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화

311화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 그것은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내게 전해준 설화였다. 츠츠츠츠츳······!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설화’에 경악합니다.] [성운 <아스가르드>가 당신의 설화를 주목합니다.] [성운 <베다>가 당신의 설화를 주목합니다.] 무려 성운 규모의 주목을 받는 설화.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설화는 무려 ‘신화급 설화’인데다, 심지어는 ‘거대 설화’의 일부를 대체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유중혁의 동공에도 파문이 일고 있었다. “어떻게······.” ‘영원불멸의 지옥도’는 1863번에 달하는 회귀를 통해 쌓은 유중혁의 ‘역사’를 잠깐이나마 빌려올 수 있는 설화. 손아귀에 쥔 창에서, 내 것이 아닌 힘이 느껴졌다. 이 ‘설화’로는 유중혁의 스킬이나 성흔을 빌려올 수는 없다. 하지만 유중혁의 진짜 힘은 시스템을 통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초월좌의 수련을 통해 체화된 것이다. 「그 창을 손에 쥐기 위해, 유중혁은 수십 년 동안 단 하나의 초식을 단련했다.」 41회차의 유중혁. 녀석은 파천검성을 찾는 대신, 사라진 <제0 무림>의 유산을 찾았다. 이미 오래전에 멸망해버린 세계의 무공. 멸혼신창(滅魂神槍). 무림 최강이라는 [파천검도]에 비견할 수 있는 극강의 마공(魔功). 41회차의 유중혁은 이 창 한 자루로 귀환자들을 멸살했다. 아마 3회차의 유중혁도, 이 힘을 알아볼 것이다. 이것은 녀석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무공 중 하나였으니까. “맞아, 네가 익히려 했던 힘이야.” 나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창을 쥔 손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떨렸다. 과도하게 집적된 격. 겨우 41회차. 그 41회차에, 유중혁은 이미 이런 경지에 올랐다. 쿠구구구구! 스킬이나 성흔을 넘어서, 인간 유중혁이 자신의 삶을 바쳐 축적한 힘. 이것이 바로 ‘초월좌의 격’이었다. 밀려오는 현기증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육체적 부하보다 정신적 부하가 더 컸다. 하지만 이 하중이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이라면.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 중입니다!] 나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덤벼라, 유중혁.” 설화 속 유중혁이 자세를 취한다. 성유물인 [옹호극]이나 [백뢰신창]이 있었다면 더 제대로 싸울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이 ‘그림자 창’으로도 충분했다. 충분하다고, 나에 의해 초환된 가상의 41회차 인격이 말했다. 「나약하군. 회귀하기 좋은 꼴이다.」 유중혁은 약해졌다. 아마도 내가, 녀석을 약하게 만든 것이다. “제대로 안 덤비면 죽일 거다.” 그 말과 함께 유중혁의 전신에서도 초월의 격류가 몰아쳤다.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유중혁도 눈치챈 것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격과 격이 충돌하며 굉음을 일으켰다. 자욱하게 솟은 먼지 사이로 [멸혼신창]의 창영(槍影)이 수십 수백 갈래로 분화했다. 까가가가가강! [파천검도]는 [멸혼신창]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스킬도 아니었고, 성흔도 아닌 힘. 41번에 달하는 회귀 속에서 만들어진, 노력으로 형상화된 역사. 콰콰콰콰콰! 폭발하는 [멸혼신창]의 창광(槍光)에 유중혁의 몸 곳곳에 상흔이 나타났다. “이것밖에 안 되냐? 지난 3년 동안, 겨우 이 정도냐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고갈되어가는 마력에 어지럼증이 도졌다. 그럼에도 나는 지껄였다. 녀석을 도발하기 위해, 더욱더 자극적인 말들을 내뱉었다. 유중혁의 상념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때 ‘절대왕좌’를 차지했다면 어땠을까.」 흘러넘치는 후회 속에서, 유중혁은 물러나고 또 물러났다. 「만약, 내가 더 노력했더라면.」 물러서고, 또 물러서고. 그렇게 끝없는 물러섬 끝에, 유중혁은 언제나처럼 막다른 벽에 도달했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벽. 나는 그런 유중혁을 향해 창을 찔렀다. 쇄도하는 창극이 유중혁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너는 노력했다.」 유중혁의 동공이 커지며, 간발의 차이로 창극을 피해냈다. 벽에 틀어박힌 창을 보며, 유중혁이 몸을 떨었다. 창극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충분치 않았을 뿐.」 유중혁의 떨림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가라앉고, 차가운 심상이 망막 속에 똬리를 틀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화신 ‘유중혁’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유중혁이 다시 검을 들었다. [멸혼신창]의 창극이 허공을 가르자, [파천검도]의 검강이 그 궤적 위에 겹쳐졌다. 새파란 불꽃이 튀기며, 유중혁은 내가 아니라 ‘창’을 바라보았다. 