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31화
3호선 플랫폼에 사상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비형이 사라지고 십여 분이 경과하던 무렵이었다.
현재 3호선 플랫폼에 있는 ‘방’은 단 하나 뿐.
그나마 강자가 없는 3호선이기에, 약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향해 살의를 내뿜었다.
“죽어! 죽으라고!”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30분 남았습니다.]
주변이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와중에도, 나는 조용히 ‘멸살법’을 읽고 있었다.
아마 오늘 치 시나리오는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 갈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단어 한 단어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수밖에 없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인마!]
비형의 도깨비 통신과 함께, 성좌들의 메시지도 들려왔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뭘 하고 있는 지 의아해합니다.]
순간 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껐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성좌들은 왜 내가 ‘멸살법’을 읽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실제로 ‘멸살법’ 원작을 보면 유중혁이 회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성좌들이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내가 이 텍스트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진즉에 무슨 말이 나왔어야 정상이었다.
[지금 빈 메모장 켜놓고 뭐하는 건데? 너 때문에 성좌들 전부 답답해서 미치려고 한다고!]
···빈 메모장?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멸살법’ 파일이 켜진 화면.
“이거 말하는 거야?”
[그래! 지금 메모장 켜놓고 무슨 작전 궁리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대로 있으면 뒈진다고! 하, 내가 저런 놈을 믿고 계약을······.]
일순 소름이 돋았다.
도깨비는 이 ‘텍스트’를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시스템의 최고 관리권을 가진 도깨비가 읽을 수 없다면, 성좌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럼 이 텍스트를 내게 준 작가는······ 대체 어떤 존재지?
“크아악!”
마지막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침내 3호선 플랫폼의 ‘방’의 주인이 가려진 것이다.
[그린 존 1/1]
“···가까이 오지 마세요.”
나를 향해 어설프게 나이프를 겨누는 소년. 놀랍게도, 승자는 아까 우리를 안내해준 그 소년이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소년.
“걱정 마, 네 자린 안 뺏어.”
나는 안심하라는 듯 일부러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그러자 바로 뒤쪽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그래? 꽤나 여유롭네, 아저씨. 죽고 싶은가 봐?”
싸가지 없는 말투를 보니, 누군진 돌아보지 않아도 알겠다.
“여유부리는 건 너도 마찬가지 같은데.”
“내 방은 아무도 안 건드려. 건드리면 뒈지는 걸 다들 아니까.”
이지혜가 새파란 장도를 휘휘 그으며 말했다. 하긴, 지금 스펙의 이지혜 정도면 유중혁이나 ‘건물주 연합’을 제외하고는 거의 상대할 화신이 없을 것이다. 나를 유심히 보던 이지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저씬 안 죽었으면 좋겠어. 아까 우리 사부한테 개기던 거 꽤 인상적이었거든.”
“안 죽을 테니까 걱정 마. 그리고 ‘방’을 못 찾는다고 해서 꼭 죽는 것도 아니야.”
내 말은 사실이었다.
‘방’을 못 찾는다고 해서,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니다.
이 역에는 그 불가능을 살아 증명하는 인간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고작 3일 전에.
이지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저씨, 지금 자기가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응.”
“아저씨 강해? 우리 사부만큼?”
말하기가 무섭게, 이지혜의 뒤쪽에서 유중혁이 나타났다.
“그만 방으로 돌아가라.”
“앗··· 넵. 사부.”
금세 고분고분해진 이지혜가 사라지고, 마찬가지로 돌아서려던 유중혁이 나를 일별했다.
“괴물들과 싸울 셈인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죽을 거다. 그리고 네 일행들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떠나며 나를 돌아보는 유중혁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감정이 깃들었다. 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하지 않았다.
꼭 모든 감정을 말로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20분 남았습니다.]
환승길 계단 쪽에서 사람들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성, 이길영, 그리고 유상아······ 하나 같이 어두운 표정을 보니 결과는 예상대로인 모양이었다. 유상아가 침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방······ 못 구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보다 희원 씨는요?”
“그게, 위층에서 협상해 본다고 하긴 했는데.”
