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화
337화
“내가 왜 당신들을 도와야 하죠?”
“아니면 그쪽도 죽을 테니까요.”
어둠 속에 비치는 인영의 숫자는 열 명 남짓. 안나 크로프트와 셀레나 킴, 그리고 그녀의 일행들이었다.
예상대로 그들 또한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한 것이다.
“우리는 휘말리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어요.”
“그럼 손해를 볼 텐데요. 기왕 시나리오에 참전한 김에 끝까지 클리어 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 아니겠습니까?”
안나 크로프트가 내 진의를 시험하기라도 하듯 노려보았다.
“진짜로 원하는 게 뭐죠?”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 당신이 갖고 있지? 경매장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더라고.”
안나 크로프트는 [미래시]를 쓸 수 있는 존재.
아마 그 아이템의 가치를 미리 알고 구매해둔 상태일 것이다.
그제야 내 의도를 읽어낸 안나 크로프트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건 줄 수 없어요. 내 거신병에 쓸 재료니까.”
“「무대화」가 가능한 기종을 만들려는 거겠지? 당신들 힘만으로는 무리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건 해봐야 알겠죠.”
안나 크로프트의 일행들이 적의를 보이며 한 걸음을 다가왔다.
그러자 유중혁이 그에 맞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말로 할 것 없다.”
스르릉, 하고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어차피 죽여야 할 여자니까.”
초월좌의 ‘격’이 동굴을 가득 채우자, 저쪽에도 긴장감이 역력해졌다.
유중혁을 이용해 아이템을 빼앗는 방법도 있겠지만, 문제는 상대가 ‘안나 크로프트’다.
내가 유중혁을 제지하기 위해 손을 들자, 유중혁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나를 노려보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삼인(三忍) Lv.10’을 발동 중입니다.]
참을 인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
설마 유중혁이 저 스킬을 쓰는 걸 눈앞에서 볼 줄이야.
안나에 대한 유중혁의 원한이 어느 정도인지, ‘멸살법’을 읽은 나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고민하던 내가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 내 말을 가로챈 이가 있었다.
“안나, 저분들께 장갑을 내주세요. 지금은 우리가 양보해야 할 때에요.”
셀레나 킴의 담담한 목소리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개를 돌린 셀레나 킴이 나를 향해 목례를 하며 전음을 보내왔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구원의 마왕님.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나는 경매장에서 안나 크로프트와의 내기를 통해 셀레나 킴에게 걸린 ‘주종 서약’을 풀어준 적이 있다.
즉, 셀레나 킴은 더이상 안나 크로프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가장 큰 전력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자, 안나 크로프트의 표정도 볼만해졌다.
셀레나 킴이 수를 던졌으니, 이제 마무리는 내 차례였다.
“공짜로 달라는 건 아닙니다.”
“······그럼?”
“코인으로 사겠습니다.”
코인이라는 말에, 안나 크로프트가 멈칫했다.
“50만 코인이면 어떻습니까? 아마 경매장에서 잃은 코인 때문에 꽤 손해를 봤을 텐데요.”
안나 크로프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누구 때문에 입은 손해인데, 하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안나 크로프트가 입을 열었다.
“100만 코인이라면 생각해 보죠.”
“원래 20만 코인짜린데, 너무 비싸게 올려치는 거 아닙니까? 60만 코인.”
“90만 코인.”
“70만 코인. 더이상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80만 코인까진 봐 드릴게요.”
역시, 만만치 않은 여자다.
80만 코인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이번 거래는 반드시 성사되어야만 했다.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은 이번 ‘고래잡이’에 반드시 필요한 아이템이니까.
[‘리코메데스 왕의 가죽 장갑’을 획득하였습니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에게 80만 코인을 지불했습니다.]
거래가 끝나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서로 손해는 없는 셈이군요.”
“서로 손해가 없다고요? 나한테 100만 코인 뜯어갔던 건 벌써 잊었나요? 아직 이쪽이 20만 코인이나······.”
“나중에 한국에 한 번 놀러 오시죠. 20만 원짜리 코스 요리 정도는 대접해드릴 수 있으니까.”
물론 20만 코인과 20만 원이 같을 턱이 없다.
분한 듯, 안나 크로프트가 이를 까득 갈았다.
“정말로 포세이돈과 싸울 셈인가요?”
“미래시로 봤으니 아실 텐데요.”
“그건······.”
물론, 그녀가 미래를 모를 거라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그녀의 [미래시]로는 나와 관련된 미래를 볼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그녀를 스쳐가며,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마 이번엔 꽤 재밌을 겁니다. 당신도 읽을 수 없는 미래가 올 테니까.”
