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297화
유중혁의 질문에, 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정확히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자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다시 한 번 속내가 들려왔다.
「네가 살았던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제야 나는 유중혁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깨달았다.
녀석은 내가 살았던 세계를 본 것이다.
「히 히」
머릿속에서 ‘제4의 벽’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내가 입을 열려는 순간, 달려온 한수영이 내 뒷통수를 눌러 바닥에 처박았다.
“유중혁! 나와 약속했을 텐데?”
이어지는 한수영의 목소리에 악이 담겨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고, 나는 새로운 세계를 얻는다. 그게 우리 교환 조건이잖아.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야!”
지면과 마주한 입술에서 흙 맛이 느껴졌다.
「김독자는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유중혁이 내 기억을 통해 무엇을 느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태도를 보면, 최소한 이번 삶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르르르르르······.
봉인구의 위쪽에서 끔찍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으아아아······.]
[모두 달아나! 빨리, 이 시나리오에서 탈출해!]
경악한 성좌들이 하나둘 이 시나리오를 탈출하기 위해 용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저 하늘의 성운들조차 설화병기를 밀집시키며 대열을 물리고 있었다.
저 ‘묵시룡’은 실로 그런 존재였다.
<에덴>을 멸망시켰던 결정적인 원흉이자, <스타 스트림> 최악의 재앙.
아비규환 속에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외쳤다.
“혹시 이 녀석 때문이냐?”
내 머리채를 잡은 한수영이 소리를 질러댔다.
“이 녀석이, 네 정신에 뭔가 영향을 끼친 거냐고. ······한심하게, 이제 와서 살고 싶어지기라도 한 거냐? 지쳤다며? 더이상 어떤 시나리오도 수행하고 싶지 않다며?”
한수영이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갈 때마다, 내 가슴에도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유중혁은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나는 그런 녀석이 살아온 삶을 알고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이었다.
어머니가 교도소에 갇혔을 때도, 내가 왕따를 당했을 때도, 수능을 보고, 군대를 가고, 다시 회사에 입사했을 때도. 언제나 내가 줄곧 지켜보았던 그 유중혁이었다. 냉혹하고 계산적이며, 포기하지 않는 유중혁.
어린 나는 그런 유중혁을 보며 살아왔다.
살아올 수 있었다.
그래서 놈을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저 유중혁이 이곳에서 죽으면, 내가 알던 ‘멸살법’은 영원히 사라진다.
유중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
너무나 분명하고, 명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분명한 목소리가 내게만 들려왔다.
「살고 싶다.」
바닥을 그러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수영이 외쳤다.
“그럼 왜 그딴 짓을 한 건데? 씨발, 왜 안 뒈지고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냐고!”
“······.”
“어떻게든 묵시룡의 봉인을 재생시켜. 검을 뽑든, 뭘 하든, 어떻게든 해 보라고!”
가능할 턱이 없다는 걸 한수영도 알고 있었다.
한수영은 무너지고 있었다. 모든 것을 ‘예상 표절’하며 살아왔던 그녀의 세계가, 처음으로 붕괴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한 한수영이 나를 내팽개치고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이 유중혁의 목을 노리고 움직였다. 하지만 끝내, 한수영은 유중혁을 찌를 수 없었다.
“빌어먹을······!”
유중혁의 목젖에 닿은 한수영의 칼날이 멈췄다.
한수영도 아는 것이다.
여기서 유중혁을 죽여 봐야, 유중혁은 회귀할 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포기해. 한수영.”
“닥쳐!”
“너도 나도 실패한 거야. 이제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해.”
“닥치라고! 네가 뭘 알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그 순간, 자신의 목젖에 닿은 칼날을 보며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여기서 끝내고 싶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가 본 그 세계처럼······.」
파르르르······.
유중혁의 몸이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자아가 충돌하듯이, 유중혁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통증이 심해지는 듯, 유중혁이 자신의 머리를 붙잡고 천천히 주저앉았다. 놀란 한수영이 한 걸음을 물러서자, 유중혁의 몸에서 강력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한수영의 몸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나는 엉겁결에 녀석을 받으며 바닥을 굴렀다.
고오오오오······.
주저앉은 유중혁의 몸에서 설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겪어온 기억들이 허공을 떠다니며 나와 한수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억들 속에서 유중혁이 말했다.
「“한수영, 나를 죽일 방법을 찾아라.”」
그러자, 기억 속의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대신 약속해. 나를 돕겠다고.”」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두 사람의 약조.
겉으로 보기엔 완벽했던 1863회차는 단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 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것을 잃었다.
「“내 계획을 실행하면, 네 여동생은 구할 수 없어.”」
자신의 여동생을 잃었고.
「“파천검성과 파천신군도 구할 수 없어. <제1 무림>까지 챙길 여유는 없으니까.”」
하나뿐인 스승과 사저를 잃었다.
「“이 세계의 적이 되도록 해. 너를 적대하는 모두가 뭉칠 수 있도록.”」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로, 이 세계의 악이 되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불행했다.
그 어떤 회차보다도 더 불행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외쳤다.
“유중혁!”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죽고 싶어하는 유중혁의 마음을 이해했음에도, 계속 녀석이 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단지, 녀석의 일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러면 뭐가 옳았던 것인가.
유중혁이 물었다.
「네가 보여준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내 말이 저 유중혁에게 위안이 될지 어떨지는 모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선언했다.
[존재해.]
그것만이 내가 녀석에게 전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곳에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에 있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고.