말하기가 무섭게 정희원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뛰어 내려왔다.
“하룻밤에 2천 코인? 장난해 지금? 확 그냥 회쳐버릴까 보다 진짜.”
흥분한 듯 콧김을 씩씩 내뿜은 정희원이 말했다.
“독자 씨. 위층에서 뭐라는지 알아요? 아니 글쎄―”
“갑자기 세를 높였죠?”
“어······ 알고 있었어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다. 20분 뒤까지 방을 못 구하면 죽는 것은 세입자들 쪽이니까. 주도권이 건물주들한테 있으니 세를 높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독자 씨는 뭔가 찾으셨나요?”
“아뇨, 저도 못 찾았습니다.”
“아······.”
나는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결국, 선택의 시간이 왔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 이라는 말에 일행의 눈이 반짝였다. 하지만 내가 제시하는 방법들은, 아마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는 쉬운 방법입니다.”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보통 그럴 땐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는 전개던데······ 다른 하나는 뭔데요?”
“두 번째는, 매우 어려운 방법입니다.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죽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어······ 그건 안 되는데. 첫 번째 방법으로 해요, 그럼.”
“다른 분들 생각은 어떠십니까?”
이현성이 먼저 반응했다.
“모두가 살 수 있다면 첫 번째가 좋을 것 같습니다.”
이길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인 것은 유상아 뿐이었다.
“···일단 그 방법이 뭔지 들어봐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4호선 환승길의 계단참으로 올라갔다.
“첫 번째 방법은 저겁니다.”
일행은 내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떨고 있는 다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그린 존 5/5]
“저들이 차지하고 있는 ‘방’은 정확히 다섯 칸짜리입니다. 하지만 저들 개개인의 능력치는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솔직히 우리 다섯이 모두 나서지 않아도······.”
“잠깐만요, 독자 씨 지금―”
“네, 저들을 죽이고 방을 빼앗는 게 바로 첫 번째 방법입니다.”
내 차분한 목소리에 일행들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정희원은 깊은 상처를 받은 얼굴이었다.
“···누가 이런 방법을 몰라서 안 한 줄 알아요?”
“형이 그러자고 하신다면, 저는 할 수 있어요.”
먼저 앞으로 나선 것은 이길영이었다.
“전 두렵지 않아요. 제가 할게요.”
“안 돼, 길영아!”
이길영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유상아였다.
나는 그녀를 보며 일부러 무심한 투로 말했다.
“저들도 누군가를 죽이고 저 자리를 차지했을 겁니다. 솔직히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의 시나리오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독자 씨.”
정희원이 내 말을 끊었다.
“난 금호역에서 살인을 했어요. 내가 원해서 죽였고, 죽인 걸 후회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정희원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살인자가 되었다고 해서, 살인이 좋아진 건 아니에요. 난 괴물이 되고 싶은 건 아니라고요.”
“······.”
“···독자 씨, 두 번째 방법에 관해 알고 싶습니다.”
이현성의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여러분 생각은 잘 알겠습니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두 번째 방법으로 가죠.”
내 말에 일행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두 번째 방법을 쓸 생각이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생존하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벌써부터 쉬운 방법만 고수해서는 결코 성좌들의 주목을 끌 수 없다.
다만, 두 번째 방법을 쓰기 위해서는 상당한 각오가 필요했다.
나 뿐 만이 아니라, 일행 모두가.
그래서 그 각오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이 사람들이, 정말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다.
정희원이 허탈하게 웃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차피 두 번째로 갈 거면서 왜 사람을 떠 봐요?”
“딱히 여러분을 시험하려한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하셨든, 저는 그 선택을 존중했을 테니까요.”
나는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이길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상아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독자 씨는 정말 짓궂어요.”
“착한 사람이 아니라서 죄송하군요.”
“두 번째 방법은 뭔가요?”
“이 방법은 아무도 죽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주 어려운 방법입니다.”
내 무거운 음색에, 일행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두 번째 방법을 선택하신다면, 제 지시를 무조건 따라주세요. 도저히 말이 안 될 것 같아도, 믿고 따라 주세요. 만약 단 한 사람이라도 저를 믿지 못하신다면―”
“······.”
