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306화 암습조 아홉 명이 자리에 드러눕기까지는 그로부터 삼십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끄윽······.” 나는 신음하는 암습조들을 전부 점혈한 뒤, 손을 탈탈 털었다. [등장인물 일람]을 통해 몇 명의 정보를 확인해 보니, 굳이 캐보지 않아도 답은 나왔다. “······경기 연합이네. 여긴 왜 오셨을까?” 파스스슷. 내가 점혈하기 전에 미리 독단을 깨문 몇몇 암습조들의 신체가 녹아내렸다. 아무래도 암시가 걸린 녀석들인 듯했다. [성좌, ‘검은 황야의 암살자’가 당신을 경계합니다!] [성좌, ‘흑월의 사냥꾼’이 시나리오의 형평성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내가 허공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자, 메시지들은 일제히 잦아들었다. 나는 암습조들이 침입한 루트와, 녀석들의 행색을 꼼꼼히 확인했다. 깨진 창문 너머로, 허공을 날아 달아나는 한 녀석이 보였다. 휘이이이익―! 허공을 달려가는 경신법을 보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단순한 암습조인 줄 알았는데, 개중 십악(十惡)이 끼어 있었을 줄이야. 경기 연합의 수장, 십악 조진철. 무림의 전대 고수를 배후성으로 둔 녀석은, 본래 45번 시나리오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원작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고, 지금 신경쓸 만한 녀석은 아니었다. 십악에도 급이 있고, 조진철은 그 중 잔챙이에 속하는 편이다. 지금의 일행들이라면, 한반도 내에 적수가 될만한 화신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나 인도라면 모를까······. “저놈이다! 쫓아!” 멀어지는 조진철을 쫓아가는 몇몇 인원들이 보였다. 개중에는 내가 데리고 왔던 귀환자 비천호리도 끼어 있었다. 도망자와 추격자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는 가운데, 탁 트인 서울의 정경이 들어 왔다.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서울.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한 [공단]. ‘은밀한 모략가’와의 계약을 통해 [공단]은 텅 빈 서울로 이송되었다. 마치 현실과 소설이 결합되어 있는 듯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새삼 세계가 변했다는 것이 실감났다. 성채의 바로 아래쪽에는 ‘유중혁―김독자 공단’이라는 거대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왜 유중혁이 먼저 나오는 거지? 나중에 바꿔야겠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나는 그 수식언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라파엘.” 성운 <에덴>의 대천사, 라파엘. 츠츠츠츳······! 진명에 반응하듯 허공에 스파크가 튀었다. 슬슬 <에덴> 쪽에서 연락이 올 거라는 생각은 했다. “마침 찾아뵐 생각이었습니다. 돌려 드릴 것이······.” 나는 아직 품속에 들어있을 가브리엘의 상징체를 떠올렸다. 슬슬 요피엘의 구속구도 효력이 떨어졌을 테니, 가브리엘도 깨어날 때가 됐다. 그런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가브리엘은 이미 회수했다고 말합니다.] 품속에 있던 백합이 사라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잠결에 대천사의 손길이 스쳐간 듯한 기억이 났다. 어쩌면 그때 <에덴>의 성좌들 중 하나가 방문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침 정희원의 배후성이 우리엘이니, 우리엘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고 보니 우리엘은 어떻게 됐을까? 왜 내가 나타났는데도 간접 메시지가 없지?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우리엘은 아직 채널 발언권을 허가받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 그런 거였군.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궁금증을 표합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붉은 코스모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라파엘의 메시지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은 저와 함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 요피엘.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3회차의 세계선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의지로 다른 세계선에 남기를 원했습니다.” 주변에 한바탕 광풍이 몰아쳤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의 말을 불신합니다!] 츠츠츠츠츳······! 분노한 라파엘의 의지였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능력이라면, 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텐데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휘감던 바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해명을 요청합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46번 시나리오를 앞두고 있으니······ 곧 직접 만나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나를 보는 라파엘의 시선이 묘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저 대천사도 그 시나리오가 뭔지 알고 있는 거겠지. “시나리오가 끝나는 대로 <에덴>에 찾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기다리겠노라 답합니다.]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주변을 차지하던 라파엘의 기류가 완전히 사라졌다. 범람하는 격으로 가득 찼던 주변이 휑하니 비자,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무수한 설화들을 쌓으며 나는 꽤나 강해졌다. 중하급의 위인급 성좌들 정도는 찍어 누를 수 있는 격을 가지게 되었고, 화신들 중에 나보다 강한 존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천사의 ‘격’은 아득하고 드높았다.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 라파엘. 강력한 마왕 ‘아스모데우스’를 쓰러트렸던 대천사. 「김독자는 조용히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스모데우스······ 아니, 한 부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떠나 있었던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는 우선 시스템 메시지부터 점검했다. [부재중 도깨비 통신이 있습니다.] [발신자 : 상급 도깨비 비형] 비형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가 돌아왔는데 비형 녀석이 호들갑을 안 떠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메시지로 때우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화면을 조작해 메시지 창을 열었다. 메시지는 길었으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몇 가지 바쁜 일이 있다. 일들이 끝나는 대로 보러 가겠다. 대충 그런 내용이 담긴 장문의 메시지였다. ―근데 넌 니 새끼 제대로 안 돌보냐? 내가 궁금했던 소식은 메시지의 마지막에서야 등장했다. ―비유는 내가 데리고 있어. 뭐, 내 자식이기도 하니까. 네가 차원문 앞에 버려두고 가서 하마터면 혹부리들한테 빼앗길 뻔했다. 안 그래도 비유가 나타나지 않아서 걱정이 되던 참이었다. ―애 돌아가면 좀 놀랄 거다. 기대하라고. 비형의 메시지는 그렇게 끝났다.