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332화
창은 검푸른 빛살을 남기며 날아갔다.
창에 실린 힘과 격은, 본래의 유중혁이 가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마 지난번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겪으며, 3회차의 유중혁도 ‘창’에 대한 이해도가 급상승한 모양이었다. 날아가는 창을 보며 내가 물었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네? 귀환자들은 어떻게 됐어?”
“······잡담은 나중에 하지.”
쏘아지는 창의 궤적을 피해 아레스가 신형을 물리고 있었다.
헤르메스처럼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지는 못하더라도, 아레스 정도면 저런 창을 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그 창에, 설화가 깃들어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리하여, 손끝을 떠난 창은 피할 수 없었기에」
하나의 설화가 감정을 갖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어떤 설화 전문가도 그에 대해 확실한 대답을 내놓진 못할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일이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설화의 파편, ‘전신(戰神)의 천적’이 ‘흉포의 군신’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이 세계선의 ‘헤라클레스’는 가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가짜’는 ‘진짜’가 되었고.
만들어진 설화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
완악한 아레스가 빠르게 허공을 선회한 순간, 창 역시 똑같은 속도로 허공을 선회했다. 수세에 몰린 아레스가 황급히 몸을 웅크리며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창은 그것조차 무시했다.
푸우우우욱!
끔찍한 피육음과 함께, 허벅지가 꿰뚫린 아레스가 고통스런 비명을 질렀다. 저 위대한 12신좌의 하나, 전쟁의 신이 신혈(神血)을 떨어트리며 바다로 추락하고 있었다.
“제가 제압하겠습니다!”
[강철화]를 해제한 후 지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로 아레스의 화신체를 가격했고, 설화를 토하며 튀어 오른 아레스의 화신체를 초월의 격을 드러낸 유중혁이 짓밟았다.
정말, 타이밍 좋게 유중혁이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지구 쪽은 다 정리된 거야?”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배틀 부츠에 짓밟힌 아레스가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몸부림쳤다.
하지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허벅지에 박힌 창이 그의 격을 구속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설화는 그만큼 집요하고 완강했다. 적어도, 저 강력한 12신좌를 60번 시나리오에서 무력화시킬 정도의 ‘격’.
모두 12신좌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이, 이 헤파이스토스 같이 생긴 놈들이······!]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인상을 찌푸립니다.]
나는 아레스의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적색 화살표를 보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냈다.
이번 시나리오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림포스> 측의 수장 둘을 처치해야 한다. 그리고 아레스는 그 둘 중 하나였다.
아마 눈앞의 아레스는 화신체이기에 정말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12신좌쯤 되면, 이 정도 급의 화신체를 상실하면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유중혁의 생각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시간이 없다······ 서두르면 살릴 수 있어. 넥타르(Nectar)가 필요하다.」
[흑천마도]를 아레스의 목에 겨눈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아레스, 넥타르를 가지고 있나?”
갑작스런 유중혁의 말에 당황한 것은 내쪽이었다.
······넥타르?
나도 그 아이템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베다>에 성유액 [소마]가 있다면, <올림포스>에는 [넥타르]가 있다.」
이 자식, 아직도 내공이나 강화 소체에 욕심을 내는 건가?
때마침 채널에 입장한 성좌들도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몇몇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성좌, ‘외눈 미륵’이 당신에게 지구의 위기를······!]
삐이이잇, 하는 소리와 함께 간접 메시지가 일거에 사라졌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다들 입을 다물라고 경고합니다.]
문득 머리 위를 보니 비유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바앗, 바앗······.]
―비유, 무슨 일이야?
하지만 비유는 대답이 없었다. 애써 내 눈을 피하는 모습.
모든 것이 미심쩍었다.
다른 도깨비도 아니고, 비유가 나한테 감추는 게 있다고?
그사이, 아레스가 입을 열었다.
[······네놈은 시간을 거스르는 존재. 불사의 축복을 받은 놈이 왜 ‘넥타르’를 필요로 하는 거지?]
“그런 것까진 대답할 의무가 없다. 다시 말한다. 넥타르를 내놔라.”
[네놈들의 동료 중 하나가 위험하다고 했지? 그래서 넥타르를 필요로 하는 거냐?]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아레스의 목을 살짝 파고들었다. 피슛, 하는 소리와 함께 흘러내리는 핏줄기. 핏줄기의 입자에는 적혈구와 백혈구를 대신해 그가 지금껏 쌓아온 설화들이 세밀히 흐르고 있을 것이었다.