“우린 모두 죽을 겁니다.”
누군가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일행들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성이 대표로 말했다.
“독자 씨를 믿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독자 씨 덕분이고요.”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시작까지 5분 남았습니다.]
“그럼 따라오세요.”
나는 일행들과 함께 3호선 철길 쪽으로 이동했다.
깨진 스크린 도어를 지나, 을지로 3가로 가는 터널의 입구에 섰다.
캄캄한 터널 안쪽으로, 붉게 빛나는 ‘레드 존’이 보였다.
“아마 괴물들은 저쪽에서 생성되어 밀려올 겁니다. 그리고 3호선을 휩쓸고, 한 층씩 지상으로 올라가겠죠.”
이현성이 긴장한 투로 물었다.
“······그럼 우린 여기서 괴물들과 싸우는 건가요?”
“아뇨, 못 싸웁니다. 여기서 싸우면 우린 다 죽어요.”
그린 존 없이 저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싸워 새벽까지 버텨내는 것은, 유중혁이나 가능한 일이다.
이번엔 정희원이 물었다.
“···그럼 동대입구역 쪽으로 달아날까요?”
“그것도 안 됩니다. 시나리오가 활성화 되었을 때 충무로를 벗어나면 자동으로 사망해요.”
“그럼 대체······.”
“이 작전은 일행을 나눠야 합니다. 이현성 씨, 유상아 씨, 그리고 정희원 씨. 괴물들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곧장 놈들이 오는 방향으로 달리세요.”
“···네?”
“알겠죠? 꼭 놈들의 정면으로 달리세요. 그리고 놈들과 격돌하기 직전, 왼쪽 벽면을 꼭 살피세요. 그럼 제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일행들은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눈치였지만,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그냥 믿으세요, 안 그러면 다 죽을 겁니다. 왼쪽 벽면 살피시는 거 잊지 말고요.”
“알겠어요, 독자 씨.”
무슨 말인지 이해한 듯, 유상아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노파심에 말씀 드리는 거지만. 꼭 괴물이 나타난 후에 달리셔야 합니다.”
나는 돌조각을 하나를 주워 터널 쪽으로 던졌다. 그러자 돌은 허공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나가 떨어졌다. 이현성과 정희원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독자 씨는 어쩌실 건가요?”
“저는 길영이와 함께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
이 방법은 일행이 나를 믿지 않으면 쓸 수 없다.
상식적으로 곧 나올 괴물들을 향해 자살 특공을 감행하라는 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의지에 달렸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 됩니다!]
스르르, 하는 느낌과 함께 을지로 3가 쪽의 터널을 막고 있던 결계가 사라졌다.
“달리세요!”
내 외침에 달리기 자세를 취하고 있던 세 사람이 동시에 스타트를 끊었다.
그르르르―!
그리고 레드 존에서 괴물들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대열을 주로 채운 것은 9급 지하종인 땅강아쥐들. 그리고 중간 중간 대열을 메우고 있는 8급 지하종 [그롤]이 보였다.
그오오오!
검은 갈기에, 곰의 형상을 취한 괴물. 이마에 달린 뾰족한 뿔이 위협적인 녀석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 놓고 보면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었지만, 문제는 그 숫자였다. 빼곡하게 몰려오는 대열은, 이미 ‘무리’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았다.
저 파도와 부딪치게 되면, 반드시 죽는다.
이현성이 최전선의 그롤과 격돌하려는 순간, 내가 외쳤다.
“지금입니다!”
유상아가 제일 먼저 벽면을 발견했다. 벽면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초록색 타일.
“아―!”
깨달음은 순식간이었다. 유상아의 손이 벽면에 닿자, 벽면이 환한 불빛을 뿜으며 활성화 되었다.
[그린 존 1/3]
민첩한 정희원이 곧바로 그녀의 뒤를 이어 벽에 달라붙었다.
[그린 존 2/3]
그러나 이현성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땅강아쥐들이 이현성의 방패에 들러붙었기 때문이다.
“현성 씨! 잡아요!”
