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296화 극심한 현기증과 함께, 일순 나는 내가 살아온 역사 전체가 이지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유중혁의 배후성.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묘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아주 강력하고 순수한. 마치 욕망의 원형 같은 것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 어린 아기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귓가에 맴돌았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반토막 난 사인참사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유중혁의 링크는 끊어지지 않았다. 나는 실패한 것이다. 고개를 들자 한수영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너도 봤겠지?”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한수영. 녀석의 허리춤에서 내 것과 똑같은 [사인참사검]이 흔들리고 있었다. “······너도 이미 해봤던 거냐?” “당연하지. 난 너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시도했어. 성운의 힘을 빌려서 베었었지.” 어쩌면 한수영은, 나보다 더 명확한 형태로 배후성의 실체를 확인했을지도 모른다. “그건 대체 뭐였지?” “글쎄. 정확히는 모르지. 하지만 조금은 짐작이 가지 않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마지막 계획이 실패했으니 이제 알았겠네. 방법이 없다는 걸.” “······.” “아까 말했지만, 이 계획은 유중혁도 동의한 거야.” “유중혁이 동의했다고?” “너, 생각을 읽을 수 있잖아. 저 녀석의 생각도 읽은 거 아니었어?”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유중혁이 한수영의 검을 쳐냈다. 나는 내 앞을 막아선 유중혁의 등을 보았다. 분명, 지금이라면 녀석에게도 ‘전지적 독자 시점’의 2단계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스킬을 발동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충족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그러자, 유중혁의 머릿속이 들려왔다. 녀석의 의식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말들은 먼지처럼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말들은 눈처럼 내 곁에 하나둘씩 내려, 이내는 폭설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 . 「죽고 싶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 .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멸살법’의 텍스트 속에 억눌려 있던 한 인간의 내면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내게 한수영이 성큼 다가왔다. 턱 끝에 녀석의 머리카락이 스쳐갔고, 코트 속에 불쑥 들어온 손이 ‘아론다이트’를 꺼내갔다. 마침내 다섯 자루의 검을 모은 한수영이, 피식 웃더니 내게서 한 걸음씩 멀어져 갔다. 유중혁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한수영이 저 검을 모두 꽂아 넣으면, 유중혁은 영원히 이 회차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영면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이 세계에 어울리는 결말인 것이다. 내 귓가에 어떤 말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쏟아지는 무수한 목소리 속에 들어 있는, 아주 희미한 목소리. 나는 부러진 사인참사검을 품속에 넣은 후, 멀어지는 한수영을 향해 달려갔다. 강한 악력에 코트의 어깨가 구겨지자,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오기를 부릴 셈이야?” 나는 유중혁을 보았다. 분명히 나는 들었다. 지금도 들리고 있었다. 「살고 싶다.」 아주 희미하지만, 아주 옅은 그 하나의 목소리가. 그곳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한수영이 내 손을 뿌리치며 짜증을 냈다. “좋게 말할 때 놔. 너랑 내가 원하는 걸 이루려면 유중혁을 죽여야만 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손에 쥐었다. 기이이잉, 하고 울어 젖히는 칼날과 함께, 한수영이 표정을 굳히며 내게서 물러섰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어차피 너한테 방법은 없어.” 