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화

290화 “여, 이지혜.” 전형적인 양아치 말투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드는 사내. 녀석의 어깨에서 흔들리는 백색의 코트는, 틀림없는 [무한 차원의 아공간 코트]였다. 그러니까, 내 것과 같은 코트였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불쾌감을 드러냅니다.] 코트의 안주머니에서 꽃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리더라고? 밀려오는 충격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났다. 반사적으로 유중혁 쪽을 돌아보았지만, 바보가 된 유중혁이 내 충격을 공유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나는 다시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한쪽 손에 둘둘 붕대를 감고, 등은 반쯤 문에 기댄 채 새하얀 머리카락을 밀어 올리며 큭큭 웃는 사내. 「김 독자는 멍청 이이 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이 리더일 리가 없다. 애초에 저 ‘코트’는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못 구할 것도 없고. 이지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김남운.” “어.” “나 아는 척하지 말랬지. 들어가야 되니까 저리 꺼져.” “어, 어······.” 이지혜의 말에 김남운이 머쓱한 얼굴로 주춤거렸다. 그런 김남운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던 이지혜가 말했다. “그리고 사부 코트 그만 훔쳐 입어. 진짜 죽여버린다 너.” “······너도 한 번 입어 볼래?” 이지혜가 문을 쾅 박차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이지혜의 모습에 압도된 듯, 눈이 풀린 김남운이 이지혜의 뒷모습을 좇았다. ······그러고 보면 원작에서 얘들 관계가 그랬지. 새삼 여러 가지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이지혜에 이현성, 거기다 김남운이라······.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가슴 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었다. 이 회차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김남운이 나를 보며 말했다. “뭐야 넌? ······그 코트 내 거랑 같은데?” [등장인물 ‘김남운’이 당신에게 경계심을 드러냅니다!]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지하철에서 머리가 터져 죽었던 김남운. 만약, 그때의 김남운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어이 군인, 이 인간은 뭔······ 우왁 씨바! 유중혁이잖아!” 내 뒤쪽에 있던 유중혁을 발견한 김남운이 재빨리 한 걸음 물러났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이빨을 드러냅니다!] 망상악귀 김남운. 이번 회차에서, 심연의 흑염룡은 자신의 본래 화신을 찾아갔다. 자신을 향한 적의에 유중혁이 고개를 들자, 김남운이 움찔하며 말했다. “존나 멋있는 건 여전하군······ 싸우러 온 거냐, 유중혁?” 감춘 한쪽 손을 바들바들 떠는 김남운은 흥분한 것인지, 아니면 두려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흉악해지려는 기류를 막아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남운아, 이분들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뭐? 그럼 뭐하러 온 건데?” “그건······.”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건물 안쪽으로 성큼 들어갔다. “잠깐만요! 김독자 씨!” 뒤쪽에서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얼른 이 건물의 내부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내 생각이 맞다면······. 이 건물은, 초반 회차의 유중혁이 구상했던 바로 그 ‘건물’이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탁 트인 거대한 실내였다. 어지간한 대기업의 자재 창고만한 크기. 옆에 있던 커다란 문에서 환자들을 실은 침대차가 우르르 밀려왔다. 하나 같이 응급 환자들이었다. “거기 놀지 말고 환자들 이쪽으로 옮기세요!” 나는 얼떨결에 환자들이 실린 침대를 함께 밀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설화 팩! 설화 팩 가져와!” “이 환자 알러지 있으니까 동물 관련된 설화는 안돼!” 모두 훈련된 의료 스킬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것은 작은 무테 안경을 쓴 여인이었다. 여인은 배와 허벅지가 꿰뚫린 환자의 상세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이 환자 어디서 다친 거죠?” 나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회차에 따라 ‘독희’ 또는 ‘의선’으로 불리는 여인. 어떤 회차에서는 십악이지만, 어떤 회차에서는 유중혁의 연인이었던 사람. 내가 하얀 코트를 입고 있어서 같은 의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환자의 상세를 보며 대답했다. “······아마 ‘이름 없는 것들’에게 당한 것 같군요. 상처 부위의 오염도로 보아 촉수종에게 당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음?” 나를 보던 이설화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등장인물 ‘이설화’가 당신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습니다.] “······당신 누구죠?” 누구라고 해야 할까. 아니, 누구라고 말하면 그녀가 알아 들을까. “거기 아저씨, 뭐해? 빨리 따라와! 유중혁 잘 데리고!” 