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331화 내 외침에 한순간 전장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와 거신병 ‘플루토’의 싸움. 병장기의 소환 의식에, 채널을 메우던 성좌들마저 긴장하는 눈치였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병기가 무엇일지 궁금해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강철검제’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내 빈손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왜 안 오는 거지? 뒤를 돌아보며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전장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이해도가 높은 몇몇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강철검제?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검을 쓰는 사람인가······.」 ······뭐? 「김 독 자는 몽 총 이이 다」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아차, 하는 심경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현성의 별명은 ‘순정강철’이었다. 「강철검제······ 멋진 이름이군. 독자 씨의 부름을 받다니.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사람이다.」 이아손과 힘겨루기를 하며 이쪽을 멀거니 보는 이현성. 나는 이현성을 향해 빽 소리를 질렀다. [현성 씨! 빨리 오세요!] “예? 저 말씀이십니까?” “빨리 가 멍청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한수영의 고함과 함께, 이아손과 힘겨루기를 하던 이현성이 기합을 내질렀다. 성흔 [태산 밀기]가 발동하며, 이아손의 덩치가 파도와 함께 뒤쪽으로 날아갔다. 콰콰콰콰콰! ······아니, 저런 힘이 있었으면 진즉에 사용하지. 지난 3년간 이현성이 얼마나 강해진 것인진 모르겠지만, 이 정도면 기대했던 것보다 더 쓸 만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저는 ‘강철검제’가 아닌데······.” [오늘부터 그렇게 불리게 될 겁니다.] “제,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나는 다가온 이현성을 재빨리 붙잡아 휘둘렀다. “끄아아아아악!” 전열을 갖춘 아레스가 [헤라클레스의 방망이]를 휘둘러왔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에 장착된 설화와 아레스 본연의 설화가 섞인, 무지막지한 일격. 네메아의 사자든 뭐든 일격에 때려잡을 수 있을 파괴력이었다. 나는 무식하게 달려드는 아레스를 향해 냅다 이현성을 휘둘렀다. “독자 씨! 독자 씨! 안 됩니다!” [괜찮습니다! 자신을 믿으세요!] 투콰아아아앙! 파도와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충격파에 입자화된 물보라가 안개로 화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이현성은 방망이와 자신의 몸을 맞대고 있었다. 꽈드드드득! [거봐요, 할 수 있잖아요.] “으, 으어, 으어어어······.” 이현성의 전신으로 [강철화]의 표피가 자라나 있었다. 자라고, 자라고, 또 자라서. 이내 하나의 검(劍)이 되어버린 모습. 아레스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척이 보였다. 만약 이곳에 유중혁이 있었다면, 분명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현성이 ‘강철검제’라는 별명을 갖게 된 진짜 이유다.”」 강철검제. 그가 검의 제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검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등장인물 ‘이현성’이 성흔 ‘강철화 Lv.10’을 발동 중입니다!] [강철화]. 저 먼 외우주의 성좌가 가진 성흔. 설화가 쌓일수록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한 강도에 도달하게 되며, 몇 번이고 부러져도 다시 재생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이현성은 살아있는 ‘최강의 명검’이나 다름없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의 만행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아무래도 검이 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이현성은 아직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나는 이현성의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현성 씨, 저기 헤라클레스가 쥔 방패 보이십니까?] “예······ 예에, 어엇, 저건?” [제가 전에 드렸던 ‘헤라클레스의 방패’의 원본이 저겁니다.] 