아레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지금 나한테는 없다. 하지만 내게서 이 ‘창’을 뽑아준다면 ‘청춘의 여신’을 찾아가 넥타르를 줄 수도······.]
“없나 보군. 죽어라.”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그대로 아레스의 심장에 꽂혔다. 아레스의 화신체가 희미한 빛을 뿜으며 산화하기 시작했다. 아레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시나리오’로부터 회수하고 있는 것이었다. 분노한 아레스가 외쳤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다!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파스스슷, 소리와 함께 아레스의 화신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전장에서 이탈합니다.]
[<올림포스> 측의 수장 중 하나가 시나리오를 포기하였습니다!]
[당신은 ‘흉포의 군신’을 물리쳤습니다!]
[전설급 설화, ‘전쟁의 신을 패퇴시킨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으로 400,000 코인을 획득하였습니다!]
[주요 공헌자 : 성좌 구원의 마왕, 화신 유중혁, 화신 이현성]
어마어마한 보상과 함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기존의 <기간토마키아>에 새로운 설화가 추가됩니다!]
[‘흉포의 군신’의 화신체가 지니고 있던 아이템들 중 일부가 주요 공헌자에게 분배됩니다.]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에, 전장에 간접 메시지가 몰아쳤다.
[성좌, ‘바람의 원정왕’이 충격에 빠집니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전능의 태양’이 자신의 눈을 불신합니다.]
전장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이아손을 비롯해 <올림포스> 진영에서 싸우던 영웅들도, 그들에 맞서 싸우던 기간테스들도. 심지어는 둘 중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고 전장을 지켜보던 이들도.
올림포스의 전신(戰神)이 시나리오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그만큼이나 커다란 충격이었다.
[하하하하하핫! 이번 <기간토마키아>는 정말 재밌구나!]
전장을 종횡무진하며 영웅들을 상대하던 장비가 진언을 내뿜었다.
유중혁은 그런 소란에도 아랑곳 않고 죽은 아레스의 잔해를 뒤졌다.
“······역시 넥타르는 없군. 헤베를 죽여야 하는 건가······.”
“유중혁 이 미친놈아!”
나는 유중혁의 멱살을 붙들고 소리쳤다.
“무슨 짓이지? 놓지 않으면 죽이겠다.”
“그렇게 바로 죽여버리면 어떡해? 협박해서 성유물 하나라도 더 얻어내야 할 거 아냐!”
물론 나도 아레스를 죽여야 한다는 것엔 동의했다. 하지만, 화신체를 볼모로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뜯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한가롭게 굴 시간 따윈 없다.”
“‘넥타르’는 왜 구하는 건데? 그건 필요 없잖아? 어차피 <베다> 쪽에서 ‘소마’를 받기로 되어있었는데······.”
불길한 감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유중혁. 지금 지구는 어떻게 된 거지?”
“······.”
“설마 유상아 씨 상태가······.”
“지구는 무사하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기간토마키아>의 마무리에 집중해라.”
유중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게 아니니까.”
유중혁이 전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레스의 [헤라클레스]는 쓰러트렸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레스가 타고 있던 [헤라클레스]는 무수한 ‘거신병’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더럽게 많이 몰려오는군.”
쿠구구구구구!
아르고 호가 갈라놓은 바다의 길을 따라, 무수한 [헤라클레스]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양산형 [헤라클레스].
그 오랜 세월 동안, <올림포스>가 타 성운과의 전쟁을 대비해 준비해 놓은 거신병들이었다.
[거신 놈들을 찢어 죽여라!]
그들이 내뿜는 맹폭한 기세는 파도가 꺼진 지축을 흔들 정도였다.
이전이었다면, 그 기세에 겁먹은 거신들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경.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해방의 시간이다!]
[동지들이여! ‘헤라클레스’는 가짜였다!]
어느새, 포탈을 찢고 나온 이쪽의 또 다른 수장이 있었다.
브리아레오스.
백 개의 팔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개연성의 영향으로 이제 오십 개의 팔만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본연의 격은 대해에 맞설 만큼 경건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이미 기록된 신화가 아니라, 이곳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을 믿어라!]
그의 진언에, 모든 거신들이 함성을 질렀다. 유중혁이 말했다.
“네놈이 신화를 바꿔버렸군.”
신화는 그것을 믿는 자들을 지배하는 힘이다.