충돌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주변의 시공간도 변화했다. 초월의 시간이 열리고 있었다. 「네가 내게 신유승을 보냈었지.」 「맞아.」 유중혁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아까보다 정제되지 않은 검격이었다. 궤적은 미숙했고, 초식은 어설펐다. 분명 완성 직전에 있었던 [파천검도]가, 다시 흐트러지고 있었다. 유중혁이 물었다. 「41회차를 거치면 이 정도로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겨우 이 정도일 뿐이지.」 초월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가진 틀을 버릴 용기를 내야 한다. 고작 창틀 하나 때문에 성을 무너뜨리는 건축가처럼, 집요한 강박과 완벽에의 갈망만이 새로운 초월의 길을 여는 열쇠가 된다. 그리고 유중혁은 길을 선택했다. 쩌저저저적. [멸혼신창]과 부딪칠 때마다 [파천검도]의 형(形)이 무너졌다. 궤(軌)가 바뀌고, 의(意)가 변한다. 결국 초월좌의 힘은 그가 추구하는 설화의 결을 따라가는 법이다. 거대한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더 강해져 온 유중혁의 역사. 그 역사가, 다시 한번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강해져라, 유중혁.」 유중혁과 유중혁이 대화하고 있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나의 역할이었다. 삶의 어느 국면에 이르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유중혁. 그런 유중혁을 보며 나는, 나에 관해 생각한다. 주인공이 될 수도 없고.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이야기를 알고 있고,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그 모든 창격에 내가 읽은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그 끔찍했던 3회차를. 통한의 41회차를. 지옥 같았던 1863회차를. 내가, 한 문장도 빠짐없이 모두 읽었다. 아아아아아아아! 그 격돌 안에서 유중혁은 다른 삶들을 살고 있었다. 내가 ‘멸살법’을 통해 삶을 살았듯, 유중혁 또한 부딪치는 병장기의 파찰음 속에서 자신이 살지 않은 생을 살고 있었다. 3회차의 유중혁은, 41회차를 통해 성장하고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응시합니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 구원될 수 없다.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 타인인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교량(橋梁)의 역할이다. “너도 실패한 놈일 뿐이다.” 유중혁이 말했다. “실패한 놈의 충고 따윈 듣지 않는다.” 비로소, 내가 알던 유중혁이었다. 진화한 [파천검도]의 궤적이 [멸혼신창]의 흐름을 따라간다. 집요하게 따라붙은 검격이 창의 그림자를 파훼하고, 이어지던 맥을 끊는다. 유중혁은 좌절해도 포기하진 않는다. 절망해도 멈추지 않고, 모든 것이 무너져도 다시 한 번 첫 번째 블록을 집는다. 「나는 유중혁이다.」 “아니.”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내가 유중혁이다.” 폭발하는 강기가 방의 곳곳을 파괴하며 비산했다.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가 이야기를 마칩니다.] 타오르던 지옥도가 사라지고, 혈향은 무뎌졌다. 희뿌연 먼지 속에서, [흑천마도]의 날카로운 칼날이 내 목젖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내가 뻗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 또한 녀석의 심장 어귀에 닿아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성좌, ‘한발 늦은 시련의 극복자’가 경의를 표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진정한 무인의 대결에 탄복합니다.]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것은 차오른 숨소리뿐이었다.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그 정적 속에서, 유중혁이 나를 노려보았다. 41회차를 넘어선, 3회차의 유중혁이 말했다. “내가 이겼다.” 나는 웃었다. “뭔 소리야? 내가 이겼어.” 바닥을 굴러다니는 별이 환한 빛을 발했다. [시나리오의 제한시간이 모두 경과했습니다.] 작은 축복처럼, 허공에서 별이 터지며 은빛으로 흩어졌다. 우리는 멍하니 그 빛을 올려다보았다. [해당 방은 별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누구도 동료를 해치지 않았습니다.] 46번째 시나리오, ‘별의 증명’. 이 시나리오는 참가자 모두가 서로를 해하지 않을 때 ‘제대로’ 클리어할 수 있다. [당신은 ‘신뢰’를 증명하였습니다.] 하지만 46번까지 시나리오를 거쳐온 이들은, 누구도 그런 식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 위로는 이제 성좌들의 세계. 마지막으로 자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저버릴 화신은 없다. 하나의 별이 탄생하면, 하나의 별은 저문다. 그리고 누구도 빛을 나눠 갖지 않는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더이상 버티는 것은 유중혁도 나도 한계였기 때문이다. 아주 잠깐 의식의 퓨즈가 끊어졌다 되돌아왔다. 