콰!
낙하하는 열차의 첨단이 마침내 파도와 충돌했다.
놀란 포세이돈의 눈이 커졌다.
설화급 성좌인 ‘수르야’의 격이, 포세이돈의 파도를 깎아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도의 벽은 여전히 험준하고 두터웠다.
“다음은 나야.”
「또 다른 종막을 꿈꾸는 여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하니」
한수영이 푼 붕대에서 불타오른 [흑염]이 열차의 첨단을 따라 출격했다.
한수영의 [흑염]은 투박하지만 용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 녀석도 벌써 그런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콰드드드득!
고깃덩이를 찢듯 파도의 살점을 뜯어 먹으며 전진하는 흑염룡의 형상.
뒤따라 이지혜가 나섰다.
「상처받은 검귀가, 자신의 인연을 지키기 위해 검을 들었다.」
지휘관처럼 치켜든 이지혜의 검집에서 키링이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파도의 벽을 타고 나타난 함대가 있었다.
콰아아앙!
‘유령 함대’가 흑염룡이 만든 통로를 향해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파도가 메워지는 것을 방해하는 충무공의 포격에, 포세이돈이 기함했다.
그러나 포세이돈은 이쪽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기세를 회복한 하데스가, 저승의 낫으로 그의 목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아아아아!
그리고 터져 나가는 폭격 속, 열차의 후미에서 스프린트 자세를 취하고 있던 거신병 플루토가 있었다.
신유승이 외쳤다.
“출발해요, 아저씨!”
열차의 관성에, 플루토의 속도가 더해진다.
거기에 [키메라 드래곤]의 풍속성 브레스가 작렬하며 가속도를 증폭시킨다.
“가요, 독자 형!”
이길영의 응원과 함께, 플루토가 돌진을 시작했다.
양손으로 강철검제를 쥔 채, 그리고 그 안에서 [지옥염화]를 공급하는 정희원을 보호한 채로.
“하아아아앗!”
이현성의 기합과 함께, 플루토의 거체가 하늘을 날았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거대 설화 ‘대해의 패자’가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설화와 설화가 부딪치며, 플루토의 장갑이 뜯겨 나갔다.
김남운은 고통 속에서도 즐거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옥에서 돌아온 강철의 거신이 검을 휘두르니」
「멸악과 강철의 염화가 불타올랐다」
[지옥염화]로 불씨를 피웠고, 다른 모든 일행들의 설화가 깃든 검.
성화의 불꽃에 수많은 파도의 벽들이 일제히 기화하고 있었다.
쩌저저저저저적!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던 신화급의 방벽이 깨져 나가고 있었다.
부서진 파도의 결계 너머로, 무방비 상태의 테세우스가 보였다.
그러나 눈앞에 승기를 둔 상황에서, 플루토는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반전된 것처럼 흔들렸고, 나는 플루토의 안에서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찰나의 사이, 포세이돈이 던진 트리아이나의 창극이 플루토의 허리를 베고 지나갔던 것이다.
스친 곳은 하필 내가 타고 있던 자리였다.
“독자 씨!”
희미하게 들려오는 정희원의 목소리.
[성유물 ‘트리아이나’의 힘이 당신의 화신체에 치명상을 입혔습니다!]
[당신의 격이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충격을 일부 상쇄합니다.]
이것이 ‘신화급 성좌’의 위용이다.
나 같은 수준의 ‘설화급’은, 그저 벌레처럼 짓밟아 버릴 수 있는 힘.
파도의 결계는 뚫었으나 성화의 불꽃은 식어가고 있었다. 강철검제 이현성은 기절한 듯했고, 정희원의 마력도 거의 다했다. 파도의 결계는 다시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포세이돈은 하데스를 상대하면서도 여유로워 보였다.
희미한 미소. 아마,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런 포세이돈을 향해, 나도 마주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주인공은 마지막에 출격하는 법이다.
“유중혁!”
꺼진 성화 속에서, 모두의 설화를 등에 업은 검은 코트의 사내가 달린다.
놀란 포세이돈이 수창(水槍)을 퍼부었지만, 날쌘 [주작신보]가 창의 일부를 흘려보냈다.
미처 막아내지 못한 창 몇 개가 유중혁의 허벅지와 어깨를 스쳤다.
[아이템, ‘거신갑(巨神鉀)’이 효력을 발휘합니다!]
거신의 힘이 담긴 방호구가 가까스로 신의 창으로부터 유중혁을 지켰다.
한 발, 두 발, 세 발.
꽂히는 창날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거신갑]도 부서지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기어코 부서진 갑옷.
이제 열 걸음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포세이돈의 격이 막대한 스크류를 형성하며 유중혁을 향해 쇄도했다.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졌다. 3회차의 회귀자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테세우스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김독자.」
유중혁을 보는 내 의식도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무리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3회차의 유중혁은 테세우스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없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하지만, 녀석이 ‘3회차’가 아니라면 어떨까.
[흐려진 의식이 육체의 구속에서 일부 해방됩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 3단계가 강제로 활성화됩니다.]
다시 한번 뒤바뀌는 시야와 함께, 내가 보는 풍경이 바뀌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 발동합니다!]
유중혁이 보는, 바로 그 풍경이었다.
「김독자?」
의아한 듯한 유중혁의 사념.
날아오는 포세이돈의 창.
순간 유속이 느려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머릿속에서 오래된 ‘멸살법’의 페이지를 넘겼다.
‘3회차’는 할 수 없는 일.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해질 일을, 간절히 상상한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4회차, 5회차, 6회차······ 41회차······ 56회차······.
[해당 회차는 당신의 ‘독해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울컥, 하고 핏덩이가 넘어왔고 충혈된 두 눈이 깨질듯 아파왔다.
폭발적인 서사의 향연에 머릿속이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당신의 ‘독해력’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당신이 독해할 수 없던 페이지들이 펼쳐집니다!]
우리를 보는 무수한 시선들이 있었다. 성좌들은 아니었다.
유중혁이 중얼거렸다.
「이건······.」
다른 회차의 ‘유중혁’들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러운 듯이, 누군가는 침울한 얼굴로.
그리고 누군가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재미있군.」
좀처럼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나는 지금의 내가 넘길 수 있는 최대의 페이지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 사용했다.
[당신이 독해할 수 있는 최대 회차에 도달하였습니다.]
[당신이 독해 가능한 ‘유중혁’의 최대 회차는 ‘362회차’입니다.]
362회차의 유중혁.
그것이 내가 꺼낼 수 있는 최후의 패였다.
고오오오오오!
362회차의 유중혁은 포세이돈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그런 일이 가능하려면, 최소한 회귀 회차가 1700번은 넘겨야 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향으로 해당 회차의 ‘유중혁’의 재능이 타인에게 전이됩니다.]
[362회차 ‘유중혁’의 재능이 화신 ‘유중혁’에게 깃듭니다.]
하지만 362회차의 유중혁도 충분히 강하다.
왜냐하면 362회차의 유중혁은,
「“오랜만이구나 포세이돈.”」
저 포세이돈과 처음으로 맞서 싸웠던 유중혁이었으니까.
「“그때도 네놈의 아들을 죽였지.”」
분노한 포세이돈의 포효가 들려온다.
362회차의 유중혁이, 3회차의 유중혁을 움직였다.
백만 번, 천만 번도 더 취했던 권(拳)의 자세.
「“이 권장(拳掌)으로.”」
유중혁의 [파천붕권]이, 최후의 결계를 부수고 테세우스의 화신체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