맞다. 방법은 없다. 이계의 언약을 해결하며 유중혁을 살릴 방법은, 내게 없다. 밤새도록 읽은 ‘멸살법’어디에도 그런 방법은 없었다. “방법은 있어.” 하지만, 다른 방법은 있었다. “유중혁!” 내 외침에, 벼락같이 달려든 유중혁이 한수영에게 일격을 먹였다. 그 짧은 틈에, 유중혁은 한수영이 가지고 있던 네 자루의 검을 수습했다. 성검 아스칼론. 천둥검 그람. 단룡검 리딜. 용살검 아론다이트. 용살의 설화를 지닌 검들. 모두, 이 시나리오의 열쇠가 되는 검이었다. “가, 유중혁! 묵시룡을 해방해!” “무슨 개수작이야!” 화가 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온몸을 부딪쳐 한수영을 안고 굴렀다. 한수영이 나를 발로 차며 외쳤다. “어차피 네 자루뿐이잖아! 너희는 시나리오를 깨지도 못해!” “아니, 한 자루 더 있어.” 나는 품속에서 한 자루의 검을 끄집어냈다. 초체검(草薙剣). 언젠가, [피스 랜드]에서 유중혁과 함께 야마타노오로치를 사냥하고 얻은 검이었다. 초체검은 야마타노오로치를 죽일 때 사용한 ‘토츠카노츠루기’를 재료로 썼기에 용살의 설화를 오롯이 계승하고 있었다. “받아, 유중혁!” [바람의 길]을 타고 쏘아진 검을, 유중혁이 받아냈다. 마침내 용살을 이룬 다섯 자루의 검이 모두 모인 것이다. 경악한 한수영이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가······!” 한수영이 가진 ‘격’과 내가 내뿜은 ‘격’이 충돌했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하는 동시에 한수영에게 백청강기를 쏟아부었다. 그 마력을 밀어내며, 한수영이 외쳤다. “모두 유중혁 잡아!” 한수영의 말에, 흩어져 싸우던 일행들의 시선이 동시에 유중혁에게 집중되었다. “내가 잡는다!” 가장 먼저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몸을 날렸고. “젠장, 배신 때릴 줄 알았다니까······!” 이지혜와, 이현성도 한발 늦게 나섰다.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무려 삼인이 한꺼번에 유중혁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가공할 아우라를 내뿜는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며 외쳤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만약 이 시나리오가 클리어 되면―” 이어지는 한수영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봉인구를 향해 나아가는 유중혁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김독자는 묵묵히 시나리오를 헤쳐가고 있을 3회차의 유중혁을 생각했다.」 이지혜가 휘두른 검이 유중혁의 등을 베었다. 「정의로운 유상아와, 영리한 3회차의 한수영을 생각했고.」 이현성이 달려들어 유중혁의 허리를 붙잡았고, [흑염]을 발동한 김남운이 유중혁의 얼굴을 가격했다. 「강인한 정희원과 그의 아이들― 이길영과 신유승을 오래도록 생각했으며.」 유중혁은 물러서지 않았다. 넝마가 된 새카만 코트를 입은 채, 피를 흘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휘두른 [파천검도]에 이지혜와 이현성이 휩쓸려 날아갔다. 「그를 ‘쓰레기’라고 놀리던 이지혜와, 걸핏하면 탄피를 잃어버리는 이현성을 생각했다.」 ······보고 싶네. 「그리하여, 김독자는 마침내 결심을 마쳤다.」 나는 한수영을 향해 말했다.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겠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그게······.” “여기 남아서, 이곳의 사람들과 함께 결말을 보겠어.” 이 세계의 끝은 내가 원하는 결말이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떻게든 결말까지만 간다면. “이계의 신격은 ‘은밀한 모략가’만 있는 건 아냐. 돌아갈 방법은 또 있을 거야. 시나리오를 깨고, 끝을 향해 나아가다 보면······.” “개소리 하지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어! 어차피 너도 이 모든 이야기의 끝은 모르잖아!” “몰라. 모르니까.” 나는 [봉인구]를 향해 솟구치는 유중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직접 만들거다.” 허공을 향해 도약한 한수영이 유중혁을 향해 새카만 창을 날렸다. 나는 몸을 던져 창을 대신 받아냈다. 충격을 받은 관절이 저릿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한수영의 눈빛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해보자 이거지?” 츠츠츠츠츳! 한수영의 눈에서 흘러나온 격이 정면으로 나를 위협했다. 이제껏 숨기고 있던 힘이 그녀의 내부에서 풀려 나오고 있었다. [성좌, ‘거짓 종막의 연출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알고 있었음에도 웃음이 나왔다. 