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화

312화 후두둑 떨어지는 천장의 파편을 보며, 정희원은 고요히 먼지 속을 응시했다. 부유스름한 시야 사이로 쓰러진 한수영의 모습이 보였다. ‘멸악의 심판자’ 대 ‘흑염마황’.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대 ‘심연의 흑염룡’. 한반도의 모든 성좌들이 고대하는 전투였지만, 정작 당사자들의 표정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흙먼지 사이로 발을 내딛은 정희원은 [심판자의 검]으로 쓰러진 한수영을 겨눈 채 말했다. “연기는 그만두시지 그래.” 한수영의 모습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날카로운 파공성. 정희원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며 자신의 뒤쪽으로 검을 찔렀다. 금속이 부딪치는 파찰음. 붕대를 푼 한수영의 오른손이 새카만 어둠을 품은 채 [심판자의 검]을 받아내고 있었다. “······안 속네?” “네가 아바타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어.” [심판자의 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넌 ‘첫 번째 사도’니까.” 꽈아아아앙! 격과 격이 충돌하며,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귀살]을 발동한 정희원의 두 눈에서 붉은 귀화가 일렁였다. [귀살]은 사용자의 공격력을 증강시키는 대신, 불안한 감정 또한 강화시킨다. 슬픔은 고조시키고, 분노는 증폭시킨다. “충무로에서 일행들을 공격했던 것도 너였지.” [깃발 쟁탈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충무로에서의 전투. 그것이 한수영과 일행들의 첫 만남이었다. “그때 지혜랑 길영이는 죽을 뻔했어.” “······네가 죽을 뻔한 것도 아닌데 왜 성질이야? 심지어 넌 그때 거기 있지도 않았잖아?” “없었으니까 화가 나는 거야. 있었다면, 널 그냥 두지 않았을 테니까.” 허공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깃발 쟁탈전] 당시 벌어졌던 일들이 홀로그램 영상으로 투사되고 있었다. 아마도, 당시 채널에 없었던 성좌들을 위한 도깨비들의 서비스일 것이다. 사도들의 습격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이지혜와 이길영의 모습. 한수영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말했다. “그래서, 지금 날 죽이겠다고?” “넌 믿을 수 없어.” 한수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희원의 분노가 타당하다는 것을, 한수영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분명 그녀는 ‘첫 번째 사도’였고, 한때는 일행들의 적이었다. 2년 전의 어느 날. 한수영이 ‘첫 번째 사도’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왜 그런 소문이 퍼졌는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한수영이 딱히 소문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죄책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이만하면 됐겠지 싶은 비겁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한수영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일행들의 태도뿐이었다. ―뭐, 지난 일이니까요. ―진짜요? 누나가 그때 목 잘린 채 말하던 사람이라고요? 신기하다. [깃발 쟁탈전] 당시 가장 크게 다쳤던 이지혜와 이길영은, 오히려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들이었다. 이미 그녀가 ‘첫 번째 사도’인 것을 알고 있었던 유상아는 조용히 눈을 감았고, 유중혁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정희원은 달랐다. “넌 제대로 속죄해야 해.” “그러니까, 왜 네가―” “그런 식으로 대충 넘어가면, 그 애들이 받은 상처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아?” “······.”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화합을 깨기 싫어서 속으로 참는 것들이 있다. 주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수영, 어른이 되었으면 나잇값을 해. 철없이 굴지 말고.”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한수영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분노합니다.] “까고 있네. 네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줄 알아? 멋있는 척하는 건 좋은데, 때와 장소는 가려가면서 해. 김독자는 지금 네가 이러는 거 좋아하지 않을 걸?” “독자 씨랑은 상관 없는―” “너, 자기 입으로 말했잖아. ‘김독자의 검’이 되겠다고.” 그 말에, 처음으로 정희원이 입을 다물었다. 한수영이 조소했다. “검이 되었으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지?” “미안하지만.” 바닥에 가라앉은 먼지들이 불꽃을 튀겼다. 정희원의 검이 움직이는 궤적을 따라, 허공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검은, 제멋대로라서 말이야.” 정희원의 [지옥염화]가 불을 당겼다. “내가 누구를 벨지는 내가 정해.” [심판자의 검]이 한수영을 겨누었다. “이제 장난은 끝이야, 한수영. 전력으로 덤벼.” [화신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요청하였습니다!] * 화면 속에서 몰아치는 [흑염]과 [지옥염화]의 불길을 보며, 나는 탄식했다. “······그래서 싸우는 거였군.”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했다. 