언젠가, 나는 [헤라클레스의 방패]의 레플리카 버전을 이현성에게 준 적이 있었다. 이현성이 몇 번이나 닦아서 고이 사용했던 그 방패. [저거 현성 씨 드릴게요.] “······정말이십니까?” [그럼요.] 어느새 적응을 마친 이현성이, 자신의 몸을 거신병의 손과 일체화시켰다. 악수라도 하듯, 꽉 잡은 손처럼 완벽한 그립감.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엄청난 개연성 소모와 함께, 나는 다시 한번 아레스의 헤라클레스와 충돌했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을 주목합니다!] [<관리국>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이 이상으로 개연성을 남용하면 화신체가 위험해질 것입니다!] [강철검제]와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 박력에 놀란 아레스가, 한 걸음을 물러섰다. [······이런 미친놈이!]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저 단단한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의 일부가 파편이 되어 튀었고, 이현성의 [강철화]도 군데군데 균열이 갔다. 애초에 오래 지속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필사적이었다. 나도, 이현성도, 김남운도.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수르야와 싸울 때처럼 「무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나와 이현성이 함께했던 무대. 한때는 적이었던 김남운 또한, 이제 그 설화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열했던 영혼이, 강철의 거신으로 태어났으니」 스가가각! 마침내, [강철검제]의 칼날이 헤라클레스의 어깻죽지를 잘라냈다. 아레스가 으르렁대며 외쳤다. [왜 이렇게까지 덤비는 거지? <올림포스>는 늘 너에게 자비를 베풀어 왔다!] [자비? 그래서 나한테 그딴 [운명]을 씌웠냐?] [설마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겨우 그런 거라고?] [어차피 네놈은 살아났지 않느냐! 성공적인 시련을 겪게 해주었으니 고마움을 표하지는 못할 망정······!]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었다. [네놈들 때문에 내 동료가 죽어가고 있어.] [동료?] 검과 곤봉이 다시 한번 부딪치자, 아레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특이점의 감시자로 쓰던 ‘그 화신’ 말이군.] [‘그 화신’이 아니라 ‘유상아’ 씨다.] [그 화신은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게 아냐. 스스로 그 불행을 자초한 거지.] 아레스가 비웃듯 말을 이었다. [고작 필멸자가 <올림포스>의 데이터베이스에 접근하려 했으니, 그런 꼴을 당하는 건 당연하다.] 까아아앙! 나는 이를 갈듯 외쳤다. [그 힘을 준 건 너희들이잖아. 심지어 그런 상황을 자초한 것도, 너희들이었어.] [신은 지켜볼 뿐.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이지.] [예정된 인과를 두고 ‘선택’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아레스가 웃었다. [그것이 바로 ‘시나리오’다.] 차가운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는다. 그래, 이게 바로 성좌였다. 자극적인 시나리오를 원하고, 화신들의 타락을 즐기는 존재. 일부러 ‘선악과’를 만들어 두고. 인간이 금기를 어기기를 즐거이 기다리는 신. 고오오오오오오! 거신병 플루토의 몸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파크가 치기 시작했다. 방망이와 강철의 접합부에서 눈부신 마력의 격랑이 몰아쳤다. 아레스가 외쳤다. [이 미친 자식이······!] 「김독자는 분노했다.」 「그러나 그 분노와는 별개로, 김독자의 이성은 한없이 차가웠다.」 사실, 정면 대결로 아레스를 쓰러트리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곳은 아레스가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바다’였고. 모든 격을 방출할 수 없는 ‘하위 시나리오’였으며. 결정적으로, 아레스가 탄 ‘헤라클레스’는 거신병의 초기 모델이었다. 콰드드드득! 날아드는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플루토의 왼팔을 부쉈고, 동시에 [강철검제]의 칼날이 헤라클레스의 허리를 꿰뚫었다. 다급해진 아레스가 외쳤다. [이런 짓을 하면 네놈은 정말로 <올림포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된다······!] [누구든 오라고 해.] 하지만 올 수 없겠지. 12신좌는 모두 겁쟁이니까. [제우스든, 포세이돈이든. 누구든.] 츠츠츠츠츠츳! 휘두르는 [백청강기]에 밀려난 헤라클레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밀리는 상황에서도, 아레스는 자신의 격을 온전히 방출하지 않았다. 