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화
313화
······아버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저 거대한 그림자는 이쪽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곁을 보자 일행들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황당한 심경으로 다시 그림자 쪽을 돌아보았다.
[바바앗?]
성간도시의 출입구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그림자를 밝혔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 다시 따라해 봐. ‘아버지’.]
[아바바앗?]
[아니, ‘아버지’라니까. 그놈 오면······.]
‘거대한 그림자’는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거대한 그림자 위에 축구공만한 생물이 놓여 있었다.
“······너 지금 뭐하냐?”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비형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엇. 벌써 왔냐?]
거대한 그림자는 거인처럼 몸을 부풀린 ‘비형’이었다.
도깨비는 힘이 강해질수록 몸의 크기를 불릴 수 있게 된다. 비형이 저만큼이나 커졌다는 것은, 관리국에서 녀석의 입지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뜻이겠지.
잠깐······ 그런데 비형이 여기 있다는 건, 저기 있는 축구공만한 녀석이······.
“비유!”
솜사탕처럼 부풀어 오른 비유가 허공을 날았다.
[바아앗!]
내 품속으로 쏙 들어온 비유가 바앗 소리를 내며 뺨을 부볐다. 작은 눈에 뭔가가 그렁그렁 맺히고 있었다. 야구공만하던 녀석이 벌써 축구공만해지다니. 그간 성장한 것은 비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솜사탕 사이로 조그만 손이 비죽 튀어나오더니 내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부왕의 차원문 앞에서 녀석을 내버려 두고 갔으니, 이 정도 벌은 받을 만도 했다. 나는 간질간질한 그 손길을 가만히 맞아 주었다. 글썽글썽 눈물이 맺힌 비유가 다시 한번 내 품속을 파고들었다. 아이들도 내게 달려들어 비유의 솜털을 마구 만져댔다.
[험, 험.]
고개를 돌리자 비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도깨비 통신으로 비형을 향해 말을 걸었다.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냐?
―기다리고 있었지. 너넬 47번 시나리오 지역에 데려갈 도깨비가 필요하니까.
―몸집은 왜 불리고 있는 건데?
비형은 나를 무시한 채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김독자 컴퍼니> 여러분. 제가 누군지는 다들 알고 계시죠? 제 이름은 비형, 한반도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두툼한 근육을 과시하듯 가슴을 탕탕 치는 비형.
······뭔가 했더니, 겨우 저런 연출 때문이었나.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47번 시나리오 지역까지 오셨군요.]
비형은 감개가 무량하다는 얼굴이었다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47번 이후의 시나리오들은 순차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간 도시에 진출하신 후, 여러분들은 48번부터 65번까지의 시나리오를 선택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신유승이 손을 들고 물었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다고요?”
[이른바 시나리오 ‘자율 선택제’라고 할까요. 하하하!]
아무도 웃지 않았다.
머쓱해진 비형이 말을 이었다.
[험험, 아무튼. 65번까지의 시나리오들 중 무엇을 먼저 수행할지는 여러분들의 자유입니다. 당장 65번 시나리오를 수행해도 좋고, 시나리오들을 차례로 수행하여 차분히 ‘격’을 쌓아도 좋습니다. 어차피 65번 이후의 시나리오 지역으로 진입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격’이 필요하니까요.]
이현성이 물었다.
“그럼 66번 시나리오부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때는 또 새로운 설명이 있을 겁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나 걱정하시죠.]
냉정한 말투였지만, 일행들을 보는 비형의 시선은 차갑지 않았다.
[뭐, 여기까지 오는데도 4년이 걸렸으니······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아, 물론 여러분들 모두가 같은 ‘4년’을 겪은 건 아니겠지만.]
그 말을 하는 비형이 내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럼 <성간 도시>로 들어가 보시죠. 전송 완료까지는 10분 정도 시간이 걸리니, 각자 마음의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놀라운 세계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비형의 말이 끝나자, 비유가 외쳤다.
[바아앗!]