한수영의 정체는 꽤 오랫동안 감춰졌었지만, 그게 언제까지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차라리, 47번 시나리오로 가기 전에 비밀이 밝혀진 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이 시나리오는 서로가 진솔하게 부딪치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 어설프게 숨긴 비밀은 도깨비에게 폭로되어 시나리오의 재료가 될 뿐이다. 유중혁이 물었다. “저대로 둘 셈인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해서 끼어들려면 끼어들 수도 있었다. 화면 속에서 당황한 정희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 일부가 요청에 반대하였습니다!] [반대 1표로 ‘심판의 시간’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옆을 보자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대로 둘 리가 없잖아.” 물론 두 사람의 싸움을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저 둘의 싸움이 성좌들의 대결로 번지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들의 싸움에 성좌들이 개입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개입에 못마땅해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마지못해 납득합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우리엘에게서는 답변이 없었다. 아직 채널에 접속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은 모양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저대로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아니, 안 그럴 거야.” “······너는 지난 3년을 모른다. 저 둘은 사이가 몹시 나빠.” “그래 보이네.” 내가 너무 태연하게 굴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네놈은 동료가 죽기를 바라는 건가?” “아니.” “아니면 예언의 힘으로 미래를 본 건가?” “난 예언의 힘 따윈 없어. 아직도 그런 걸 믿고 있냐?” 나는 화면 속에서 싸우는 한수영과 정희원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자 유중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미래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도 모자랄 상황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이 끼어들 틈은 없다.” 녀석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지금의 내 모습은 대책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1863회차의 한수영과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예상 표절] 설화를 가지고 있으며, 1863회차의 유중혁과의 협업을 통해 온갖 정보들을 수집하고, 계산하여 미래를 읽어냈던 한수영. 나는 그런 한수영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 이야긴 말이 안돼.”」 [예상 표절]은 훌륭한 설화였고, 유중혁의 지식도 아주 유용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95번 시나리오에서 김남운을 포함한 모든 일행들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야기를 바꾸며 무수한 변수들이 발생했을 것이고,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다. 한수영과 유중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들은 ‘멸살법’의 작가가 아니다. 절대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냐? 솔직하게 말해. 뭔가 다른 비밀이 있는 거지?”」 한수영은 그런 나를 가엾다는 듯, 우습다는 듯, 혹은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었어.”」 「“뭐?”」 「“내가 만든 등장인물들을 믿었어. 그게 다야.”」 지극히 표절 작가다운 그 대답에, 내가 뭐라고 말했던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유중혁, 난 인간을 믿는 게 아냐.” 검과 주먹이 부딪치고, 불길이 불길을 녹였다. 피를 흘리고, 고함을 치며 서로를 향해 달려드는 정희원과 한수영을 지켜보았다. 그들을 보며, 나는 한수영이 95번 시나리오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비밀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았다. “저 사람들이 쌓아온 ‘이야기’를 믿는 거야.” 화면 속에서 다시 한번 굉음이 일었다. 연이은 충돌에 두 사람이 숨을 헐떡였다. 먼지 구덩이를 나뒹굴고, 복부를 가격하거나 머리카락을 베고. 그 숨 막히는 혈전을 거치며, 두 사람의 표정이 변하고 있었다. ―내가 어지간히 미운가 보네. ―단지 그것만은 아냐.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아도 그들의 마음이 들릴 것 같았다. 이제껏 함께 싸워온 두 사람의 역사가 마주하고 있었다. 일행들은 지난 3년간 무사히 살아남았다. 결코 협력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3년이었다. 28번 시나리오에서 ‘사스콰치’를 상대할 때도. 35번 시나리오에서 ‘알곤킨의 뱀’과 마주했을 때도. 두 사람은, 생존을 위해 서로의 등을 지켰을 것이다. 몇 번이나 서로의 목숨을 구하고, 지친 손을 끌어 서로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정희원도, 한수영도 알고 있다. ―단지······. 정희원은 강하다. 세계의 화신들을 모두 손꼽더라도, 지금의 정희원을 능가하는 화신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한수영이었다. 주특기인 [심판의 시간]마저 봉쇄당한 상황이라면, 승부의 향방은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애들한테, 제대로, 사과하라고······. 