설화급 성좌라 해서, 모두가 ‘수르야’ 같은 것은 아니다. 진짜 <기간토마키아>가 있은 지 수만 년. 12신좌들은 목숨을 건 사투를 잊었다. 흉폭의 군신, 아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누구보다 용감한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챙긴다.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들을 집어 던지며 용맹을 과시했던 그는, 이제 하위 시나리오에서 격을 잘못 개방했다가 후폭풍을 맞을 것을 두려워하는 성좌가 된 것이다. 발악하듯 아레스가 외쳤다. [네놈은 개연성이 두렵지도 않느냐!] [두렵지 않아.] 이현성도, 나도, 김남운도. 그런 걸 두려워하는 이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줄곧, 그런 후폭풍을 헤치며 살아왔으니까. 오히려 약하기에 낼 수 있는 용기였다. 튀어 오르는 바다 거품과 함께, 나는 헤라클레스의 콕피트를 향해 강철검을 찔러 넣었다. [당신은 거신병 ‘헤라클레스’를 쓰러트렸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손상)’을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방패(손상)’를 획득하였습니다.] [성유물, ‘헤라클레스의 장창(손상)’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김남운!” 나는 폭발과 동시에 플루토의 콕피트를 벗어났다. 개연성의 제한치를 넘어선 플루토가 부서지고 있었다. [개 쩔었다······!] 김남운은 즐거운 듯한 목소리였다. 잠시 후, 개연성의 후폭풍을 견디지 못한 플루토의 전신이 붕괴했다. 나를 대신해 개연성을 감당한 결과였다. 다행히 동력부는 무사한 것 같았지만, 더이상의 전투는 힘들어 보였다. 희뿌연 연기 사이로, 나처럼 간발의 차이로 콕피트에서 빠져나온 아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전신에 상처를 입은 아레스가 분노의 고성을 토하고 있었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거신병 [헤라클레스]는 일종의 ‘방호구’일뿐. 이대로 아레스가 ‘격’을 개방하면, 나는 정면에서 놈을 상대해야 한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애초에 내 목적도, 녀석을 헤라클레스에서 내리게 만드는 거였으니까. “유상아 씨가 너에 대해 알려준 게 있지.” 아레스의 말대로, 유상아는 [헤르메스 시스템]을 사용해 온갖 미래 정보를 조사했다. 그리고 개중에는, <올림포스>의 비사에 관한 것도 있었다. “언젠가 너는, ‘헤라클레스의 장창’에 맞은 적이 있다던데.” 유상아는 말했다. 아레스는, 헤라클레스와 싸우다 그의 창에 허벅지를 찔려 달아난 적이 있다고. ―만약 ‘가짜’도 ‘진짜’가 될 수 있는 게 설화라면, 이 설화도 진짜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 ‘무기’만 구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아레스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궁금해지네. ‘헤라클레스’는 너희가 만들어 낸 존재인데······ 그렇다면 이 신화는 가짜일까, 아니면 진짜일까.” 기함한 아레스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말을 이었다. “<스타 스트림>에서 ‘가짜 설화’는 대체 얼마만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아?” [‘헤라클레스의 장창’에 깃든 설화 파편이 당신에게 반응합니다!] [설화 파편, ‘전신(戰神)의 천적’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창은, 단 한 번의 관통으로 전쟁의 신을 무력화시켰으니」 나는 남은 모든 힘을 다해 창을 집었다. 너무나 무거운 창이었기에, 나 혼자 제대로 던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제 눈앞까지 다가온 아레스. 제대로 던져야 한다. 만약 실패하면, 죽는 것은 이쪽이 될 테니까. 그 순간, 창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누군가 등 뒤에서 나와 함께 창대를 쥐고 있었다. 이현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구태여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만한 무게의 창을 가볍게 들 수 있으며, ‘멸살법’의 그 어떤 화신보다 만병(萬兵)에 능한 존재. 애초에 그런 ‘화신’은 아군 중 하나 뿐이다. “김독자, 기회는 한 번뿐이다.” 어떤 한 번은, 영원한 ‘한 번’이다. 회귀자의 ‘무수한 실패’로 만들어진 한 번. “내겐 늘 한 번뿐이었어.” 그러니, 이 한 번은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동시에 창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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