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30화 유중혁은 이현성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 쪽을 보고 있었다. 하필 남은 세 사람이 뭉쳐 있어서, 나는 유중혁이 정확히 누굴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저런?」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엄청나게 물어보고 싶었는데, 잘못하면 내 스킬이 들킬까봐 참았다. 아직 유중혁은 내가 자기 속을 다 안다는 걸 모르니까. 다만 ‘정희원’의 인물 정보를 본 게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만 할 뿐. 때마침 깨어난 정희원이 유중혁과 눈을 마주쳤다. “뭘 꼬라봐요?” 「······.」 잘한다, 정희원. 「죽일······.」 “유중혁.” 나는 재빨리 끼어들었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녀석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디 말해보시지, 하는 눈빛이다. “왜 공필두를 내버려 두는 거냐?” “예언자라면 알고 있을 텐데.” “나라고 모든 걸 다 알진 못해.” 정확히는 모든 걸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이지만.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짓 간파’를 발동 중입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여간 꼼꼼한 새끼. “······하긴, 그런가. 예언자라도 아직 ‘미래시’의 레벨이 낮겠지.” 멋대로 생각해라. 유중혁이 말을 이었다. “공필두를 살려두는 건 필요가 있어서다.” “앞으로 있을 시나리오 때문이지?”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가늠해보겠다는 듯이. “이후의 시나리오에 공필두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공필두’가 필요할 뿐이지, 놈을 따르는 그룹 전체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 “필요 없는 건 제거하는 게 네 스타일 아닌가? 왜 그냥 두고 보는 거지?” 「······귀찮군.」 뭐? “나는 할 일이 많다.” 유중혁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는 결코 이해하지 못해.” “잠깐만! 그렇게 말하고 지나갈 문제가 아니야. 네가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충무로에 있는 인간들 중 대부분은······!” 유중혁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상관없어.” 나는 딱히 인본주의자는 아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건, 그냥 유중혁이 아니꼬워서다. “유중혁. 한 대만 때려도 되냐?” “그럴 자신이 있다면.” 분노에 차 주먹을 드는데,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신강기 Lv.5」를 사용 중입니다.] 주먹을 내렸다. 비겁한 자식. “볼 일은 끝났나?” “······.” “가자.” 유중혁의 부름에 이지혜가 움찔했다. 뒤늦게 유중혁을 따라 나서는 이지혜가, 나를 의외라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당신의 의협심에 감동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물론, 완전히 오해지만. * [세 번째 시나리오 활성화까지 1시간 30분 남았습니다.] 시간은 별로 없고, 머릿속은 복잡하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파탄난 민생에 분노합니다.] [성좌, ‘대머리 의병장’이 민중봉기를 원합니다.] 머릿속에서 사명대사가 시끄럽게 떠들어댔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것은 정확히 일주일. 아마 유중혁은 세 번째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기간을 틈타 뭔가 다른 이득을 취할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놔둘 수는 없지. 놔둘 수 없기는 한데······.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합니다.] “유중혁 개새끼.”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만족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사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는 유중혁이 아니라 공필두였다. 세 번째 시나리오를 무난히 돌파하려면 공필두의 도움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만약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문득 고개를 드니 정희원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까 쫌 쫄았죠?” “······네?” “아까 그 남자 있잖아요. 유중혁인가랑 얘기할 때.” 나는 곧장 ‘공필두’ 이야기를 꺼냈다. 정희원은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공필두를 보지 못했으므로. 절대 화제를 돌리려던 건 아니다. 정희원은 곧바로 반응했다. “······아니 뭐 그딴 새끼들이 다 있어요? 모두가 쓰는 공공시설을 차지하고 세를 받다뇨?” “그딴 새끼들이 바로 위층에 있습니다.” “내가 당장 가서 조져버릴게요.” 노발대발한 정희원이 땅강아쥐 칼을 뽑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일행들 무기도 바꿔줘야 할 텐데. 할 일이 태산이다. “무립니다.” “우리가 힘을 합치면 이길 수 있어요. 