화려한 빛살이 나와 일행들을 감쌌다. 우리는 그대로 성간 도시를 향해 두둥실 날아가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서인지 이동 속도는 생각보다 느렸다.
간만에 다시 만난 비유는 내 품에서 나올 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희원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물어볼 게 하나 있는데요.”
나를 보는 정희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다른 일행들도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지난 3년간 대체 어딜 다녀왔던 거예요?”
*
성간 도시에 도착하기까지의 막간.
나는 일행들에게 1863회차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전부 다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고, 대충 궁금증이 풀릴만한 지점들만 골라서 들려주었다.
예상대로 일행들은 깜짝 놀란 눈치였다.
“진짜? 내가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 남았다고요?”
“······믿을 수 없군요. 그 지하철 남자애가 살아 있다니.”
흥분한 이지혜와 이현성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유중혁은 말없이 이야기를 들었고, 이길영이나 정희원은 살짝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그 회차에서는 없었던 사람들이니 그럴 수밖에. 제일 볼만한 표정을 지었던 것은 한수영이었다.
“그 세계선에 내가 있다고?”
“응, 너도 있었어. 골목대장이던데.”
“아니, 내가 왜······.”
뭔가가 떠오른 모양인지, 한수영이 재빨리 [한낮의 밀회]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설마 너, 전에 말했던 ‘아바타’ 얘기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수영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한수영 입장에서도 황당할 것이다. 분열된 아바타가 무려 다른 세계선에서 발견되었으니······.
내 옷깃을 유심히 바라보던 정희원이 물었다.
“그런데 독자 씨 코트가 조금 바뀐 거 같은데······ 혹시 95번 시나리오에서 가져온 건가요?”
“맞습니다.”
1863회차에서 가져온 건 코트만이 아니었다.
나를 유심히 노려보던 한수영이 내 코트의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면 1863회차의 한수영도 이랬었다.
“미친······ 너 대체 뭘 가져온 거야? 이거 개연성 위반 아냐?”
아이템들을 확인한 한수영이 입을 딱 벌렸다.
“······야. 이거 몇 개만 나 주면 안 돼?”
“너 하는 거 봐서.”
1863회차의 한수영이 챙겨준 아이템들 중에는 다양한 것들이 많았다.
이제 그 회차에서는 필요 없는 아이템들이 대다수였지만, 이곳에서는 충분히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들.
그런데 개중에는 예상치 못한 아이템도 하나 끼어 있었다.
“이 스마트폰은 뭐야?”
그것은 내가 쓰던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을 켜자, 메인 화면에 이상한 문구와 함께 사진이 떠올랐다.
― 남운 ♡ 지혜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이지혜와 벙싯 웃는 김남운의 모습.
나는 그제야 스마트폰의 주인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김남운이 이 코트를 훔쳐 입었던 적이 있었지.
이지혜가 화면과 똑같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아저씨, 이 사진 뭐야?”
“어, 이거······ 그 세계선의 애가 쓰던 건데, 실수로 가지고 왔나 보다.”
“그 세계선에서 나랑 얘가 사귀어?”
“아니, 걔가 일방적으로 널 좋아해.”
“흠, 그럼 그렇지.”
내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아간 이지혜가 갤러리를 열었다.
“와, 사진들이 제법 있네?”
······사진?
이번에는 나도 놀라서 일행들과 함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이것 봐, 나랑 설화 언니랑······ 어? 한동훈이도 있네? 그러고 보니까 걘 아직 울산 연합에 있나?”
“현성 씨도 나왔네요. 목 위로는 잘린 것 같지만.”
대체 언제 찍은 단체 사진인지, 환하게 웃는 1863회차 일행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이설화, 김남운, 이지혜, 한동훈, 이현성······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선 한 사내.
이지혜가 말했다.
“이게 그 세계선의 사부구나. 얼굴은 다친 건가? 여기보다 더 멋있는데?”
모두가 웃고 있는 사진 속에서, 1863회차의 유중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느새 유중혁도 이쪽을 흘끔거렸다.
[‘제4의 벽’이 희미하게 흔들립니다.]