유상아가 장기인 [실 묶기]를 사용해 이현성을 붙잡았다. 두 여자의 힘으로, 일순 허공에 떠오른 이현성이 간신히 벽면에 도달했다.
[그린 존 3/3]
됐다.
그르르르르!
괴물들이 분한 듯 일행들을 노려보았지만, 이미 그린 존에 진입한 이상 놈들은 일행을 공격할 수 없었다.
“독자 씨!”
유상아가 나를 불렀지만 돌아볼 틈은 없었다. 나는 이미 이길영을 업고 뛰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에는 몇 개의 숨겨진 ‘그린 존’이 있다. 이것은 매 회 특정 ‘벽면’에 활성화되며,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그린 존’이 벽면에 붙어 있다니······ 생각해 보면 그것을 ‘방’의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은 애초에 인간들뿐이었다.」
‘멸살법’의 유중혁은 수많은 회귀를 거치며 충무로의 비밀스런 ‘그린 존’을 몇 개 찾아냈다.
그리고 이 3호선 플랫폼에, 그런 ‘그린 존’은 두 개 뿐이다.
키이이잇!
어느새 쫓아온 땅강아쥐 몇 마리가 내 허벅지를 물었다.
체력 레벨이 높아 큰 타격은 없었지만, 이런 자잘한 것들이 쌓이면 나중에는 화가 된다.
콰악!
등에 업힌 이길영이 달려오는 몇 마리의 땅강아쥐를 둔기로 견제했다.
그러나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속도가 빠른 그롤도 끼어 있었다.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예의 소년이 겁에 질려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린 존 1/1]
비겁하게도, 잠깐이지만 쉬운 길로 가고 싶다는 유혹이 일었다.
[하하하하! 이거 재밌게 돌아가네요. 그럼 오늘도 어제처럼 패널티가 있어야겠죠?]
허공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도깨비의 목소리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시나리오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기존에 존재하던 일부 ‘그린 존’들이 비활성화 됩니다.]
“아, 안 돼! 으, 으아, 으아아아아!”
충무로 역 곳곳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장 가까운 비명은, 근처의 소년의 것이었다.
콰지지직!
“아아아악!”
‘그린 존’ 이 사라지자마자, 소년의 작은 육체는 갈가리 찢겨 땅강아쥐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소년의 시체가 시간을 버는 사이, 나는 이길영을 업은 채 통로를 내달렸다. 그러나 부서진 스크린 도어 너머에서 넘어온 괴물들로 가야할 길목은 이미 막혀 있었다.
나는 이길영을 뒤에 숨긴 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뽑아 들었다.
스가각!
백청강기의 칼날이 다가오는 괴물들을 빠르게 베어 넘겼다. 그러나 숫자는 조금도 줄지 않았다.
단 하루긴 해도 이 괴물들 속에서 해가 뜰 때까지 버텼다니, 유중혁이 괴물은 괴물이다.
지금 내가 가진 코인을 전부 종합 능력치로 바꾸더라도, 그 일이 가능할지 확신이 없는데.
그때, 이길영이 말했다.
“형, 있잖아요.”
“지금 말 걸지 마. 바쁘니까.”
“저 그냥 여기 두고 가셔도 돼요.”
“···뭐?”
스가각!
“전 사실 이해가 잘 안 가요. 왜 저나 다른 형, 누나들을 도와주시는 거예요? 혼자라면······ 형은 더 잘 살아남을 수 있을 텐데.”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도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다니.
어쩌면 이 아이의 마음은 이미 죽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또 한 마리의 땅강아쥐가 목이 베인 채 바닥에 늘어졌다.
“혼자 다해처먹고, 혼자 살아남고, 혼자 떵떵거리면서 살면 편하기야 하겠지.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느냐고?
누가 그렇게 묻는다면, 나도 정확히 설명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런 식으로 전개했다가 망해버린 소설을 하나 알거든.”
“네?”
매번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역시 주인공감은 아니다.
영웅이 되지도 못하고, 구원자가 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흔들리는 이길영의 눈동자.
나는 녀석을 다시 내 등에 업으며 말했다.
“형 꽉 잡아라.”
이길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