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335화
설화급 성좌들조차 슬금슬금 피하는 포세이돈의 거체를 향해, 기세등등하게 달려가는 유중혁.
디오니소스가 물었다.
[······혹시 저 미친놈을 믿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시켰다.
유중혁의 생각들이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기회는 ‘개연성 적합 심사’가 진행되는 지금뿐이다.」
「포세이돈은 신화급 성좌. ‘무대화’를 통해 제압할 방법은 거의 없다.」
「그나마 쓸 만한 것은 이 나뭇가지겠지.」
나는 유중혁의 손에 쥐어진 나뭇가지를 눈여겨보았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흠칫 놀랍니다!]
아마도, 저 나뭇가지는 여신 아테나에게 훔친 성유물인 듯했다.
엄밀히 말하면, 성유물이라기도 뭐하지만.
[아테나의 올리브 나뭇가지]
포세이돈이 무서운 이유는, 저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왔음에도 ‘패배 설화’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포세이돈도 딱 한 번 진 적이 있으니, 그것이 여신 아테나와 했던 내기에서였다.
언젠가 유상아에게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오래전, 한 도시를 두고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경합을 벌인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더 이로운 선물을 주는 신을 그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기로 했죠. 이때 포세이돈은 삼지창으로 바위를 쳐서 바닷물이 솟아나게 했고, 아테나는 풍부한 열매를 맺은 올리브 나무를 자라게 했대요.
―바닷물이야 흔했을 테니······ 아테나가 이겼겠군요?
―네, 아테나는 경합에서 승리해 수호신이 되었고, 도시의 이름은 <아테네>가 된 거죠. 앗······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말이 많았죠? 독자 씨는 판타지 전문가셔서 이 정도쯤은 알고 계셨을 텐데······.
―······.
물론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유상아처럼 신화에 박식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저 망할 유중혁은, 그 설화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주 약간의 타격이라도 좋으니, 생채기라도 낼 수 있다면.」
······[올리브 나뭇가지]라.
그것도 패배 설화라면 패배 설화겠지. 나뭇가지에 찔린 포세이돈이 바닷물을 조금 토하는 정도의 효과는 있을지도 모르겠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경고합니다!]
하지만 유중혁의 선택도 영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개연성 적합 심사」에 의해 시나리오가 강제로 종료될 거라면, 약간이나마 포세이돈에게 피해를 주고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운만 좋다면 「해역의 경계를 약간 바꾼 자」라든가, 「대해의 주인에 맞선 자」 따위의 설화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디까지나, 운이 좋을 때의 얘기지만.
나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도약 준비를 했다.
그런데 디오니소스가 내 어깨를 짚었다.
[가지 마. 죽어.]
“예?”
디오니소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개연성 적합 심사’가 종료되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개연성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나는 허공에서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관리국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욕설을 내뱉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관리국의 판단에 의혹을 품습니다!]
놀란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60번대 시나리오에 신화급 성좌가 나타났는데, 개연성 적합 심사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쿠구구구구!
천천히 올라간 포세이돈의 손에 거대한 삼지창이 쥐어져 있었다.
성유물 ‘트리아이나(Triaina)’.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자, 창극에 닿는 모든 것을 바다의 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무기.
“유중혁!”
뒤늦게 결계에서 빠져나온 내가 외쳤으나, 이미 유중혁은 포세이돈의 코앞에 있었다.
아무리 유중혁이라도, 저 일격을 받으면 즉사다.
참지 못한 나는 디오니소스를 뿌리치고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하지만 유중혁은 너무 멀리 있었고, 트리아이나의 창극은 가까웠다.
허공에서 낙뢰처럼 개연성의 스파크가 쳤다. 그 반동으로 유중혁의 신형은 자연히 뒤쪽으로 밀려났다. 검은 아우라와 함께 온화한 봄의 향기가 퍼졌다. 누군가가 포세이돈의 앞을 막고 있었다.
[포세이돈, 왜 애들 싸움에 끼어드는 거죠?]
스파크가 사라진 자리에, 고운 자태의 여신이 있었다.
쥘부채로 반쯤 얼굴을 가리고, 검정색 실크 케이프로 전신을 두른 신. 그녀의 얼굴이 낯설었기에,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디오니소스가 비명을 질렀다.
