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334화
Episode 63. 신화의 종말
「(너 그대로면 죽어)」
덜덜덜 떨리는 스마트폰의 화면.
간간이 밀려오는 해일을 발끝으로 느끼며, 나는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원래 4차 수정본이 전송됐어야 하는데······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나는 이것이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제4의 벽] 안, 도서관의 사서들.
아마도 이걸 보낸 이는 니르바나일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하다못해 일부만이라도)」
가벼운 방해 전파와 함께, 액정 위로 문장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마치, 책의 내용을 중간중간 요약한 것 같은 문장들이었다.
.
.
「또 이곳인가······.」
누구의 독백인지 너무나 명확한 문장들.
분명, ‘4차 수정본’의 내용이었다.
「3회차에서는 실책이 너무 많았다.」
「포세이돈의 출현은 예상 밖이었어.」
「개연성 문제를 더 생각했어야 했나.」
「신화 간의 관계성을 더 고려했어야······.」
언제나 그랬듯, 또 후회로 가득 찬 문장들.
아마 네 번째 수정본에서도 우리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만약, 그때 유상아가 아니라 이수경을 살렸더라면······.」
.
.
······뭐?
나는 액정의 스크롤을 내리다 말고 빳빳이 굳었다.
화면에 번개가 치더니 이내 흘러가던 문장들이 모두 지워졌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 잠깐만! 다시 보여줘! 방금 그게 무슨 말이야?”
문장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독자, ‘운명’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입다 물 어 니르 바 나」
츠츠츠츠츳!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니르바나의 목소리를 저지하는 [제4의 벽]의 힘.
문장들은 사라졌고, 빠르게 뛰던 심박은 급격하게 진정되었다.
초조하게 달아올랐던 머릿속이 정교하게 움직이는 시계처럼 차가워졌다.
이 침착함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노하고 싶을 때 분노할 수 없고.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할 수 없는 이 감정이.
“제4의 벽.”
[‘제4의 벽’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솔직하게 말해. 내 어머니가 위험한 거냐?”
[제4의 벽]은 답이 없었다.
······제길, 나는 가끔 이 녀석이 내 편인지 아닌지 모호할 때가 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비유.”
[······바앗.]
투명한 몸체로 나타난 비유가 슬픈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입을 열려다, 도로 다물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흔들립니다.]
눈을 내리깐 비유가 울먹거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혼란스럽던 퍼즐의 일부가 삐걱거리며 맞춰지고 있었다.
지나치게 빨리 돌아온 유중혁과, 뭔가를 숨기던 녀석의 표정.
어쩐지, 뭔가가 이상하다 싶었다.
성좌들이 내게 이상한 메시지를 보냈던 것도, 돌아온 유중혁이 ‘넥타르’를 집요하게 찾았던 이유도.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이 친구야. 네 어머니 아직 안 죽었으니까 걱정 마.]
목소리는 뒤쪽에서 들려왔다.
[······쯧, 누설하면 안 되는 정보였는데.]
작은 스파크와 함께 어둠에서 나온 이는,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성좌였다.
“디오니소스.”
[오랜만이야. 직접 보는 건 지난 연회 이후로 처음인가?]
성큼성큼 내 곁으로 다가온 디오니소스는 개연성으로 인해 새카맣게 탄 왼손을 탈탈 털며 해안 동굴의 바깥쪽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이 해역 전체를 지배하는 <올림포스>의 3대 주신 중 하나가 서 있었다.
해신(海神) 포세이돈.
포세이돈은 움직임이 없었지만, 그의 저변에는 무척이나 불길한 정적이 맴돌고 있었다.
계기를 기다리는 포식자처럼, 포세이돈의 눈이 대해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자신의 해역인지를 확인하듯이.
[방금 「개연성 적합 심사」가 시작돼서, 저 아저씨도 함부로 못 움직일 거야. 그래도 경거망동하진 마. 아찌가 널 열심히 찾고 있거든.]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치곤 제 옆에서 너무 진언을 남발하시는데요.”
[일단은 내 권능으로 여길 감추고 있는 상태니까 괜찮아. 안 들려 안 들려.]
잘 보니 해안 동굴의 입구에는 엎어 높은 와인 잔 같은 결계가 쳐져 있었다. 아마 이 결계가, 디오니소스와 나를 숨겨주고 있는 것이리라.
디오니소스는 포세이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단하지? 3주신의 위용이란······ 저게 바로 ‘신화급 성좌’야. 평범한 성좌들은 평생에 걸려도 도달하지 못할, 드높은 별자리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별.]