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비유가 비형과 함께 있다니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럼 슬슬 움직여 볼까. 쓰러진 암습조들을 한곳에 포개어 놓은 나는, 일단 일행들부터 찾기로 했다. . . . 그리고 십여 분째. 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공장]이 이렇게 넓었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좀처럼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독도법]이나 [길찾기] 스킬을 구매해서 익혀야 하나 싶을 정도였다. “저기요, 아무도 없어요?” 나는 유독 ‘처음 방문한 건물’에서 자주 길을 잃는 경향이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처음 진학했을 때, 처음으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 그리고 미노 소프트에 입사했을 때······. 생각해 보면 유상아와 처음 말문을 튼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이거 비상구가 대체 어디야?’」 마계에 있을 때는 공장 내부를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구조도 그때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의심 가는 방들을 하나씩 열어보기로 했다. 취이이이이익! 문을 열자마자 작은 촉수 괴물과 개구리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어떤 개체들은 시험관 안에 들어있었고, 어떤 것들은 자유롭게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독자 아저씨일 뻔했던 개구리> <거의 독자 아저씨였던 코끼리 괴수종> <아쉽게 독자 아저씨가 아니었던 촉수 괴물> 개구리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슛하고 혓바닥을 쏘았다. 나는 깜짝 놀라 방문을 닫았다. ······잠깐만, 이 방 설마······. 방문의 명패를 확인하려는데,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어떻게 밖으로 나왔어?” “독자 씨?” 식사를 든 이현성과 한수영이었다. * “그러니까, 독자 씨. 제가 35번 시나리오에서 말입니다······.” 이현성은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시나리오를 한바탕 늘어놓는 중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동시에, 이현성의 신체 곳곳을 면밀하게 살폈다. 이전보다 더 발달한 흉근. 그리고 근섬유 사이사이를 잇는 강철의 마력. 이제 이현성의 [강철화]는 숙련의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당장 46번 시나리오를 시작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수준. 조금 감동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일행들은 내가 준 가이드라인을 따라 성실하게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이현성의 이야기만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낮의 밀회’가 발동 중입니다.] [현재 화신 ‘한수영’이 대화에 참가 중입니다.] 한수영을 먼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시나리오 준비는 빨라도 항상 늦는 법. 빠른 대비를 위해서는 가장 적확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제공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은 하나뿐이었다. ―장하영이랑 파천신군은 어디 있어? ―파천검성이랑 키리오스랑 같이 다른 시나리오 지역으로 갔어. 초월좌 전용 시나리오를 받으러 간 것 같던데. ―한명오랑 공필두는? ―지금 북한에 있어. 공필두가 땅 알아볼 겸 북한 시나리오 수행하러 갔거든. 한명오는 눈치보다가 덤으로 끌려갔고. ······북한이라. 하긴, 지금쯤이면 슬슬 북한 화신들도 날뛸 때가 됐지. 지금의 북한이라면 꽤 쟁쟁한 성좌들이 몰려 있을 것이다. 물론 대부분은 위인급들이겠지만, 개중에는 설화급에 비견되는 성좌들도 있으니까. 가령 태왕(太王)이라든가······. ―넌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온 거야? ―멸살법 1863회차의 세계선. 한수영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뭐? 진짜? ―아, 거기 너도 있더라. 어느 쪽이 본체인진 모르겠지만. ―······본체? 뭔 개소리야? 내가 답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우리 앞을 막고 섰다. “······독자 씨.” 정희원이었다. “덕분에 푹 잤습니다.” 정희원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정희원의 시선은 천천히 움직여 한수영 쪽으로 향했다. 한순간 한수영과 정희원 사이에서 날카로운 전류 같은 게 튀었다. 차가운 눈길로 한수영을 노려보던 정희원이 고개를 돌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아까 침입자가 있어서 제 방 앞에······.” “처리하라고 지시했어요. 일어나셨으면 상아 씨한테 가보세요. 자세한 이야기는 그다음에 해요.” 평소보다도 훨씬 더 냉랭한 목소리. 내가 아는 정희원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곁에 있던 이현성이 어쩐지 서글픈 눈빛으로 멀어지는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정희원의 모습이 코너를 돌아 사라진 후, 나는 한수영에게 물었다. “뭐야?” “뭐.” “너랑 정희원 씨랑 뭐냐고.” 비죽 입술을 내미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싸울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곧 46번 시나리오인 거 잊었냐? 너 지금······.” “넌 3년 동안 여기에 없었잖아. 잘 모르면 닥치고 있어.” 한수영은 그 말만을 남기고 역시나 홱 돌아서며 저만치 멀어져 갔다. 졸지에 남은 것은 나와 이현성뿐. 축 늘어진 어깨의 이현성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마음이 울적해졌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듯했다. 내가 없었던 3년간, 일행들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불화가 있었던 것이다. 요령 없는 이현성이 그 일행들 사이에서 어떤 모양으로 있었을지 묻지 않아도 선연했다. 나는 이현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명백해 보였다. “현성 씨, 유상아 씨는 어디에 계시죠?” “······이쪽입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는 이현성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현성의 커다란 등을 쫓아 얼마간 걸어가자, 소박한 백색 칠로 마감된 작은 문이 하나 나왔다. 뜻밖에도 문 앞에는 아까 헤어졌던 정희원과 한수영도 서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 황당해진 내가 말을 걸려는데, 표정들이 조금 이상했다. 정희원이야 그렇다쳐도, 한수영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봤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쉬운 일이 하나 도 없 군.’」 시끄러워 인마.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일단은 유상아를 만나야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짧게 노크를 한 후 문을 움직이는 순간, 안쪽에서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김독잡니다.”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돌아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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