[아니, 저 아줌마가 왜 저기에!]
가장 어두운 지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는 눈부심이, 포세이돈의 창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페르세포네.]
바다 전체가 분노하듯, 매서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옷깃을 흔들었다.
흘끗 내 쪽을 보는 페르세포네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심경이 복잡했다.
왜 페르세포네가 나타난 거지?
<명계>는 이 일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설마······ ‘거대 설화’의 일부를 가져가기 위해서인가?
그런 짓을 하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질 텐데?
[페르세포네, 어째서 짐의 앞을 막은 것이냐?]
[여기까지만 하시라는 말씀을 드리러 온 거예요. 보세요, 너무 과하잖아요. 폐하의 백성들이 모두 겁에 질렸습니다.]
페르세포네가 가리킨 바다 위에서, 수많은 생명체들이 떨고 있었다. 그의 격을 맞이한 것만으로도 배를 까뒤집고 죽어간 수생종(水生種)들. 공포에 떠는 크라켄을 비롯해, 2급 이상의 거대 괴수종조차 미동도 없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성좌, ‘순결한 달빛의 수호신’이 애꿎은 생명체의 죽음에 개탄합니다!]
[성좌, ‘사랑과 미의 여신’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을 만류합니다.]
[성좌, ‘화로와 자애의 여주인’이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을 말립니다.]
기어이 중립을 지키던 성좌들까지 포세이돈을 만류하고 나섰다.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신화급 성좌인 당신이 나설 무대가 아니에요. 애들 싸움은, 부디 애들한테 맡겨 두세요.]
[더이상 애들 문제가 아니다.]
[애들 문제가 아니라뇨?]
[내 아들이 공격을 당했다.]
실제로 포세이돈이 강림한 테세우스의 왼팔에는 작은 화살촉이 꽂혀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럼 테세우스를 공격한 이만 단죄하시면 되겠군요. 그가 누구인지는 알아냈나요?]
[보나마나 거신이겠지.]
[그건 모르는 일이죠.]
[거신은, 모두 죽일 것이다.]
너무나 완고한 그 태도에, 저 용맹한 기간테스들조차 겁에 질려 몸을 떨고 있었다.
[깊은 지하에 숨어 살던 버러지들아. 너희는 오늘 지상에 나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쿵, 하고 내려찍은 트리아이나의 힘에, 근처에 있던 생명체들이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하지만 페르세포네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그녀가 ‘명계의 여왕’이라 해도, 신화급 성좌인 포세이돈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켜라. 아무리 네가 내 동생의 아내라도, 비키지 않으면 죽이겠다.]
아찔한 위협에도 페르세포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빛이 움직였고, 허공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아테나와 아폴론이 날아들었다.
[안 됩니다, 포세이돈!]
[해역의 경계를 긋는 창이시여!]
그러나 이미 늦었다.
파도가 치는 순간, 포세이돈의 창은 이미 페르세포네의 심장에 꽂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창을 받아낸 것은 페르세포네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손이었다.
엄청난 밀도의 어둠으로 만들어진 손이,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의 창극을 한 손으로 잡아 쥐고 있었다.
콰드드드드.
내 생애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환한 개연성의 향연.
나는, 어째서 관리국이 「개연성 적합 심사」를 그대로 통과시켰는지를 이해했다.
디오니소스가 입술을 떨며 웃었다.
[하하······ 오늘 잘못하면 12신좌들 다 죽어나게 생겼네.]
허공에 풀려나는 아득한 어둠의 설화.
오랜 세월 침묵을 지켜온 암흑이 깨어나고 있었다.
[거대 설화, ‘명계’가 대해(大海)를 오시합니다.]
<올림포스>의 3주신 중 하나, ‘부유한 밤의 아버지’.
명왕 하데스가, <기간토마키아>에 강림했다.
[포세이돈. 기어이 애들 싸움을 어른들 싸움으로 만드는구나.]
‘멸살법’의 원작에서도, 몇 번인가 신화급 성좌들이 싸운 적이 있었다.