확실히,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저 ‘포세이돈’이라면, 언젠가 마계를 멸망시켰던 이계의 신격― ‘더 네임리스 미스트’의 분신도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창이 닿는 곳이, 곧 해역의 경계가 되리니」
포세이돈의 시선이 닿는 곳이 곧 바다가 되고 있었다. 바다에 있는 모든 산 것들이 그의 숭고 앞에 전율했고, 엎드렸으며, 어쩌면 저지르지도 않았을 잘못을 빌고 있었다.
심장 깊은 곳이 울렁거렸다.
[······넌 정말 대단하구나.]
“뭐가 말입니까?”
[저 아저씨를 보고서도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어. 어째서지?]
물론, 나도 두렵다.
다리가 떨리고, 현기증이 날 정도로.
하지만 그 보다도.
「김독자는,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이나 포세이돈의 위용을 감상하다가 대답했다.
“제 상상보단 못해서요.”
[상상? 하핫, 역시 넌 재밌는 녀석이야.]
“왜 날 돕는 겁니까? 당신은 <올림포스>일 텐데.”
[거야 내 마음이지.]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따악, 하며 디오니소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화면 하나가 나타났다.
아주 까마득한 상공에 일행들이 모여 있었다.
[아리아드네의 실]에 묶인 채, [헤르메스의 산책법]으로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일행들. 누락 된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설화급 성좌인 우리엘과 수르야도 물론 무사했다.
실로 영리한 도피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늘은 제우스의 영역.
아무리 포세이돈이라도, 해역의 경계를 하늘에 그을 수는 없다.
디오니소스가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안심하라고. 아무도 안 다쳤어. 때마침 헤르메스랑 아리아드네가······.]
“한 대 쳐도 됩니까?”
[······누구를?]
나는 말 없이 디오니소스를 노려보았다.
[나를? 왜?]
“몰라서 묻습니까?”
눈치 빠른 디오니소스가 재빨리 답했다.
[아, 그 화신 때문이구나. 그래, 미안하게 됐어. ······원한다면 쳐도 좋아. 대신 좀 살살 쳐줬으면······ 너도 이제 성좌니까 꽤 아플 거 아냐.]
나는 때리지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 하필 유상아 씨였습니까?”
[······이야기하자면 복잡해.]
해안 동굴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디오니소스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가 말을 고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다.
[이번 세계선에, ‘모이라이 3자매’의 특이한 예언이 내려왔었어.]
“특이한 예언?”
나를 흘끗 본 디오니소스가 그리스 시대의 연사처럼 대답했다.
[곧 ‘모든 것의 종말’이 찾아올 것이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도 몰라. 확실한 건, <올림포스>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였지. 그것 때문에 한동안 <올림포스>도 바빴어. 모든 시나리오는 언젠가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종말이 오는지는 알아야 했거든.]
디오니소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예언된 ‘종말’과 관련된 특이점을 몇 가지 찾아냈어. 개중의 하나가 너와 함께 있는 그 ‘회귀자’였지.]
“유상아 씨는 유중혁에 대한 감시책이었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래.]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꾹 참았다.
아직 디오니소스의 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녀석을 감시하던 중, 우리는 ‘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
“······.”
[운명에 저항하고, 성좌를 증오하며, <스타 스트림>을 믿지 않는 화신. 배후성을 고르지 않고 스스로 성좌가 되었으며, 심지어 어떤 성좌도 그 정체를 들여다볼 수 없는 존재.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특이점’이었지. 널 발견하고, 우리는 결심했어.]
디오니소스가 웃었다.
[너를 숨기고, 너를 이용하기로.]
그의 말투 곳곳에 희미한 설화의 잔재가 묻어 있었다.
지금껏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처음 옥수역에서 펼쳐졌던 짝수 다리― 「데우스 엑스 마키나」.
그리고 내가 위험해 빠질 때마다 나를 도왔던 개연성들.
[우린 너를 ‘멸망을 막을 단초’로 쓰고 싶었다. 그래서 그 유상아란 화신을 이용해 너희를 돕고 싶었어.]
[아레스가 했던 말이랑은 다르군요. 그 녀석은 절 없애고 싶어하던데요.]
[12신좌들은 이미 내분 중이야. 너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디오니소스의 전신에서, 황금빛 아우라가 솟아났다. 그것은 저 하늘의 왕, 제우스의 혈통만이 가질 수 있는 웅장한 격이었다.
[지금의 <올림포스>는 가짜야.]
