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305화
Episode 58. 별자리의 맥락
지난 3년 동안, 정희원에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충청 연합의 리더, 정희원!
―패왕의 시대는 갔다! 화신 최강은 멸악(滅惡)!
팬클럽이 생겼고, 각종 미디어에서는 그녀의 이야기를 기사화하거나 이야기로 가공해 상품으로 만들어내려는 이들도 나타났다. 검을 쓰는 화신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동경했다. 그녀를 성운에 섭외하려는 성좌들도 있었다.
물론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왜냐하면 정희원은 <스타 스트림>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성좌의 화신이었으니까.
문제는 그 유명한 배후성이, 무려 3년 동안이나 정희원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난 내 배후성이 죽은 줄 알았어요.”
그녀의 배후성은 3년 전의 사건 이후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정희원은 다른 화신들보다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 같은 초월좌들에게 매일같이 시달리며, 피나는 훈련을 받았다.
일행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은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그랬다면 조금은 덜 억울했을 텐데.”
정희원은 정말로 강해졌다.
그리고 강해진 그녀의 앞에, 사라졌던 배후성이 나타났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침묵합니다.]
정희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지금 나한테 뭐라고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헤헤 웃습니다.]
정희원은 웃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검의 그립에 손을 가져다 댈 뿐.
[화신 ‘정희원’이 자신의 배후성에게 ‘심판의 시간’의 발동을 준비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깜짝 놀랍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심판의 시간’은 악인을 상대로만 발동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정희원이 대답했다.
“알아요.”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가 쏟아졌다.
[절대선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정희원의 요청에 동의하였습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해당 요청에 동의합니다.]
[성좌, ‘정의와 화목의 친구’가 해당 요청에 동의합니다.]
[성좌, ‘방주의 주인’이 해당 요청에 동의합니다.]
츠츠츠츠츳!
[절대선 계통의 성좌 일부가 요청에 반대하였습니다!]
[반대 1표로 스킬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정희원이 실눈을 뜬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의 눈을 피합니다.]
정희원이 검에서 손을 떼며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으로, 배후성이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슬픔과 기쁨.
미안함과 죄책감.
사실, 정희원도 알고 있었다.
왜 우리엘이 지난 3년 동안 근신할 수밖에 없었는지.
‘마왕 선발전’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에덴>에서의 처분이 겨우 근신으로 그친 게 사실 신기한 일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다.
더군다나 3년 만에 나타난 배후성이 하는 말이라는 게······.
“독자 씨 보고 싶으면 직접 가서 보면 되잖아요? 성채 꼭대기에 있는 거 뻔히 아시면서.”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아직 보호 관찰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상징체 소환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고민하던 정희원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대신 이상한 짓은 하지 마세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정말 김독자가 감금되어 있냐고 묻습니다.]
“······왜 좋아해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근데 진짜 김독자가 오징어가 되었냐고 묻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지금 가고 있으니 직접 보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정희원은 김독자가 갇혀 있는 성채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이곳은 천제결계(天帝結界)가 시행된 공간입니다.]
[화신 ‘정희원’은 출입 허가 대상자입니다.]
문이 열리자, 호화로운 방의 내부가 등장했다. 말이 감금이지, 웬만한 5성 호텔의 스위트룸 뺨치는 방이었다.
테이블 위엔 배고프면 언제든 집어 먹을 수 있는 호화로운 진수성찬이 세팅되어 있었고, 킹사이즈의 침대에는 숙면에 도움을 주는 스킬이 걸려 있었다. 작은 협탁 위에는 멸망 이전의 세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판타지 소설이 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독자가 판타지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정희원은 그중 한 권을 시험 삼아 집어 보았다. 『멸망 이후의 세카이』. 작가 싱샹숑······.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비명을 지릅니다!]
고개를 돌리자,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김독자가 보였다. 걷어 올려진 소매에 설화 팩 공급을 위한 카테터가 꽂혀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팩에는 이설화가 만든 수면제가 잔뜩 들어있었다. 가까이 가자, 의자 위에 너부러진 김독자의 얼굴이 보였다.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 김독자가 부스스 눈을 떴다.
“······희원 씨?”