금호역 때도 그랬잖아요?” 정희원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그럴 법도 하지. 정희원에겐 [심판의 시간]이라는 비장의 스킬이 있으니까. 센스가 좋고 적응이 빠른 그녀는 이미 자신의 특성과 스킬에 대해 파악을 끝냈을 것이다. “미적거리지 마요! 당장 가서 처치하고 오자구요!” 그리고 상대가 ‘악인’인 한, 그녀의 [심판의 시간]은 최고의 상성을 자랑한다. [등장인물 ‘정희원’이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침묵합니다.] [스킬 발동이 취소되었습니다.] 정희원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아니, 이런······ 뭐죠? 고장 난 건가?” 정희원은 몇 번이나 다시 스킬 발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스킬은 발동되지 않았다. “아니······ 왜 발동이 안 되는 거죠? 그놈들도 분명 악인이잖아요?” 나는 정희원의 의문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우리 인간들의 생각이겠죠.” “······무슨 소리에요 그건?” “성좌들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선악이, 그들이 아는 선악과 같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아······.” “정의는 언제나 다수의 판결일 뿐이에요.” 그리고 지금, 그 판결을 결정할 수 있는 ‘다수’는 성좌들이었다. 인간에겐 더 이상 정의를 제창할 권리가 없다. 인간은 그저 배후성들의 꼭두각시일 뿐이니까. “무슨 그딴······.” 나는 다른 일행들을 보았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생각하는 건 정희원과 비슷할 것이다. 이현성은 마력탄에 흠집이 난 철제 방패를 말없이 닦고 있었고, 유상아와 이길영은 나란히 바닥에 앉아 바퀴벌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절망감, 십분 이해가 된다. 금호역의 깡패들을 해치우고 자기들이 뭐라도 된 줄 알았겠지. 그러나 고작 역 세 개를 더 이동했을 뿐인데 그놈과 비교도 안 되는 괴물이 있다. 그럼 이쯤에서 슬슬 희망고문을 시작해 볼까.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네?” “어렵겠지만, 놈들을 꺾을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일행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이현성이 물었다. “······정말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뭔데요?” 나는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공필두가 ‘무장지대’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겁니다.” “무장 지대가 뭔데요?” “녀석의 성흔입니다. 지역 방어에 최적화된 기술이죠.” 무장지대. 공필두를 상대로 다수전이 까다로운 이유는 바로 이 성흔 때문이었다.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인근 지역에 [포탑]을 건설할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 지금이야 [무장지대]니까 그나마 낫지, 훗날 성흔이 진화해 [무장요새]급이 된다면 놈을 잡기 위해 거의 공성전 규모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공필두에게도 분명 약점은 있었다. “놈의 ‘무장지대’는 자신이 지정한 장소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해제됩니다. 그러면 녀석의 미니 포탑들도 쓸모 없게 되죠. 보통 그런 광역 방어 스킬은 제약이 많습니다.” 내 말에 이현성과 정희원이 동시에 감탄했다. “아······ 그런 약점이.” “한 번 보고 거기까지 알아낸 거예요? 혹시 독자 씨 특성이 ‘척척박사’ 아니에요?”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일행들은 어느 정도 내게 적응해버린 눈치였다. 이번엔 유상아가 물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들죠?” “그걸 지금부터 같이 생각해 봐야죠.” “아, 생각하는 게 제일 싫은데.” 정희원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리고 모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낸 것은 이현성이었다. “화장실에 간다거나 할 때 습격하면······.” “아까 의자 옆의 잡동사니들을 못 보신 모양이군요.” 공필두는 절대로 자신의 무장지대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의 안식처인 ‘벤치’ 곁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 침낭, 담요, 식량, 먹고 씻을 물을 담은 대야, 심지어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요강까지 있다. 물론 버리는 것은 세입자들이 한다. “미쳤네. 완전 방구석 폐인이잖아. 아니, 그 자식은 그 땅에 뭐 좋은 걸 숨겨 놨다고 안 움직이는 거래요?” “그곳이 충무로에서 가장 커다란 ‘방’이니까요.” “······‘방’이요?” 그러고 보니 정희원은 아직 ‘방’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세 번째 메인 시나리오 활성화까지 1시간 남았습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까. “우리도 슬슬 ‘방’을 찾아야 합니다.” 일행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움찔 놀라는 게 보였다. “가, 가, 가까이 오지 마!” 