헤라클레스는 <기간토마키아>의 주역. 그런데 그런 ‘헤라클레스’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안 이상, 해당 설화는 거신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흔들리는 무대화가, 바로 그 증거였다.
부서진 무대 위에 새로운 무대가 만들어진다.
찢어진 각본의 페이지 위에는, 또 다른 각본이 쓰일 것이다.
하지만 유중혁의 표정에는 조금의 여유도 보이지 않았다.
“저들이 끝이 아니다. 새로운 신좌들이 온다.”
아레스는 12신좌들 중 겨우 하나일 뿐.
‘원작’의 내용이 맞다면, 이곳에 참전할 12신좌는 최소 둘이 더 있었다.
하나는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인 아테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능의 태양’ 아폴론.
유중혁이 망가진 플루토를 곁눈질했다.
“지친 네놈과 망가진 거신병으로는 신좌들을 상대할 수 없다.”
“너도 아직 12신좌와 일대일로 싸우긴 무리야.”
“해보지 않고선 모르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금의 유중혁이 12신좌와 정면으로 맞부딪쳐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 경우엔 꼼수에 운까지 따라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레스의 패퇴를 목격했으니 다른 신좌들도 전투 방식을 달리 해 올 거야. 자신의 격을 깎아 먹더라도, 개연성을 희생해올 가능성이 높아.”
“상관없다. 그 편이 더 할 맛이 나겠군.”
“너는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를 상대해.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까, 한 사람을 더 붙여줄게. 그럼 어떻게든 막을 수 있을 거야.”
“누굴 붙여준다는 거지?”
“곧 알게 될 거야.”
멀리서 허공을 격하고 날아오는 아테나와 아폴론이 보였다.
이 거리에서도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격’.
아레스전(戰)과는 확실히 다른 전투가 될 것이었다.
[흑천마도]를 고쳐쥔 유중혁이 물었다.
“‘전능의 태양’은 네놈이 상대할 건가?”
“그를 상대할 성좌는 따로 있어.”
“······네놈 꿍꿍이를 한 번 믿어보지.”
내 말과 동시에 유중혁이 창공으로 뛰어나갔다. 아름다운 선형을 남기며 사라지는 [주작신보]. 유중혁은 이제 완연한 초월의 경지를 누비고 있었다.
쐐애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가르는 [흑천마도].
정색한 아테나가 멈춰선 것과, 검붉은 마력의 충돌이 발생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비키세요. 아니면 죽습니다.]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 아테나.
<올림포스>의 지배자인 번개의 적통(嫡統)이자, <올림포스> 전역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전쟁의 신.
[신화에 조예가 있다면 알겠지만, 나는 아레스와는 다릅니다.]
같은 ‘전쟁의 신’이라도, 아레스와 아테나는 다르다.
양 신은 수많은 대리전(代理戰)을 치렀지만, 그 많은 대리전 중 한 번도 아레스는 아테나에게 승리한 적이 없었다.
아테나가 말했다.
[나는 당신들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내 목적은 거신들을 <타르타로스>로 돌려놓는 것뿐이에요. 하지만 계속해서 방해한다면―]
고결한 그녀의 표정에, 차가운 분노가 떠올랐다.
[정의의 이름으로, 그대를 단죄하는 수밖에 없겠죠.]
아테나는 자신이 한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
그 신이 진심으로 창과 방패를 들었다면, 그 분노를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올림포스> 전체를 뒤져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츠츠츠츠츳!
그때, 스파크와 함께 하늘에서 누군가의 진언이 들려왔다.
[아직도 그런 대사를 쓰는구나, 아테나. 같이 악마 ■가리 자르고 다닐 때도 그러더니······ 어째 변한 게 하나도 없네.]
나는 가까스로 숨을 돌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아테나는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성좌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올림포스>에 한정된 이야기.
쿠구구구구구구!
「<올림포스>에 정의의 아테나가 있다면.」
허공에서 화려한 불꽃이 강림하며, 새로운 화신이 전장에 참가했다.
순정한 백색의 불꽃이 가라앉자, 그 안에는 내가 잘 아는 이가 있었다.
「<김독자컴퍼니>에는, 정희원이 있다.」
내가 가진 최강의 검이, 마침내 <기간토마키아>의 전장에 등장했다.
[오랜만이야, 아테나.]
새하얀 백색의 날개를 펼친 우리엘이, 정희원의 전신에 강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