정희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고된 시간에 지친, 김독자의 무방비한 얼굴.
쿡, 하고 마음 한구석이 쑤셔왔다.
“여긴 대체······.”
김독자를 다시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잔뜩 있었다.
화를 내고 싶었고, 원망을 토하고 싶었고,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던 거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왜인지, 이렇게 김독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 많은 감정들은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감정인지.
아니면 배후성의 감정인지, 정희원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정희원은 카테터를 통해 흘러 들어가는 수면제의 양을 조절했다.
“독자 씨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 아니, 천사가 있어요.”
정희원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마치 태초의 빛을 연상시키는, 대천사의 포근한 빛.
정희원은 김독자의 몸을 들어 안고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김독자가 잠들었다. 새하얀 광휘에 덮인 정희원의 손이 몇 번인가 김독자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구원의 마왕’을 바라봅니다.]
말로 전할 수 없기에 더 가치 있는 감정이 있다.
그동안 정희원은 우리엘의 ‘전우애’를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지금만큼은 그 마음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
긴 꿈을 꾸었다.
조금 이상한 꿈이었다.
―바이탈 체크 양호.
―설화 팩 안정적으로 투여 중입니다.
환청처럼 이설화와 아일렌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형······ 음냐······.
가끔은 허리에 매달린 이길영과 신유승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우어어어어! 독자 씨이이이!
괴수처럼 울부짖는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리고······.
얼핏,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 것도 같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꿈이라면, 차라리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야, 깨려고 하잖아! 빨리 수면제 투여해!
어슴푸레한 한수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피식 웃었다.
말하자면 이 꿈은, 나 한 사람만을 위한 연극인 것이다.
마치 ‘멸살법’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깨어날 수 있었지만, 김독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기꺼이 그 연극의 관객이 되어주기로 했다.
「멸망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김독자는 편안한 잠을 잤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항상 조급해져 있던 마음. 누군가에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 내가 믿는 것을, 함께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푹 쉬어요, 독자 씨.
······그래, 46번 시나리오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까.
마음을 놓는 순간, 까마득한 잠이 나를 덮쳐왔다.
*
뒷덜미를 붙잡힌 이길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누나! 꼭 나까지 여기 와야 돼요? 난 독자 형이랑 더 있고 싶은데!”
“충분히 같이 있었잖아.”
“신유승은 여덟 시간이나 같이 있었어요! 난 여섯 시간밖에 같이 못 있었고!”
이지혜가 심통난 듯 입술을 내민 이길영에게 꿀밤을 먹였다.
“저 녀석들은 제공력(制空力)이 거슬린다고. 상대할 수 있는 건 너랑 유승이뿐이잖아? 그리고 독자 아저씬 푹 재워놨으니까 언제든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언니, 거의 도착했어요.”
신유승의 말과 함께, [키메라 드래곤]이 급격한 하강을 시작했다. 아래로 보이는 ‘경기 연합’의 건물들. ‘부산 연합’을 담당하는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무슨 왕국을 만들었다더니, 진짜였네.”
노예처럼 다루어지는 도민들이 고통 속에 울부짖고 있었다.
입술을 실룩인 이지혜가 말했다.
“박살내 버리자고.”
이지혜가 검을 뽑아 들자, 이길영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야, 신유승. 내가 처리할 테니까 넌 빠져.”
“시끄러워, 독자 아저씨도 못 알아본 게.”
“······가랏, 티타노―MKⅡ!”
그오오오오!
이길영의 명령과 동시에, 단단한 아머를 착용한 충왕종 부대가 창공을 날아왔다.
무려 다섯 마리의 4급 충왕종이었다.
“적습이다!”
스거걱!
거대한 사마귀의 낫에 잘려나가는 건물들을 보며, 이지혜가 물었다.
“티타노 죽었다며?”
“걘 그냥 티타노고요, 쟨 티타노―MKⅡ에요.”
“대체 무슨 차이가······.”
콰아아아앙!
적진의 중심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티타노가 습격한 쪽은 아니었다. 경기 연합의 주축을 구성하던 고층 건물들이 붕괴하며, 엄청난 후폭풍이 발생하고 있었다. 창공을 부유하던 비행정들이 낙뢰처럼 떨어지는 검강을 맞고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지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더니······.”