이곳의 누구도 저 세계선의 유중혁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모른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아니, 아는 녀석도 하나 있긴 하군.
나는 고개를 들어 먼 <스타 스트림>의 별들 사이로 ‘은밀한 모략가’가 있을 법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나는 ‘은밀한 모략가’가 왜 그런 ‘이계의 언약’을 요구한 것인지 모른다. 왜 내 선택에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도, 여전히 모르겠다.
짐작 가는 것은 몇 가지 있지만, 모든 것은 아직 가설일 뿐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은 다른 성좌들의 세계로 통하는 환승역.
성좌들과의 물리적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을 환영합니다.]
마침내 근신이 풀렸는지, 우리엘도 간접 메시지를 보내왔다.
빛나는 광휘 속에, 우리의 몸이 도시 내부로 진입했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 진입하였습니다!]
[새로운 메인 시나리오가 대기 중입니다.]
우리가 착륙한 곳은 거대한 도시의 광장이었다. 몇몇 화신체들이 이쪽을 흘끗거렸지만, 딱히 우리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 도시의 규모는 지금까지 우리가 머물렀던 거주지와는 차원이 다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는, 다들 알고 계시죠?”
이제부터 우리가 상대할 적들은 수천 년 묵은 능구렁이들이다.
정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올림포스>랑 한 판 하러 온 거잖아요?”
“따로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혹시 전면전을 벌이신다든가······.”
이현성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저쪽은 <스타 스트림>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거대한 성운이니까요.”
현실적으로 지금 <김독자 컴퍼니>가 <올림포스>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일단은 <올림포스>에 방문해보려고 합니다. 유상아 씨를 그 꼴로 만든 녀석들에게 책임을 따져 물어야죠. 분명 살려낼 방법은 있을 겁니다.”
현재 유상아는 「의식의 흐름」 상태에 빠져 있다.
이대로 3개월이 지나면 유상아의 몸에서는 거의 모든 설화들이 빠져나가 버릴 것이고, 텅 빈 그녀의 영혼은 공허 속에서 소멸해버리겠지. 그 전에, 우리는 유상아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아마도, 그 방법 중 하나는 <올림포스> 녀석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모두가 갈 필요는 없겠지. 나와 이설화는 여기서 찢어지겠다.”
“어딜 가려고?”
“네놈에게 보고할 의무는 없다.”
사실 유중혁이 가려는 곳은 뻔했다.
‘별자리의 맥락’은 모든 성운들이 모여드는 성간도시.
즉, 지금 이곳에 온 화신들은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충고하듯 말했다.
“조심해. 너도 잘 알겠지만, 그 여자 절대 만만하지 않으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
유중혁은 그 말을 남기고 홱 돌아서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옅게 미소한 이설화가 내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유중혁을 따라갔다.
이번 회차의 이설화는 그 어느 회차보다도 선량한 ‘의선’이다.
누구라도 고삐 풀린 유중혁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녀가 곁에 있다면 불필요한 다툼을 조금은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유중혁이 골목 너머로 사라진 후,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광장의 중심에 비치된 포탈을 향해 움직였다.
성간도시 ‘별자리의 맥락’에는 거의 모든 세계와 통하는 ‘포탈’이 있다.
지난 시나리오 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성운의 거주지에도 방문할 수 있는 포탈. 나는 그 포탈을 이용해서 <올림포스>에 정식으로 방문 요청을 할 계획이었다. 나는 포탈을 향해 행선지를 입력했다.
“올림포스 산맥.”
온갖 전설과 모험담으로 쌓아 올린 거대 성운, 올림포스.
그런 올림포스의 12신좌가 거주하는 <올림포스 산맥>.
드디어, 녀석들의 터전을 확인할 때가 온 것이다.
소용돌이치는 포탈 속에서, 어렴풋이 신화 속 정경들이 떠올랐다.
츠츠츠츠츳!
그리고 다음 순간, 예상 밖의 메시지가 돌아왔다.
[현재 <올림포스>는 모든 방문객의 입장을 거절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