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298화
유중혁이 죽었다.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립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제4의 벽’이 위태로울 정도로 심각하게 흔들립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폐소 공포라도 온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째서 갑자기 유중혁이 ‘작가’ 특성을 얻게 된 것인지, 왜 스스로 죽음과 회귀를 선택한 것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납득하는 것이 버거웠다.
내가 알던 원작의 유중혁은 더이상 없다.
한 줌 설화만이 녀석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런 기분이었던 건가.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 속의 이야기이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키고, 다시 뱉었다.
「그리고 유중혁은 등장인물에서 벗어났다.」
귀에서 이명이 들려오고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다시 한 번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더욱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감각이 천천히 되돌아오며 일행들의 수근거림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방금 다들 들었죠? 시나리오 클리어 됐어요!”
고오오오오!
뺨을 두 번 친 후 고개를 들자, 봉인구에서 흘러 넘치는 묵시룡의 격이 느껴졌다.
[성운, <올림포스>가 묵시룡의 전장을 준비합니다.]
[성운, <베다>가 재앙에 대비합니다.]
[성운, <탐라>가······.]
내 예상이 맞다면, 아직 시간은 있다.
나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다들 모여 주십시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행들은 나를 경계하면서도 하나둘 근처로 모였다.
누군가는 쓰러진 한수영을 부축하고 있었고, 김남운과 이지혜는 나를 향해 강한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 뒤 묵시룡이 해방됩니다. 그와 관련해―”
“닥쳐! 너 아까 그거 무슨 짓이야? 유중혁이랑 뭔 작당을 해서 사부를 공격한 거냐고!”
버럭 소리친 이지혜가 칼로 내 목을 노렸고, 이어서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아까 그건 대체······.”
“대장! 이 자식 어떡할까? 내가 조져버려?”
김남운마저 [흑염]이 발동한 오른손을 꺼냈다.
그때, 한수영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들 저 녀석 말 들어.”
“응?”
“저 녀석 말 들으라고.”
한수영의 눈은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 텅 빈 동공이, 녀석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방증은 아니었다.
한수영은 나와 닮았다.
겉으로는 저렇게 보여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처해진 상황을 납득하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다음의 계획을 생각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이현성, 김남운, 이설화, 이지혜, 신유승······.
살아남은 1863회차의 사람들.
한수영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수영은 당신들을 이용한 거라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당신들의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려 했다고.
그럼에도 그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다들 대장 잘 챙겨. 섣불리 행동하지 말고. 일단 독자 씨 말을 들어 보자.”
이들이, 진심으로 한수영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성의 만류에 한결 풀이 꺾인 일행들이 나를 보았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묵시룡의 해방은 봉인이 풀렸다고 끝난 게 아닙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시나리오의 마지막은······.”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그러자, 다른 일행들도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봉인구 속에 구겨 넣어진 거구. 조금씩 부서지는 봉인구의 조각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을 덮는 격의 밀도가 진해지고 있었다.
나는 [제4의 벽]에 기대어 텅 빈 말들을 줄줄이 내뱉었다.
“다들 본부로 돌아가서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하죠. 아마 시간이 사흘 정도 남았을 겁니다.”
*
나는 곧바로 1863회차를 떠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이 회차의 인물들 역시 내가 좋아했던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묵시룡의 해방’은 마지막 열쇠를 ‘초체검’으로 사용함으로써 약간의 시간을 벌었다. 초체검은 용살의 열쇠로 쓰기에는 격이 조금 떨어지는 편이었고, 그 때문에 묵시룡의 해방 또한 시일이 약간 늦춰진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을 요긴하게 써야 했다.
어차피 한수영이 이 루트를 택한 이상 성운들의 파멸은 예정되어 있다. 중요한 것은 지구가 그 파멸을 피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본부의 상황실에서 이현성에게 내가 아는 상당량의 정보들을 넘겼다.
모두 내가 사전에 짜 놓았던 미래 계획들이었다.
묵시룡의 재앙을 피하는 것에서부터, 앞으로 얻어야 할 새로운 설화와 아이템들, 그리고 손을 잡아야 할 강자들의 목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이야기를 메모하며 듣던 이현성이 문득 고개를 들며 물었다.
“······독자 씨는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계신 겁니까?”
“한수영이 알고 있는 이유와 같습니다.”
불필요한 설명을 피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었는데, 이현성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이현성은 뜻밖의 말을 했다.
“독자 씨도 혹시 ‘표절 작가’이신 겁니까?”
“······표절 작가요?”
“엇······ 아니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당혹감을 추스르며 되물었다.
“한수영이 자기 특성을 이야기 했나요?”
“아, 그게······.”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이현성.
믿어지지가 않았다.