한바탕 광풍이 몰아친 자리에는 폐허만이 남았다.
허겁지겁 달아나는 연합의 졸개들을 도륙하는 한 사내.
유중혁이었다.
“자, 잠깐! 잠깐만! 멈춰라 패왕!”
경기 연합의 간부로 보이는 한 사내가 허둥지둥 외쳤다.
“지금 날 죽이면 곤란해질 거다! 우리 측에는 인질이 있다!”
인질이라는 말에, 처음으로 유중혁의 칼이 멈칫했다.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사내가 계속해서 외쳤다.
“후우······ 월하현제(月下賢帝)가 성채의 최상층에서 나오지 않는 이유는 병환이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라지?”
당황한 이지혜와 신유승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저 자식이 뭐라는 거야?”
“······월하현제면 상아 언니잖아요?”
사내의 말은 계속되었다.
“하하, 마계의 방벽을 뚫느라 아주 오래 걸렸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무슨 헛소리지?”
“너희들이 자리를 비운 성채에 우리 연합의 정예 암습조가 침투했다. 즉, 월하현제의 목숨은 이제 우리 손아귀에 있다는 거지. 결계를 뚫는 게 꽤 힘들었지만, 네 동료의 목숨은 이제 우리 손안에―”
“결계를 뚫었다고?”
유중혁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번졌다. 표정은 곧 다른 일행들의 얼굴로 옮겨갔다. 신유승이 말했다.
“······상아 언니 방에 결계 같은 건 없잖아요?”
“그럼 저 미친놈이 말하는 건······.”
일행들은 동시에 서울 쪽을 돌아보았다.
*
같은 시각, [공단]의 성채에는 고공 낙하를 통해 침투한 열 명의 암습조가 있었다.
모두 ‘경기 연합’의 정예 암습조들이었다.
―이곳이로군.
―예, 맞습니다.
―술식 해제팀, 시작해라.
조장의 명령에 술식 해제를 맡은 조원들이 달려들었다. 조원 중 하나가 물었다.
―혹시 흑염마황이 있는 건 아니겠죠? 우리 간부들, 그때 왕창 썰려 나갔지 않습니까?
흑염여제가 흑염마황으로, 월하신녀가 월하현제로 별명이 바뀐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모두 1년 전 있었던 ‘성남 대참사’ 때문이었다.
―흑염마황은 자리를 비웠어. 안에 있는 건 월하현제다.
―우리만으로 괜찮을까요?
―병환이 깊다는 소문이 있어. 그 여자 혼자라면 아무 문제 없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을 막고 있던 술식이 풀렸다.
―해제 완료했습니다!
―벌써? 생각보다 빨랐군.
―그게, 천제결계는 안에서는 뚫기 어렵지만, 바깥에서는 쉽습니다.
―우습군. 뭐 그런 결계가 다 있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정말이지 멍청한······.
헤헤 웃는 암습 조원을 뒤로하고, 조장이 문을 열었다.
―어디 잘난 ‘월하현제’의 솜씨를 한 번 감상해보실까. 모두 침투 준비!
그런데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그들의 귓가를 잠식했다.
[성좌, ‘검은 황야의 암살자’가 경고성을 발합니다!]
[성좌, ‘흑월의 사냥꾼’이 경악합니다!]
[성좌, ‘얼어붙은 심장의 기사’가 경련을 일으킵니다.]
모두 그들의 배후성들이었다.
―이거 대체 뭐지? 갑자기 배후성이······.
―조, 조장님도 들으셨습니까?
궁금증은 길지 않았다. 문 너머로 느껴지는 가공할 격의 향연. 이제껏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불가해한 아우라가 그들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몸이······?
차원이 다른 격에 암습조 전원의 발이 굳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처럼 푹 쉬는 중이었는데, 역시 내 팔자가 그렇지.”
삐거덕거리며 열린 문 사이로, 백색의 코트를 걸친 한 사내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싱긋 웃은 사내가, 서늘한 손바닥을 암습조장의 어깨 위에 턱 얹었다.
“꺼내 줘서 고마워요,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