멍한 얼굴의 이설화를 남겨두고, 나는 유중혁과 함께 이지혜가 있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건물의 내벽은 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저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건물 전체의 구조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1층의 응급실 정문으로 끊임없이 환자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계의 신격, 또는 다른 성좌들과 맞서다 중상을 입은 화신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95번 시나리오쯤 되면 저런 비극은 일상이 된다. 나는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를 기억하고 있었다. 건물의 외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이 보였다. 연기를 내뿜는 성운들의 설화병기(說話兵器)들과 잠든 이계의 신격들의 모습. 그리고 그보다 더 위쪽에는, 창공을 덮은 새카만 수정구가 있었다. [묵시룡의 봉인구(封印球)] 저 봉인구가 바로, 이 95번 시나리오의 핵심이자 목표였다. 흩어진 다섯 개의 열쇠를 획득해 저 ‘묵시룡’을 해방시키는 것. ‘묵시룡’이 풀려나면 이 지구에는 멸망이 찾아오고, 시나리오를 완수한 이들은 자동으로 다음 시나리오로 넘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1863회차는 내가 아는 1863회차와는 너무 달랐다. ―강서 쪽에 1급 괴수종이 등장했습니다! 건물을 울리는 전파음. 계단을 올라가자, 환한 패널로 빛나는 상황실의 정경이 얼핏 보였다. ―서초에 파견 중인 인원들은 빠르게 철수하기 바랍니다! 염화(炎火)의 대천사가 등장했습니다! ―노원 쪽 성검 ‘아스칼론’ 발견! 현재 ‘이름 없는 것들’ 십여 개체와 교전 중입니다! 지원 바랍니다! 무수한 메시지들이 오가고 있었고, 그 모든 상황을 관리하는 인물이 있었다. 꼬질꼬질한 파마 머리.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헤드셋을 머리에 쓴 소년. ······아니, 더 이상 소년이 아니구나. 나는 어쩐지 먹먹한 심정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 내가 살았던 회차에서는 ‘왕’이 되지 못했던 그 아이가, 자신의 재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빠르게 전력 계산을 끝낸 한동훈의 손끝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노원 쪽은 민지원 씨의 화랑대와 차상경 씨의 미륵불(彌勒佛)이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올림포스 쪽의 화신들이 선점하기 전에 먼저 쳐야 합니다. ―성검 ‘아스칼론’을 반드시 확보해야 합니다. 서두르세요! 메시지로 오가는 익숙한 이름들. 민지원과 차상경. 각각 ‘매금지존’과 ‘외눈 미륵’을 성좌로 두고 있던 그들도, 95번 시나리오까지 무사히 살아남은 것이다. “뭘 그렇게 훔쳐 봐?” 곁에서 나를 감시하던 이지혜가 쿡 찌르듯 말했다.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놀라워서.” 내 대답이 의외였는지 잠깐 머뭇거리던 이지혜가 코를 쓱 문질렀다. “뭐, 우리 사부가 좀 대단하긴 하지. 모두 사부 덕분이야. 그 사람이 혼자 해낸 거니까.” 이지혜, 이현성, 이설화, 민지원, 차상경, 한동훈······ 거기다 저 ‘김남운’까지. 원작의 1863회차에서는 죽어야 했을 사람들이 모두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장의 수준도 높았고, 세력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살았던 3회차보다 높은 수준······ 아니, 내가 줄곧 바라던 정도의 수준이었다.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왔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1863회차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일어났어야 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고, 인류는 투쟁하고 있었다. 유중혁은, 아직 그 어떤 동료도 잃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3회차로 돌아가지 않아도, 여기서 제대로 된 결말을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이지혜가 말했다. “우린 사부와 함께 시나리오의 끝까지 갈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차갑고 섬뜩한 감각이 가슴 어귀를 스쳤다. 분명 저 풍경 속에는 모든 것이 있다. 단 한 가지를 빼면 말이다. 돌아 보자, 유중혁이 표정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 저 광경을 보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슬퍼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었던 것은 나 자신에 관한 것뿐이었다. “너흰 왜 유중혁을 싫어하는 거지?” “그 놈은 나쁜 놈이니까.” “왜 나쁜 놈인데?”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몰라.” “사람도 함부로 죽이고, 자기 목표를 위해서는 어떤 짓도 서슴지 않으니까.” 모두 맞는 말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게 전부야?”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맞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김독자는 생각했다. ‘너는 왜 유중혁이 그래야 했는지 모르잖아.’」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이것은 이지혜의 잘못이 아니었다.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너무나 잘 하고 있었고, 어쩌면 그렇기에 나는 화가 났다. “네가 말하는 ‘사부’는 대체 누구지?” “건물의 최상층에 있어. 저기 있는 엘리베이터 타고 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유중혁이 나를 따라오자, 이지혜가 칼을 빼들며 말했다. “유중혁은 여기 두고 가.” 