끔뻑끔뻑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 됐군.” “그러게 말이다. 패왕의 설화를 얻을 기회였는데.” 지지 않고 대꾸하면서도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온몸의 근육이 끊어질 듯 아팠다. 몰래 꿍쳐 두었던 [대환단]을 몇 개나 씹어 먹었지만, 망가진 화신체의 회복은 생각보다 더뎠다. ‘영원불멸의 지옥도’는 그만큼 과부하가 심한 설화였다. “넌 멀쩡해 보인다?” “······.” 숨을 몰아쉬면서도 유중혁은 끊임없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방금 얻은 깨달음으로 인해, 유중혁은 아마 새로운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그게 재능이라는 거겠지. 부럽다. ······뭐, 쟨 주인공이니까. 침묵하던 주인공이 입을 열었다. “너는 다른 세계선에 다녀왔다고 했지.” 왜 안 물어보나 싶었다. “몇 회차였지?” “1863회차.” 그 숫자가 너무나 아득했던 것일까. 유중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의 설화는 그 세계선의 내가 준 건가?” “맞아.” 유중혁은 더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대신,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렇게 물었다. “그곳의 나도······ 실패했나?” 나는 허공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성공했어.”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원작의 회차를 뛰어넘어, 자신의 이야기를 찾아 떠나던 1863회차의 유중혁. 나는 그 유중혁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녀석이라면 시나리오의 끝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나도 알지 못하는 결말에.” “······너도 제대로 확인하진 못한 모양이군.” “그걸 확인했으면 돌아오지 못했겠지.” “거기서 끝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거긴 내 세상이 아니야.” 나는 텅 빈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세상은 여기야.” 유중혁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나는 잘 올라가지 않는 입술을 매만지며 웃었다. “여긴 내 화신인 유승이도 있고, 직장 동료 유상아 씨도 있고, 아직 흑화가 덜 된 한수영도 있고, 어머니도······.” “벌써 희희낙락하지 마라. 아직 끝난 게 아니다.” 허공에서 도깨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이런, 방 하나는 벌써 끝났군요. 히히, 과연······ 시나리오의 기대주들답게 박진감 넘치는 전투였습니다!] 영기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맡은 도깨비들의 숫자가 제법 되었으니, 아마 담당이 바뀐 거겠지. 나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유중혁의 말이 맞다. 아직, 이 시나리오는 끝난 것이 아니다. 유중혁이 말했다. “다른 방은 우리보다 늦게 투입되었다.” 실제로 우리의 눈앞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현재 성운 소속원들의 시나리오 클리어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리고 영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신 분들께는, 특별히 다른 방의 정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몇 개의 화면들. 뒤이어 무수한 간접 메시지들이 귓가를 찔러왔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두 성좌의 격돌을 주시합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전투에 깊은 흥미를 보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전장을 주목합니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재앙의 뒤틀린 머리’가 친우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한 장소에 쉽게 모이기 힘든 가공할 수식언들. 나는 떠오른 화면들 중 하나에 시선을 고정했다. 왜 이런 거물들이 모여 있나 했더니······. ······빌어먹을, 역시 이렇게 된 건가. 화면 속에서 검고 붉은 마력파가 충돌하고 있었다. 방 전체를 가득 채우는 마력의 향연. 무엇이라도 녹일 듯한 지옥불과,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검은 불꽃이 부딪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열기에 육신이 익어버릴 것 같은 정경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무시무시한 두 성좌. 그 성좌들의 화신이, 격돌하고 있었다. ‘심연의 흑염룡’. 그리고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잘못 배정된 방은 아무래도 싱겁게 끝나겠군요.] 검붉은 마력파의 폭발 속에 방 안의 모든 것이 불타올랐다. 희뿌연 시야 속에 창백한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피육음. 누군가의 신형이, 연기 속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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