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330화
허공에서 소용돌이치는 포탈이 열렸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플루토의 사용권은 하데스에게서 따냈다.
나는 이번 <기간토마키아>의 한정으로, 플루토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
[하하하핫, 메뚜기남! 싫어하던 것 치곤 그 시동어 잘 외우네?]
장난스런 김남운의 목소리.
그러나 거신병은 곧바로 나타나지 않았다.
소용돌이치는 포탈 위로 보이는 것은 새카만 무저갱의 어둠뿐이었다.
[······근데, 10분만 기다려줄래? 지금 이쪽 소환진이 망가져서 당장은 못 갈 것 같거든. 거신들이 발구르기를 너무 많이 해서······.]
······이런 빌어먹을.
새하얀 김을 내뿜는 헤라클레스가 무표정한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
나는 앞으로 한 발짝 나서며 외쳤다.
“헤라클레스! ‘12과업의 대영웅’이시여!”
헤라클레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헤라클레스의 머리 위에는 적색 화살표가 깜빡이고 있었다.
[해당 성좌는 <올림포스> 측의 ‘수장’입니다.]
역시나, 녀석이 <올림포스>의 두 ‘수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기간토마키아>에서 거신들의 수장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멸살법’의 많은 성좌들은 이야기했다.
「“헤라클레스가 있는 한, <기간토마키아>의 승자는 바뀌지 않는다.”」
헤라클레스를 처음 보는 무수한 화신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헤라클레스! 헤라클레스다!”
무수한 전승과 신화를 남긴 올림포스의 대영웅, 헤라클레스.
그 많은 설화들이 <스타 스트림> 전역에 울려 퍼짐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를 실제로 본 화신이나 성좌는 손에 꼽았다.
그가 신과 인간의 혼혈인 반신(半神)이라느니.
강철로 빚은 육체를 가졌다느니.
<올림포스>의 수호자라느니 하는 이야기만이 떠돌 뿐.
[설화, ‘네메아의 사자를 목 졸라 죽인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거대 멧돼지를 두들겨 팬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설화, ‘켈베로스를 맨손으로 제압한 자’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설화들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언뜻 보기만 해도 미친 설화들이라는 게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최소 전설급 이상의 설화들.
축적한 ‘거대 설화’의 격도 나와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시작한 게임은 아니었다.
“역시, <스타 스트림>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는군요.”
도발하듯 던진 내 목소리에, 헤라클레스의 집채만한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찰나의 사이를 두고 [소형화]와 [전인화]가 발동했다.
머리끝을 스쳐간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내가 서 있던 지상을 작살내며 크레이터를 만들었다.
그 무식한 힘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나는 도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주먹질 하나는 쓸 만하군요. 이 정도로 거신들을 제압했다기엔 뭔가 미심쩍지만 말입니다.”
마치 분하다는 듯, 헤라클레스의 몸 안에서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당신에 관한 전승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네메아의 사자를 잡았다느니, 히드라를 베어 죽였다느니, 스팀팔로스의 새를 사냥했다느니······. ‘한 사람’이 단기간에 이루었다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설화들이죠.”
그리고 마침내, 헤라클레스의 몸속에서 진언이 터져 나왔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나 ‘헤라클레스’다!]
듣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목소리.
틀림없이 12신좌에 준하는 격이었다.
하지만 그로서, 나는 더욱 강한 확신을 마쳤다.
“당신은, <기간토마키아>를 위해 태어난 존재란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신의 12과업들은 모두 <기간토마키아>의 승리를 위해 주어진 시련이었고요.”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걱정합니다.]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20미터가 넘는 체고의 괴물이 그런 짓을 하니, 가히 장관이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제 친한 동료 중 하나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꾹 누르며 말을 이었다.
“‘본래 헤라클레스는 ‘대홍수’ 시대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보다 이전에 발생했던 <기간토마키아>에 참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 말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유상아였다.
채널 내의 성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부라린 헤라클레스가 진언을 발했다.
[오만방자한 놈! 이 헤라클레스가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것이냐?]
“응. 너뿐만 아니라, 12신좌 전체가 말이지.”
내 즉답에 헤라클레스가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너무 많은 ‘거짓 설화’를 만들었어. 심지어 연대까지 조작하면서 말이지.”
헤라클레스의 표정에, 명백한 당황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도 황당하더라. 너희처럼 헛소리를 지껄이고, 지껄이고, 또 지껄이다 보면······ 언젠가 그게 ‘진짜 설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게.”
천 년, 이천 년.
수천 수만 년동안 반복된 거짓말.
“심지어 일단 설화가 된 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원래부터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는 게······ 이야기라는 거, 참 신기하지 않아?”
[나는 헤라클레스다! <기간토마키아>의 영웅이자, <올림포스>의 상징인 헤라클레스다!]