예상했던 일이었다. 나는 텅 빈 표정의 유중혁과 이지혜를 번갈아 보았다.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유중혁에게 다가가 말했다. “유중혁, 행복한 생각하면서 기다려. 알겠지?” 유중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네게 위해를 가한다면······ 가장 불행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내 말에서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느꼈는지 이지혜가 끼어들었다. 나는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야! 대답하라니까! 방금 유중혁한테 한 말 뭔 뜻인데!” 이지혜에게 이곳이 얼마나 소중한 장소인지는 잘 알겠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누군가의 소중함은 곧 약점이다. “궁금하면 걔 한 번 건드려 보든가. 나라면 안 그러겠지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3, 4, 5······. 살짝 무거워지는 중력과 함께, 건물의 층수가 바뀌고 있었다. 숫자가 바뀌는 만큼 내 머릿속도 그 어느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누굴까. 가능성이 있는 후보는 몇 있었다. 앞으로의 미래 정보를 읽을 수 있기에, 미래 개변이 가능한 이들. 안나 크로프트나, 특정 성운의 소수 성좌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라고 해도,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들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은 원작에 속한 존재. 스스로의 힘만으로 원작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9, 10, 11······.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나 말고, 원작 밖의 존재가 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이상한 점은 있었다. 설령 원작 밖의 존재가 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진행할 수 있을 턱이 없다. 그것도 나와 닮은 방식으로······ 순간 발끝으로 소름이 올라왔다. ······설마? 다른 회차에도 유중혁은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띵. 엘리베이터의 알람음과 함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멸살법’의 수정본에 따르면, 유중혁의 다른 회차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후 몇 회차를 거쳐도, ‘나’는 없었다. 있었더라면, 수정본의 이야기 자체가 달라졌을테니까. 그러니 이 너머의 존재는 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다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남겼던 말이었다.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문이 열립니다. 문이 열리자, 호텔의 스위트 룸을 연상시키는 방이 나타났다. 불이 꺼진 어둑한 방이었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바닥. 새카만 의자 위에 앉은 인형(人形)이 보였다. “흠······ 당신이 이현성이 말한 그 사람이구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안에 은은한 불이 켜졌다. 어슴푸레한 시야 속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자루의 검이었다. 새하얀 광택을 자랑하는 검. 나는 그 검을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가 가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었으니까. 내가 물끄러미 그 검을 보고 있자, 의자에 앉은 인물이 말했다. “좋은 검이지. 이름 그대로, 진짜 안 부러지거든.” “알아. 나도 쓰고 있으니까.” “그래?” 의자의 인물은 검은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나는 반가면의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시나리오의 풍파를 겪으며 조금 변하긴 했지만, 틀림없었다.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본래라면 먹히지 않아야 할 스킬이었다. 이 녀석에겐 몇 번이나 사용해 보아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한 번 사용해 본 것은 왜일까. [해당 인물의 관련 정보가 지나치게 많습니다. ‘등장인물 일람’이 ‘요약 일람’으로 변환됩니다.] 어쩌면, 발동하지 않았기를 바랐기 때문은 아닐까. 눈앞에 줄줄이 떠오르는 정보들을 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좋아, 너는 어디서 나타난 누구지? 나는 김독자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처음부터 눈치 챘어야 했다. 나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멸살법’의 존재를 아는 여자. 애초에 이만한 일을 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그녀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묻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건 지금부터 알아가야 할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알 수 있었던 것도 있었다. 이 여자는, 내가 알고 있던 3회차의 그녀가 아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여자의 단발을 보며, 나는 물었다. “너는 한수영의 ‘아바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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