마치 신하를 굽어보듯, 디오니소스의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인간의 제사장들이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신을 창조했듯, 올림포스의 신들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화를 창조했지. <기간토마키아>나 <헤라클레스> 같은 가짜 신화들을······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야.]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이런 시대를 끝내고 싶어. 그리고, 새로운 <올림포스>를 만들고 싶다.]
[설화,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반응합니다.]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설화가 그의 설화에 반응하고 있었다.
눈앞의 디오니소스는, 훗날 제우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될 후보 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계획은 그랬는데······ 저 생선 아저씨까지 출몰한 마당이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겠네. 아마 시나리오는 이대로 끝나게 될 거야.]
「개연성 적합 심사」가 시작되었다면, 높은 확률로 이번 시나리오는 무산될 것이다.
참가자들에겐 공헌도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돌아가겠지만,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없었던 일이 되고 말겠지.
아마도 포세이돈도 그 효과를 노리고 무리한 것일 터다.
자신의 격과 성운의 개연성을 희생해서라도, 그는 이 <올림포스>를 지키려는 것이다.
“아뇨, 아직 할 수 있는 게 남았습니다.”
[뭐?]
“이번 시나리오로 <올림포스>를 전복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신, 제가 도와드리는 대가로 ‘넥타르’를 좀 나눠 주십시오.”
[······넥타르? ······마침 조금 갖고 있기는 한데.]
나는 디오니소스에게서 넥타르를 빼앗았다. 그리고 개중 몇 방울을 찍어 혀에 가져다 대었다.
[처음으로 ‘성유액’을 섭취하였습니다!]
[성유액 ‘넥타르’가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올림포스>의 개연성이 당신의 망가진 화신체를 수복합니다!]
[당신의 모든 능력치와 스킬 이해도가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성유액의 힘인가.
평균 능력치 200을 상회하는 나조차 상승 효과를 받을 정도라니.
남은 ‘넥타르’를 품속에 갈무리하는 나를 보며, 디오니소스가 물었다.
[야, 너 아까 한 방에 나가떨어진 거 잊었어? 근데 또 싸우겠다고?]
“도와주실 겁니까?”
[미쳤어? 내가 도와도, 아니······ 12신좌 절반이 도와도 상황을 바꾸는 건 무리야. 너 생선 아저씨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 아직도 정신 못 차린 거야? 이 시나리오의 끝은 이미―]
“‘시나리오’의 끝은 정해져 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거신 브리아레오스는 말했다. [운명]은 피해갈 수 없다고.
전신 아레스도 말했다. 시나리오는, 결국 예정된 인과의 전개일 뿐이라고.
그래, 맞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끝이 정해져 있으면, ‘과정’에는 의미가 없습니까?”
[의미야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낭만론이야.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설화’로 기록될 뿐이라고.]
“실패한 설화는 모두 의미가 없는 겁니까? 실패할 것을 알아도, 끝까지 싸워낸 존재들의 설화는, 가치가 없습니까?”
[성좌들이야 그런 설화를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런 짓을 하는 존재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설화를 보고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다시 똑같은 설화에 도전한다면.”
디오니소스가 입을 다물었다.
“열 번을, 백 번을, 천 번을. 그렇게 수많은 성좌들이, 화신들이, 그 설화에 영향을 받아 다시 그와 같은 이야기를 살게 된다면.”
비록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수많은 존재들이 주어진 [운명]과 맞서기 위해 몇 번이고 용기를 내는 이야기가 쌓인다면.
그 도전을 보고 또 다른 방식으로 도전하는 ‘설화’들이 쌓인다면 어떨까.
“그때도, 실패한 설화는 무용한 것일까요?”
「무대화」는 절대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 신화 또한, 그저 만들어진 것일 뿐이기에.
디오니소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결국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이란 ‘많은 존재가 원하는 흐름’을 향해 흘러가는 법이다.
많은 존재가 원하는 이야기는, 언젠가 반드시 실현되게 마련인 것이다.
간신히 입을 연 디오니소스의 목소리가 묘하게 격앙되었다.
[그래서, 네가 그 처음이 되겠다는 거냐? 네가 그 첫 희생양이 되어, 시나리오 전복의 횃불이 되겠다?]
“아뇨.”
나는 웃었다.
“저는 그 마지막 횃불이 될 겁니다.”
[뭐?]
“이미 저보다 앞서서 무수히 실패했던 녀석이 있으니까요.”
나는 알고 있다.
저 포세이돈을 해치우기 위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달려들었던 존재를.
그러니까······ 지금, 저 포세이돈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존재······.
이런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