그러자 유중혁이 답했다.
「······그렇군.」
이상하게도, 그 순간 유중혁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너는 내가 죽어야만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있겠지?」
“아냐, 그렇지 않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야. 네가 죽지 않아도,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나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정보들을 정리했다.
가능한 최선의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다.
3회차의 세계는 유상아와 한수영에게 잘 부탁해 놨으니, 내가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것이다.
그리고 1863회차는 이미 95번째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에는 살아남은 일행들도 많으니 3년, 아니 늦어도 5년만 고생하면······.
고개를 들자, 유중혁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면 늦는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이곳에 있으면, 너는 그 세계를 구할 수 없다.」
반박하려는 순간, 유중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유중혁에게서 일어나는 진동은 점점 더 커져서, 녀석의 상이 여러 개로 보일 지경이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특성 개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새로운 특성을 획득하였습니다!]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분화하는 유중혁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그 세계의 ■■가 궁금해졌다.」
흘러 넘치는 설화 속에서, 정확히 두 명으로 나누어지는 유중혁.
나는 그 스킬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아바타].
오직 ‘작가’ 특성을 가진 존재만이 쓸 수 있는 스킬.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수영의 전유물이었던 스킬이었다.
“유중혁! 너, 너······!”
입을 벌린 한수영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당황한 그녀의 속내가,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만약, 한 사람의 존재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
수만 명의 한수영이 말하고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두 개의 분신으로 나누어진다면, 둘 중 어느 쪽을 ‘진짜’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등줄기에 서서히 소름이 돋았다. 1863회차의 한수영이 가진 기억들. 정확히 둘로 나누어지는 그녀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것은 한수영의 경험이었고, 지금 유중혁이 겪는 일이기도 했다.
눈부신 광휘 속에서 둘로 분열한 유중혁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유중혁이 말했다.
“나는 죽고 싶다.”
그러자, 다른 유중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다른 유중혁은 말을 잇다 말고, 넝마가 된 자신의 검은 코트를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그 코트를 바닥에 벗어 던졌다.
“나는 살고 싶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김남운이 입고 있던 하얀 코트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빌려준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유중혁은 그것을 주워, 자신의 몸에 걸쳤다. 하얀 코트는 처음부터 녀석의 것이었던 것처럼, 몸에 맞게 착 달라 붙었다.
하얀 코트를 입은 유중혁과 검은 코트를 입은 유중혁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방법은 하나뿐.”
두 명의 유중혁이, 서로를 향해 [진천패도]를 겨누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당황한 일행들이 외치고 있었다.
“뭐야, 저 자식 뭐하는 거야!”
“왜 갑자기 둘이 된 거죠?”
허공에서 빛살이 몰아치며 [파천검도]와 [파천검도]가 부딪쳤다.
“맙소사, 저 녀석······.”
오직 한수영만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하나의 존재가 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존재의 배후성은 하나뿐이다.」
저것이 유중혁이 찾아낸 답이었다.
나는 녀석을 향해 외쳤다.
“멈춰 유중혁! 멈추라고!”
이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서, 나를 3회차로 되돌려 보낼 방법.
자신의 죽음을 만족하며, 동시에 계속해서 살아갈 방법.
“어느 쪽이 살아남든, 너는 또 회귀하게 될 거야!”
두 명의 유중혁은 나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죽는다.」
「나는 회귀한다.」
유중혁은 모두 알고 있었다.
너무나 잘 알았기에, 이 방법을 선택했다.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난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 모든 것은 처음부터 시작된다.」
한수영도 나도 알지 못했던 이 세계의 결말이 그곳에 있었다.
푸슈슉!
진천패도에 꿰뚫린 검은 코트 자락이 흔들렸다.
정확히 절반의 기억. 유중혁이 쌓아온 그 무수한 기억들이, 허공에 흩날리고 있었다.
성흔 ‘회귀’를 발동할 수 있는 쪽은 하나 뿐.
그렇기에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검은 코트의 유중혁이, 죽음을 택한 유중혁이라는 것을.
[화신 ‘유중혁’이 사망하였습니다.]
맞은 편에 하얀 코트의 유중혁이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죽인 유중혁.
그러나 그 역시 검에 찔린 것은 마찬가지였다. 배를 뚫고 나온 [진천패도]. 그 속도는 느렸지만, 그 또한 죽어가고 있었다.
[화신 ‘유중혁’의 배후성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성흔, ‘회귀 Lv.???’가 발동합니다.]
[화신 ‘유중혁’이 배후성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유중혁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뜰 것이고, 원작에는 없었던 1864회차의 지하철에서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건 네 세계를 보여준 보답이다.」
하얀 유중혁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설화 중의 일부가 나에게 닿았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설화가 당신에게 깃듭니다.]
나는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내 유년을 지켜줬던 인물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사라지고 있었다.
「다음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모습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이어지던 유중혁의 속마음이,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츠츠츠츠츳!
그에게 더이상 ‘전지적 독자 시점’은 통하지 않았다.
[해당 인물은 ‘등장인물’이 아닙니다.]
세계의 빛 속에서 스러지는 유중혁의 모습.
비틀거리며 내가 다가갔을 때, 이미 유중혁은 세계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돌아보자, 한수영이 절망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당신은 ‘이계의 언약’의 클리어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눈부신 빛이 재처럼 허공에 나리고, 창백한 현실의 광경이 드러났다.
그 속에서 유중혁만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