부르르 떠는 안나 크로프트의 작은 머리통을 보며, 나는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왜 이 사람만 만나면 유독 괴롭히고 싶어지는지 모르겠다.
“당신의 오기가 개죽음으로 끝나지 않길 바라죠.”
“정말 그런 걸 바란다면 <아스가르드>한테 개연성이나 보태 달라고 해줘요.”
말을 마친 뒤, 나는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안나 크로프트를 노려보고 있는 녀석은 당장에라도 칼을 휘두를 듯한 기세였다.
재빨리 [한낮의 밀회]를 날리려는 순간, 뜻밖에도 돌아선 유중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여자의 목을 베는 것은 나다. 그게 언제가 되든.
―맘대로 해.
물론 그때가 되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안나 크로프트는 우리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다.
디오니소스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난 뭘 하면 되지?]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뭐?]
벙찐 디오니소스를 내버려 두고, 나는 거신병을 돌아보았다.
플루토가 바닷물 속에서 자신의 거체를 일으켰다.
나는 유중혁 쪽을 턱짓하며 물었다.
“두 명도 태울 수 있지?”
[하나도 기분 나쁜데 둘이나?]
“할 수 있어, 없어?”
[······못 한다고 하면 안 탈 거냐?]
*
신화급 성좌들이 충돌하는 와중에도, 까마득한 상공에서는 성좌들의 진언이 오가고 있었다. 잠시 싸움을 멈춘 그들은,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는 대신 현상황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중이었다.
[설마 여기서 하데스가 나타날 줄이야······.]
[저들을 어떻게 말리죠? 아테나, 네가 예전에 포세이돈 아저씨랑 싸워서 이긴 적 있지 않아?]
[또 그 얘기야? 올리브 나무 하나 심어줬다가 별 얘길 다 듣네······ 내가 신화급을 어떻게 이겨?]
[‘번개의 좌’나, ‘대지의 어머니’라도 나타나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12신좌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최상위 시나리오에 진출한 뒤 성운의 일에 무심해진 ‘번개의 좌’도, <올림포스>를 증오하는 ‘대지의 어머니’도, 이 사건에 끼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헤르메스, <올림포스>의 ‘거대 설화’를 사용하면 어떨까요?]
[저 둘이 우리 쪽 ‘거대 설화’의 최고 담화자들인데, 그게 씨알이나 먹히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요.]
여기저기서 의견이 난립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 성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설화가 곁에 있던 이현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화급 성좌들은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말하는 걸 보니 생각보단 평범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우린 이제 어쩌죠? 성좌들도 저렇게 나올 정도면······.”
이설화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동안 <김독자 컴퍼니>의 일행들은 노력했다. 스스로도 자부할 수 있을만큼 수련하고 또 수련해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상대해야 할 존재는 ‘위인급 성좌’도, ‘설화급 성좌’도 아니었다. 그들이 쌓아온 설화로는, 발끝에도 비빌 수 없을 어마어마한 격의 존재들.
신유승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번에 저 ‘태양 아저씨’ 쓰러트릴 때도 엄청 힘들었잖아요······.”
두 눈을 감은 수르야는 이마의 [제3의 눈]을 통해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최강의 태양신이라는 수르야조차 이번 일에는 끼어들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그도 신화급 성좌와는 대결할 수 없는 것이다.
쿠구구구구!
다시 한번 번져오는 충격파.
포세이돈과 하데스의 충돌이 잦아질수록, 하늘에도 희미한 균열이 번지고 있었다. 격의 충돌에 공간 자체가 무너지고 있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이거, 하데스 아저씨가 지겠는데.]
[어쩔 수 없지. 무대가 ‘바다’니까.]
12주신들의 표정에 복잡한 계산이 스쳐갔다.
포세이돈이냐, 하데스냐.
어느 쪽이 이기든 <올림포스>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될 것은 뻔했다.
줄곧 눈을 감고 있던 수르야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오는군.]
무언가가 창공을 뚫고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새카만 블랙 드래곤의 가죽으로 만든 거신병이었다.
화색이 된 이길영이 외쳤다.
“독자 형!”
슈우우우, 하는 배기음과 함께 거신병이 멈춰 섰다.
플루토의 안쪽에서 튀어나온 김독자가 말했다.
“여러분. 시간이 없으니 짧게 설명하겠습니다.”
김독자는 천천히, 모든 성좌들과 화신들을 바라보았다.
“저는 ‘성화’를 만들 겁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여러분들 모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갑작스런 말에, 12신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진언들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성화 봉송!]