특히 강한 경계심을 보인 것은 아까 3호선의 1인용 방을 지키던 나이프 사내였다. 그러나 우리가 다가가기도 전에, 다른 사내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꺼져, 새끼야!” 무차별로 쏟아지는 타격들. 사내가 밀려나자, 순간 그린 존의 표식이 바뀌었다.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린 존 1/1 -> 그린 존 0/1]. 사내들이 하나의 ‘방’을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누군가는 허벅지를 찔렸고, 또 누군가는 코뼈가 부러졌다. 정희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거 안 말려도 돼요?” “우리가 개입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결국 누군가는 죽어요.” “아무도 안 죽을 수도 있잖아요?” “이번 시나리오는 그게 불가능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비형이 내려왔다. [자자, 슬슬 삼일 차 메인 시나리오를 시작해 볼까요? 오늘은 뉴 페이스들도 제법 들어 왔으니까, 더욱 재미있겠죠? 하하하!] 비형이 이쪽을 흘끗대며 말했다. 충무로 시나리오를 담당하는 도깨비는 총 셋인데 비형이 대표로 나온 걸 보면 아무래도 짬처리를 맡은 듯했다. 셋 중 비형의 채널이 제일 작으니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그리고 세 번째 시나리오가 눈앞에 도착했다. + <메인 시나리오 # 3 ― 그린 존 (3일차)> 분류 : 메인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역내의 ‘그린 존’을 차지하여 매일 밤 자정 몰려드는 괴물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 이 시나리오는 총 7일간 지속됩니다. 지속시간 : 8시간 보상 : 1000코인 실패시 : ― + 이현성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규칙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그린 존’을 차지하세요. 물론 다른 이들의 ‘그린 존’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서두르셔야 할 거예요. 시나리오가 시작한 이후에도 ‘그린 존’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정말 끔찍한 일을 겪게 될 테니까요. 하하, 그럼 다들 힘내보세요!] 비형의 말을 들은 일행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의 비명은 이어지고 있었다. 퍽! 퍽! 퍽! “죽어! 죽으라고!” “따, 딱히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 건 아냐! 나도 살려고······!” 아마 이걸로 다들 깨달았을 것이다. 눈앞의 사투가, 더 이상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유상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우리끼리도 저 사람들처럼 싸워야 하는 건가요?” “우리끼린 안 싸워도 됩니다. 수용 인원이 많은 ‘방’을 찾으면 되니까요.” ‘그린 존’의 크기는 종류별로 다양했다. 오직 1명만 거주할 수 있는 곳부터, 공필두의 땅처럼 무려 70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곳까지. “물론 그런 ‘방’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내 말에 정희원이 입술을 실룩였다. “하여간 독자 씨는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그럼 지금 당장 움직이죠. 혹시 남은 방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흩어져서 움직이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팀을 나누죠. 현성 씨가 상아 씨와 함께 움직이고, 희원 씨가 길영이를 데려가주세요.” “독자 씨는요?” “저는 혼자 움직이겠습니다.” 괜찮겠냐는 말은 없었다. 다들 나를 꽤 신뢰하는 눈빛들이다. 마지막으로 입을 연 것은 이길영이었다. “형, 저··· 혹시 못 찾게 되면 어쩌죠?” “만약 시나리오 시작 전 20분까지도 ‘방’을 못 찾으면,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걸로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출발할게요!” 일행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정희원과 이길영은 지하 2층으로, 유상아와 이현성은 지하 3층으로. 나는 멀어지는 일행들을 잠시 지켜보다가, 스마트폰을 켰다. ‘멸살법’을 열자마자 한 줄의 문장이 곧바로 떠올랐다. 「충무로에 남은 ‘방’은 없다.」 너무나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 아마 일행들은 남은 ‘방’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일행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살아남기 위해, ‘방’을 차지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그런데 이현성이나 정희원이 그럴 수 있을까? 이곳의 모든 사람들이 ‘악인’은 아니다. 공필두처럼 타인을 착취하는 자들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자들이었다. 과연 그런 그들을 향해 유상아나 이길영이 마주 송곳니를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곧 답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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