하지만 ‘멸살법’의 고작 60번대 시나리오에서 그런 적은 없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75번째 시나리오에서 <올림포스>의 포세이돈과 <베다>의 시바가 부딪쳤을 때, 북미 전체가 날아가 버렸다.
주변의 소행성들이 모조리 박살 난 적도 있고······ 또 뭐가 있었더라.
[막아! 반드시 막아야 돼!]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전능의 태양’ 아폴론, ‘하늘 걸음의 주인’ 헤르메스, ‘술과 황홀경의 신’ 디오니소스. 거기에 백수거신 브리아레오스까지.
다음 순간 두 신화급 성좌의 충돌에서 터져 나온 격에, 모든 성좌들은 장난감처럼 튕겨 나왔다.
콰아아아아아아!
달려들던 설화급 성좌들은 모조리 암벽에 처박혔고, 브리아레오스는 남은 팔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누구도, 두 신화급 성좌의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
인근에 있었던 유중혁도 엄청난 충격을 받고 이쪽으로 날아왔다. 나는 잽싸게 움직여 녀석의 몸을 받아냈다.
명계의 왕과 바다의 왕.
두 명의 신화급 성좌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선의 마주침만으로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격의 소유자들.
먼저 입을 연 것은 포세이돈이었다.
[하데스, 어째서 <명계>에서 나온 거지? 너에겐 이 사태에 개입할 명분이 없다. 개연성의 저울이 맞춰지더라도, 너는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명분. 신화급 성좌와 같은 대존재가 하위 시나리오에 강림할 때는, 반드시 그런 명분이 필요하다. 그것도 「개연성 적합 심사」를 통과할 만한 적합한 명분이. 그리고 포세이돈의 경우, 명분은 자신의 아들인 ‘테세우스’였다.
그렇다면 하데스의 경우는 어떤가.
[명분이 왜 없겠어요? 우리도 후계를 지키기 위해 온 거죠.]
대답한 것은 페르세포네였다.
포세이돈이 무심히 물었다.
[후계? 너희들에겐 자녀가 없을 텐데?]
포세이돈의 말은 옳았다.
수많은 자식들을 거느린 제우스나 포세이돈과는 달리, 하데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것은 어느 전승처럼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금슬이 좋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없죠. 우린 되는 대로 자식을 낳아 전쟁의 장기말로 쓸 생각은 없거든요. 내 남편은 그대처럼 두뇌가 가랑이에 달려 있지도 않고요.]
포세이돈의 굳어지는 표정에도 아랑곳않고, 페르세포네가 말을 이었다.
[애초에 이런 빌어먹을 ‘시나리오의 세계’에서, 자식을 낳아 키울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닌가요?]
[너희들의 비뚤어진 가치관을 공격할 생각은 없다. 내가 물은 것에나 똑바로 대답해라. 자녀가 없는 너희들이 어떻게 후계를 가진다는 것이냐?]
심해의 수온처럼 차가운 목소리.
포세이돈의 트리아이나가 거친 울음을 토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너와 네 남편은 개연성의 후폭풍 속에 끔찍하게 소멸할 것이다.]
페르세포네는 말없이 웃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페르세포네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묘한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에서 ‘멸살법’의 페이지들이 넘어갔다. 나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유중혁을 내려다보였다.
······설마, 그랬던 거였나.
갑자기 여러 가지가 이해되었다.
그러고 보면 ‘멸살법’의 481회차에서, 유중혁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 하데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짐은 그대를 명왕(冥王)의 후계로 삼고 싶다.”」
생각해 보면 <명계>는 유독 나와 유중혁― 즉, <김독자 컴퍼니> 일행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그 냉담하고 차가운 부부가 그럴 턱이 없는데도 말이다.
만약 명계가 이번 회차의 유중혁을 자신의 후계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모든 게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나와 유중혁을 ‘별자리의 연회’에 데려갔던 것도, 그리고 ‘미식협’에 나를 초대해주었던 것도, 거기에 내 억지 부탁을 들어주거나, 파천검성을 <타르타로스>에 몰래 침입시켜 주었던 것까지······.
한데······.
생각해 보니 혜택을 더 많이 받은 건 난데?
그리고 다음 순간, 세상의 어둠이 내게 말을 건넸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당신을 <명왕>의 후계로 삼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