저 자존심 강하고,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한수영이 원작의 등장인물에게 자신의 특성을 드러냈다고? 대체 왜?
“전부 밖으로 나가.”
생각하기가 무섭게, 상황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있었다.
모자를 깊게 덮어쓴 한수영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고분고분 고개를 숙인 이현성이 짐을 챙겨 상황실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상황실에 남은 이는 한수영과 나뿐.
내가 ‘이계의 언약’을 클리어 했으니, 분명 한수영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상황이라면, 녀석이 내게 적의를 드러낼 이유는 없다.
“정신 좀 차린 모양이네.”
“시끄러워.”
한수영이 팔짱을 낀 채 풀썩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불만?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너 때문에 이제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뒈지게 생겼어.”
나는 상황실 밖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일행들을 보았다. 투명한 벽 밖으로 옹기종기 모인 일행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유중혁이 죽은 직후 한수영이 절망한 표정을 지었던 것은, 아마도 저들 때문이었을까. 나는 말했다.
“영원히 잠드는 것보단 다음 시나리오로 가는 게 나아.”
창밖에서, 얼핏 나와 눈이 마주친 이현성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현성은 한수영이 표절 작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현성은, 한수영이 그들을 버릴 것도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곰 같고, 눈치도 없지만 속이 깊은 사내. 그런 이현성이라면,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한수영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묵시룡이 해방되었다고 다 끝난 건 아니야. 너도 알잖아?”
고개를 숙인 한수영은 대답이 없었다. 창공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묵시룡의 기파. 녀석이 해방되면 <스타 스트림>에는 재앙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의 시나리오가 모두 끝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1863회차의 유중혁은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고도 시나리오의 끝을 보았으니까.
“일행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네가 잘못한 것과, 숨겼던 것들까지 전부. 완벽한 전개가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해나갈 방법은 있어.”
“······.”
“아직 힘을 빌릴 수 있는 곳은 많아. 안나 크로프트의 ‘차라투스트라’, ‘종말의 구도자’, ‘초월좌들의 왕’, 그리고 환생자의 별에 사는 ‘그 녀석’도······.”
“시끄럽다고 했지.”
고개를 든 한수영이 나를 노려보았다. 깊이 눌러 쓴 모자 사이로 자존심만 남은 녀석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한수영의 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내가 녀석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자, 한수영이 으르렁거리며 모자를 더 깊게 눌러썼다.
나는 1863회차의 한수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한수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녀석이 만들고 싶었던 세계는, 어쩌면 내가 꿈꾸던 세계와도 조금은 닮아 있었으니까.
한수영이 짓씹듯 말했다.
“······유중혁이 ‘작가’가 될 줄이야.”
“왜 갑자기 그런 특성을 얻은 걸까?”
“새로운 이야기가 쓰고 싶어졌겠지. 아주 간절히. 그게 ‘작가’ 특성의 개방 조건이니까.”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은 말이었다.
마침표를 찍어 완성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세계에서······ 유중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 이야기의 바깥으로 나아갔다.
한수영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모자를 벗은 한수영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일문답 교환 어때? 귀찮으니까 시스템은 쓰지 말고.”
연기를 훅 뿜은 한수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거짓말 포함?”
“좋아.”
“너 먼저 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생각하는 ‘멸살법의 작가’는 누구냐?”
한수영이 다시 한 번 연기를 빨아들였다 뱉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주 거대한 아기.”
“······아기?”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에서, 오직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은 욕망만이 남은······ 무척이나 끔찍한 상상력을 가진, 어떤 아기.”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시나리오가 없는 세계.
이 <스타 스트림>에 그런 세계는 하나뿐이다.
“설마······.”
“입 밖으로 안 꺼내는 게 좋을 거야.”
한수영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존재’가 정말로 작가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진 상태로 한수영에게 말했다.
“네 차례야. 물어봐.”
“생각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시간 별로 없으니까 빨리 물어 봐. 난 내일 아침에 출발할 거거든.”
“내일 아침?”
“‘이계의 언약’을 완수했으니 나도 본래 세계선으로 돌아가야지.”
한수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용건이 끝났으니 내빼시겠다? 거참 대단하시네. 내 세계를 다 망쳐 놓고······.”
“내가 알고 있던 건 이현성에게 모두 전해줬어. 그대로 진행한다면 다른 도움이 없어도 저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갈 수 있을 거야.”
나는 상황실 밖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애초부터 이 세계는 ‘그들의 세계’다.
“넌 언제 출발할 거냐?”
“출발?”
“너도 이계의 언약을 완수했잖아.”
‘이계의 언약’을 끝낸 것은 나만이 아니다. 유중혁이 죽었으니 한수영 또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을 터.
녀석은 이제 ‘은밀한 모략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떠날 것이다.
“한수영?”
바닥을 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난 안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