“그래, 어느 세계선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다른 세계선 어딘가에는, 진짜로 네메아의 사자와 히드라를 때려잡은······ 그런 영웅이 있을지도 몰라.”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흥미로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863회차를 여행하며, 내가 스쳐갔던 무수한 유중혁의 회차를 떠올렸다.
“그런데 이 세계선은 아냐. 이 세계선에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은 존재하지 않아.”
[네놈!]
“왜냐하면 헤라클레스는, 너희가 만든 ‘설화 병기’의 이름이니까.”
번개의 신 제우스는 <기간토마키아>를 대비하여 자신의 씨를 뿌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여기서의 ‘씨’는 은유였다.
거신들의 옹립을 두려워한 제우스는, 세계선을 넘나들며 잡다한 영웅 설화들을 수집했다.
「네메아의 사자」
「황금 뿔 사슴」
「크레타의 황소」
「아홉 머리의 히드라」
······.
그는 설화들을 모아, ‘단 하나의 인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이내 하나의 ‘설화 병기’로 형상화되었다.
인간의 영혼을 동력으로 삼아, 오직 ‘거신’과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스타 스트림>의 공포이자, 수많은 전장에서 학살의 공포를 불러온 병기.
“거신병(巨神兵), 헤라클레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놀랍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올림포스>의 만행에 분개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표정을 차갑게 굳힙니다.]
[성좌, ‘정의와 지혜의 대변자’의 동공이 흔들립니다.]
[다수의 성좌가 ‘헤라클레스’의 정체에 충격을 받습니다!]
아마, 이 이야기들은 대부분의 성좌들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이건 ‘멸살법’을 읽은 나와, 헤라클레스를 만들어 낸 극소수의 12신좌들만이 아는 진실이니까.
[다수의 성좌들이 #BY-9158 채널에 입장합니다!]
채널에 성좌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비유가 끼잉하고 작게 울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기간토마키아>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갖습니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무대가 완성되려 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신화 정체성이 흔들립니다.]
[‘헤라클레스’의 정체가 「무대화」의 재현에 영향을 끼칩니다.]
나는 헤라클레스를 노려보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특성 효과로 상대방의 대략적인 설화 구성을 파악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전쟁을 위해 태어난 전쟁의 신」
「오른손에는 ‘공포’와 왼손의 ‘불안’을 쥔 채」
「눈앞의 ‘투쟁’을 헤쳐 걸어간 길목마다 ‘불화’를 남겼으니」
거신병 헤라클레스의 몸피 사이로 흘러나오는 성좌의 설화.
그것은 헤라클레스의 설화가 아니었다.
헤라클레스는 거신병.
그렇다면, 그 안엔 누군가 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는 비웃듯 진언을 발했다.
[‘흉포의 군신’이여! 네놈은 ‘거신병’ 뒤에 숨어 싸우는 겁쟁이였나?]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강풍이 불어닥쳤다.
주변에서 혈전을 벌이던 영웅들과 성좌들이 단번에 수십 미터나 밀려났다.
나 역시 [책갈피]로 [바람의 길]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수평선까지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아레스가 입을 열었다.
[<올림포스>에서는 예로부터 말이 많은 녀석들이 안 좋은 꼴을 당하지. 오이디푸스도, 프로메테우스도. 그 누구도 예외는 없었다.]
겉으로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것과 달리, 뜻밖에도 ‘흉포의 군신’ 아레스의 진언은 침착했다.
[그리고 너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도 말이 많구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헤라클레스가 나를 향해 주먹을 내리찍는 순간.
츠츠츠츠츠츳!
10분이, 모두 지났다.
콰아아아아앙!
허공에서 나타난 ‘거신병 플루토’가, 헤라클레스의 주먹을 받아냈다.
나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날아올라 플루토의 콕피트로 스며들었다.
[‘거신병 플루토’가 당신의 탑승을 확인합니다.]
[‘거신병 플루토’가 마스터의 별자리를 확인하였습니다.]
[‘거신병 플루토’와 당신의 설화가 동화됩니다.]
전신을 아늑하게 감싸는 거신병의 품. 마치 부드러운 근육이 전신을 감싼 듯한 느낌과 함께 눈을 뜨자, ‘거신병’이 보는 시야가 그대로 보였다.
화신체를 충만하게 감싸는 ‘설화 병기’의 힘.
이것이 바로 ‘멸살법’ 최강의 설화 병기 중 하나, [거신병 플루토]였다.
[······웩! 우엑! 웩! 뱃속에 기생충 같은 게 들어온 느낌이야!]
김남운이 호들갑을 떠는 사이, 한수영이 [한낮의 밀회]를 통해 말을 걸어 왔다.
―야, 할 수 있겠어? 같은 거신병이라도 저건 ‘헤라클레스’야. 네가 가진건 고작 ‘김남운’이고.