이번 회차의 한수영은, 나처럼 배후성이 없었다. 녀석은 나처럼 성좌가 되었던 것이다. 기이이이잉! 심지어 녀석의 손에는 나와 같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쥐어져 있었다. 내 것보다 훨씬 더 강화 상태가 양호한, 새카만 에테르가 넘실거리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 검은 강기가 전방을 덮쳐오는 순간, 나 역시 [백청강기]를 발해 그 일격을 막아냈다. 쩌저저저적! 분명 막았는데도, 손뼈가 우그러지는 듯한 충격이 남았다. 한수영의 몸이 분열을 시작했다. [아바타]. 기억을 담은 무수한 분신들이, 유중혁과 나를 향해 일제히 도약했다. 나는 녀석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저렇게 전방위적으로 움직이는 분신들에겐 요피엘의 503 군단이 적격이다. “요피엘!” 그러나 대천사 요피엘은 대답이 없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 내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겠지. 대천사들은 본래의 세계선으로 돌아가고 싶어할 테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가 발동합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에게 가호를 내립니다.] 가브리엘의 간접 메시지와 함께, 대천사의 격이 내게 스며들었다. 동시에 한쪽 손에 가브리엘의 신창, ‘편애의 천칭’이 생성되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황합니다.] 어째서 가브리엘이 나를 돕기로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확실한 것은, 지금 그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 달려든 한수영의 분신이 외쳤다. “독자 주제에 방해하지마! 이야기의 주인은 작가야! 이 세계는 여기서 끝나야 해!” “너도 이 이야기의 주인은 아냐. 그런 결말은 네 세계에서나 만들어!” 나는 편애의 천칭을 휘둘러 먹구름을 향해 날아오르는 한수영의 아바타 십여 체를 단숨에 베어 냈다. 부러지지 않는 두 개의 신념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신성 속성의 에테르와 어둠 속성의 에테르가 뒤얽히며 기이한 파찰음을 만들어 냈다. 콰콰콰콰콰콰콰! 강력한 폭발과 함께, [전인화]의 전격이 부서졌다. 나는 상처투성이가 된 채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수영의 아바타는 꽤 많이 사라졌지만, 녀석은 여전히 건재했다. 분노한 한수영이 먼지를 헤치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나는 외쳤다. “가! 유중혁!” 허공으로 도약한 유중혁의 몸이, 마침내 봉인구에 도달했다. [다섯 개의 열쇠가 봉인구와 접합합니다.] 한수영이 외쳤다. “안 돼!” 거대한 봉인구에, 다섯 자루의 검이 열쇠가 되어 꽂혔다. 철커덕, 하고 열쇠 구멍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묵시룡의 봉인’을 해제합니다.]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용살의 힘이 잠든 용을 깨우고 있었다. 하늘 전체가 거대한 전구처럼 점멸했다. 절반의 밤과 절반의 낮이 하늘을 양분했고,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어마어마한 설화의 주인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성운, ‘올림포스’의 모든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성운, ‘베다’의 모든 성좌들이 기함합니다.] [성운, ‘파피루스’의 모든 성좌들이 경계심을 가집니다.] 성운들의 메시지 속에, 반구형 돔 속에 갇혀 있던 용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상을 마친 묵시룡은 허공을 향해 포효할 것이고, 저 먼 <스타 스트림>의 성좌들을 향해 꼬리를 휘두를 것이다. 저 밤하늘의 삼분의 일은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말 재수가 없다면 나도― 「김독자.」 고개를 돌리자, 대체 언제 다가온 것인지 [진천패도]를 쥔 유중혁이 곁에 서 있었다. 마치 이 시나리오의 클리어 따윈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 녀석과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소름이 돋았다. ······대체 언제부터 ‘회귀 우울증’이 풀려 있었던 거지? 섬연하게 뜬 그 두 눈은, 너무도 명백한 의식을 가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의식이, 나를 향해 묻고 있었다. 「네가 보여준 ‘그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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