[그렇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여기저기서 난립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김독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12신좌님들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뭐? 그게 무슨 말인가?]
“여러분들은 <올림포스> 소속이라 포세이돈이 거대 설화를 풀면 저항할 방법이 없습니다. 괜히 성화에 참여했다가, 자칫 역효과만 날 수도 있어요.”
김독자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몇몇 성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돕지 않는다면 어떻게 「성화」를 켤 셈인가?]
애초에 성화는 ‘태양’에서 비롯된 빛. 신성한 빛을 시작하려면, 반드시 태양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수르야가 조용히 일어섰다.
김독자가 그를 보며 말했다.
“수르야께서도 앉아 계십시오.”
수르야가 다시 앉았다.
[태양 없이 어떻게 ‘성화’를 만들겠다는 거지?]
“‘성화’는 ‘신성한 불길’입니다. 꼭 태양만이 켤 수 있는 건 아니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어깨를 으쓱합니다.]
뒤를 돌아보자,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의 몸을 정희원이 꽉 끌어안고 있었다. 이현성의 볼은, 부끄러움 때문인지 [지옥염화]의 불길 때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무 너무나 뜨겁습니다아아아아!”
“미안해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 광경을 보던 수르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덴>의 불꽃이라면 태양열을 대체하기에는 충분하겠군. 하지만 그 정도의 ‘성화’로 포세이돈의 파도를 뚫기는 무리일 텐데.]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나설 타이밍이십니다.”
수르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재미있겠군.]
*
이현성이 불길에 충분히 달구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거신병의 어깨에 걸터앉아 일행들에게 몇 가지 지침들을 일러주었다.
문득 곁을 돌아보니, 한수영이 다리를 달랑거리며 사탕을 빨아먹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한수영을 향해 핀잔을 주었다.
“······맛있냐?”
“요즘 이상하게 단 게 땡겨. 너도 먹을래?”
한수영은 내 답은 듣지도 않고 쥐고 있던 사탕을 내 입에 쑤셔 넣었다.
레몬맛이었다.
내가 태연히 사탕을 먹자, 한수영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데, 그거 내가 먹던 건데.”
“그래서?”
“······재미없네, 진짜.”
야호, 하며 비명을 지른 한수영이 거신병의 어깨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 손바닥에 착지했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일행들도 다들 입에 사탕 하나씩을 물고 있었다.
심지어는 저 유중혁까지도. 이설화가 말했다.
“수영 씨가 나눠준 거예요. 긴장을 푸는 효과가 있다던데요.”
그래서 다들 하나씩 물고 있었던 거구만.
내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설화가 물었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이설화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설화도 나를 바라보았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빙긋 웃고 말았다.
우리가 이길 수 없을까. 그런 것은 모른다. 다만.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마침내 ‘성화’의 예열이 끝난 ‘강철검제’가 플루토의 손에 쥐어졌다.
나는 플루토에 탑승한 채 입을 열었다.
[다들 모여주세요.]
하나둘, 흩어져 있던 일행들이 모인다.
모두 다른 장소, 다른 시각에서 태어나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그렇게, 하나의 별자리가 된 사람들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김독자 컴퍼니>의 모든 담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독자(獨者)로부터 시작된 설화」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고독한 사내가 검을 쥐자」
「지옥의 염화를 품은 강철의 검이, 드높은 창공을 향해 치솟았다」
우리가 고스란히 쌓아온 역사가, 하나둘 「성화」의 불길 속에 모이고 있었다.
우리의 설화는 <올림포스>의 바깥에서 온 거대 설화이기에, 아무리 포세이돈이라고 해도 이 힘에 타격을 받지 않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멀리서, 기별을 눈치챈 포세이돈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비웃듯 파도를 방벽처럼 둘러 허공을 덮어버렸다. 뚫을 수 있다면 뚫어 보라는 듯, 자신감으로 만들어진 신화급 성좌의 방벽.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지금 <김독자 컴퍼니>의 전력을 다해도, 우리는 저 방벽 하나조차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겐 더 강력한 힘이, 빠른 속도가 필요했다.
저 벽을 뚫어낼, 강력한 추진력이.
그리고 마침 우리에겐, 그 추진력을 제공할 조력자가 있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의 이야기가 확장됩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열차의 경적.
[「무대화」가 발생합니다!]
「그리하여,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 그들의 길을 밝혔으니」
한때는 우리의 적이었던 그 열차가, 이제 우리를 태우기 위해 창공을 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부신 황금빛 오오라를 흘리는 태양 열차를, 일행들은 황홀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가능하다.
저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다.
“갑시다, <김독자 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