비틀거리던 정희원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온 속에 일렁이는 방 안의 정경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한수영은 쓰러진 정희원의 몸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허리를 숙여 그녀를 업었다. 아주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한수영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저게, 한수영의 마지막 자존심이겠지. 그녀의 발치에 흰 빛을 내뿜는 별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수영은 그 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발로 휙 걷어찼다.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경과했습니다.] [화신 한수영과 화신 정희원이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고개를 든 한수영이 화면을 넘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훔쳐보니까 재밌냐? 나는 다른 화면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이길영······ 그만 항복하시지? ―싫어! 너나 항복해 신유승! 한 방에 들어간 이길영과 신유승이 서로의 팔을 꼬집은 채 울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조금 특이한 풍경의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설화, 이지혜 그리고 이현성이 함께 들어간 방이었다. ―이 방 진짜 재미없다. 그쵸 언니? ―······그러게. ―현성 아저씨. 코 그만 골고 일어나요. 시간 다 됐대요.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별’이 장식대 위에서 외로이 빛나고 있었다. 너무 평화로워서, 정말 시나리오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죄송합니다, 성좌님들. 제가 방을 잘못 배정해서······.] 아무래도 잘못 배정된 방은 저쪽이었던 모양이다. [화신 신유승과 화신 이길영이 ‘우정’을 증명했습니다.] [화신 이현성과 화신 이설화, 화신 이지혜가 ‘신의’를 증명했습니다.] [성운의 모든 소속원들이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메인 시나리오 #46 ― ‘별자리의 맥락’이 완료되었습니다.] [성운의 소속원 중 누구도, 서로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클리어 형태에 맞는 보상이 준비됩니다.] 이곳에 똑같은 설화를 쌓은 사람은 없다. 모두가 다른 역사를 살았고, 다른 맥락에서 이해된다. 눈부신 빛살과 함께, 주변으로 일행들이 소환되고 있었다. 신유승, 이길영, 이현성, 이설화, 이지혜, 한수영, 정희원······. 나와 함께 이곳까지 와준 사람들.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를 보며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독자 씨.” “언니들, 괜찮아요? 대체······.” 일행들이 서로를 부축했다. 정희원이 희미하게 웃었고, 한수영은 앞꿈치로 바닥을 툭툭 찍었다. 나는 그런 한수영을 보며 피식 웃었다. 쿠구구구구. 고개를 들자, 하늘이 열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탄성을 흘렸다. “아······.” <스타 스트림>의 하늘이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경이로운 우주의 정경. 압도적인 풍경에 몇몇 일행들이 몸을 떨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을 것만 같은 그 아득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유승이 내 오른 소매를 붙잡았고, 이길영이 내 왼손의 손가락들을 쥐었다. 이어서 이지혜가, 한수영이, 이현성이, 그리고 정희원이. 마지막으로 이설화와 유중혁이 빙 둘러섰다. “······이거 그때 오징어들 대형이랑 비슷한데?” 이지혜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리고 다음 순간. 밤하늘 속에서, 작은 별 하나가 빛났다. 「구원과 마왕의 사이.」 그 빛을 받아 몇몇 행성들도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악마와 심판의 사이.」 「강철과 주인의 사이.」 「심연과 흑염룡의 사이.」 텅 비어 있던 우주의 사이사이를 잇는 새하얀 선들이 보였다. 서로 결코 만날 일이 없을 것만 같던 별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수식언의 맥락’을 이해했다. 아마 일행들도 나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유승이 말했다. “······예쁘다.” 별과 별 사이에 이야기가 있었다. [성운 <김독자 컴퍼니>가 46번 시나리오를 돌파하였습니다!] 아직 성운의 별자리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그리고 그 빈 자리들 중 하나는, 유상아의 것이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가죠.” 두둥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곧 우리는 하나의 빛이 되었다. 무수한 <스타 스트림>의 별들이 곁을 스쳐 지나가고, 멀리서 광대한 성간도시의 정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여기까지 왔다. <올림포스>. <베다>. <파피루스>. 차곡차곡 쌓인 원한들이 내 안에서 들끓고 있었다. 잊지 않았다. 하나도. 슈우우우우우우―! 눈부신 빛이 잦아든 곳에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놀랍게도, 성간 도시의 출입구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빛살 속에서 흔들리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