거신병의 급은 거신병의 재료로 사용된 ‘영혼’의 질적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
그리고 본래 플루토의 엔진으로 사용될 영혼은 김남운이 아니었다.
즉, 지금의 ‘플루토’는 원작의 ‘거신병 플루토’보다는 훨씬 약한 상태였다.
―김남운도 꽤 쓸 만해.
―마계에서 [공장]을 부술 때랑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할 수 있어.
―진심이야?
―원래였다면 무리였겠지만······ 너한테 좀 배웠거든.
―······나한테?
나는 그대로 헤라클레스를 향해 돌진했다. 플루토의 체고에 맞게 체고를 증폭시킨 헤라클레스도 나를 향해 마주 달려왔다.
네 개의 손이 부딪치며, 엄청난 풍압이 바다 일대에 소용돌이를 만들어 냈다.
헤라클레스와 비등한 수준의 힘을 보이는 플루토의 저력에, 아레스는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거신병? ······어디서 그걸 손에 넣었지?]
“나도 너희처럼 여기저기서 사기 좀 치고 다녔지.”
‘마왕 선발전’이 끝난 직후부터, ‘1863회차’에 다녀오기까지.
나는 내내, 이 <기간토마키아>를 준비해왔다.
신생 성운이 확고한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찬스이자, 거슬리는 거대 성운들에게 제대로 경고를 날릴 수 있는 기회.
「김독자는 ‘멸살법’을 읽고, 또 읽었다.」
원작을 바꾼 만큼, 미래는 불확실해졌다. 그렇다고 1863회차의 한수영처럼 [예상표절]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앞으로 예상 가능한 전개를 ‘창작’하는 것은, 한수영 같은 작가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나에게, 1863회차의 한수영은 말했다.
―무슨 소리야? 넌 독자잖아.
독자.
작가의 글을 읽고, 감상하는 존재.
―작가님, <올림포스> 신좌들의 고증이 조금 부족한 게 아닐까요? 아레스는 묘사된 것보다 훨씬 폭급하고 인간들을 얕보는 신인데······.
―게다가 이런 식이면 12신좌들이 개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연성은······.
그리고, 그런 작가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
꽈아아아아앙!
헤라클레스의 주먹이 플루토의 머리에 꽂히고, 플루토의 주먹이 헤라클레스의 흉부에 작렬한다.
이어지는 난타전 속에, ‘멸살법’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감상들이 흘러갔다.
―제 생각엔 하위 시나리오로 내려온 성좌들이 너무 불리한 것 같은데······.
나는 ‘작가’가 아니다.
때문에 한수영처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나는 이 ‘원작’의 허점들을 잘 꿰고 있다.
어쩌면 소설을 쓴 작가 본인보다도.
[놀이는 여기서 끝이다.]
거신병 헤라클레스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세가 달라졌다. 사자의 머리를 부순 거력이 거신병의 양팔에 집중되며, 헤라클레스의 성유물인 [헤라클레스의 방망이]가 소환되고 있었다.
나 역시, 그에 맞선 일전을 준비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왕의 ‘격’을 개방하였습니다!]
[전인화]에서 비롯된 백청의 강기와 마왕의 격. 그 위에 <김독자 컴퍼니>의 거대 설화가 얹어졌다.
나는 지금껏 숨겨왔던 모든 설화를 폭발시켰다.
내가 방출한 설화는, 플루토의 버프 효과로 인해 어마어마한 수준의 격으로 증폭되고 있었다.
아레스가 대경했다.
놀라기도 하겠지.
실제로 나는 무리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츳!
아직 내 ‘격’은 12신좌들과 맞서기엔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95번 시나리오를 다녀오며, 내 ‘격’의 총량은 동급의 화신이나 성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적어도, 60번 시나리오의 제한치를 넘을 정도로.
[당신이 발출하는 ‘격’이 시나리오의 제한치를 넘어섰습니다!]
60번 이후의 시나리오는 개연성의 후폭풍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다.
잘못하면, 격의 발현과 동시에 화신체가 소멸해버리는 재앙을 겪을 수도 있다.
나는 스파크를 견뎌내며 이를 악물었다.
성운 <올림포스>는 지금까지 나에게 여분의 개연성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그렇기에, 이 <기간토마키아> 같은 대형 시나리오에 사용할 개연성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레스의 ‘격’은 일정 수위 이상으로 상승하지 않고 있었다.
[멍청한 놈! 그런 짓을 하면 네놈도 죽는다!]
[죽겠지.]
물러서는 아레스를 보며, 내가 말했다.
[그런데, 네가 먼저 죽을 거야.]
나는 텅 빈 플루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신병의 힘은 너무나 강력해서, 어지간한 무기로는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없다.
적어도 [헤라클레스의 방망이]에 필적할 무기가 내게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 나는 그런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 순간만을 위해 아껴왔던 무기가.
[오십시오, 강철검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