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289화 “섬멸해라, 쌍룡검.” 이지혜의 말과 함께, 두 자루의 검에서 마력이 폭발했다. 푸른 색의 용을 닮은 강기가 내 목줄기를 뜯기 위해 날아들고 있었다. 쌍룡검(雙龍劍). 충무공의 성유물이자, 한반도에서 구할 수 있는 최강의 명검이 빛을 뿜었다. 경지에 오른 [검도]의 궤적을 보며, 나는 전심전력을 다해 [전인화]와 [바람의 길]을 발동했다. “어쭈, 작아져? 어디서 굴러먹다 온 화신이야?” 해상제독 이지혜. 95번 시나리오까지 살아남은 그녀는, 명실상부한 ‘멸살법’ 최강의 100인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내가 기억하는 ‘원작’이 맞다면, 1863회차의 이지혜는 오래 전에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지혜는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쌍룡검의 궤적이 닿지 않을 고도까지 단번에 날아오르며 외쳤다. “이지혜, 멈춰! 난 네 적이 아니야!” “······뭐야, 날 알아? 하긴, 내가 좀 유명하긴 하지.” 뻔뻔한 말을 중얼거린 녀석이 웅크린 발도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 기술이 뭔지 알고 있었다. 순살(瞬殺). ‘멸살법’에서 손꼽히는 대인 기술 중 하나이자, 그 어떤 상대든 일검에 격살시킨다는 무시무시한 스킬. “벌레처럼 작아졌다고 내가 못 벨 것 같아?” 귀살이 일렁이는 이지혜의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스슷. 이지혜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검이 내 목을 노리는 감각이 일었고, 바로 다음 순간 벌어질 일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유중혁!” 집채만한 그림자가 눈앞을 덮는가 싶더니, 철과 철이 부딪치는 강렬한 파찰음이 울려 퍼졌다. 내 옆을 막아선 유중혁과, 그 유중혁을 향해 쌍룡검을 들이댄 이지혜. 까가가가각! 저 단단한 [진천패도]의 칼날에 작은 흠집이 나 있었다. 순살은 그만큼 강력한 기술이었다. 상대가 유중혁만 아니라면 말이다. 고오오오오! 1863회차의 유중혁은 누구보다 살인 기계에 가깝다. 결정한 일은 번복하지 않고, 죽이겠다 마음먹은 상대는 반드시 격살한다. 초월의 격을 발한 유중혁이 검을 휘둘렀고, 힘의 격차에서 밀려난 이지혜가 지상으로 추락했다. 패도를 쥔 유중혁의 신형이 이지혜를 쫓아 낙하했다. “유중혁! 멈춰!” 나는 지상에서 터져나오는 굉음을 향해 외쳤다. 뿌연 먼지 사이로 쓰러진 이지혜와 검을 내리치는 유중혁이 보였다. 멈추라는 내 말에도 유중혁은 멈추지 않았다. 녀석의 근처로 개연성의 스파크가 밀려들고 있었다. ‘회귀 우울증’이 풀리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기억! 행복한 기억!” 유중혁의 신형이 멈칫했다. “죽이지 마! 걔 죽이면 안돼!” 어째서 이지혜가 살아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적어도 유중혁이, 그녀를 죽이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먼지 속에서 일어난 이지혜가 이를 갈며 외쳤다. “무슨 뻘짓이지? 덤벼 패왕! 이번에야말로 개작살을 내줄 테니까!” 아무래도 이지혜와 유중혁의 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이지혜’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이상한 일인데, 하물며 적이 되었다고? “잠깐만! 너도 멈춰 이지혜! 우린 싸울 생각 없다고!” 내 말에도 이지혜는 멈추지 않았다. 내 명령 때문인지 유중혁의 움직임은 한결 소극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파스슷! 이지혜의 칼날에 베인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튀었다. 아무래도 ‘회귀 우울증’에 걸린 상태에서는 효과적인 방어 수단을 강구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공격 명령을 내리면 아까처럼 이지혜에게 달려들 것이 분명하고······ 제기랄. 나는 전인화를 유지한 채 유중혁의 어깨에 올라타 이지혜를 향해 외쳤다. “멈추라고 자식아! 유중혁은 네 사부잖아!” “사부? 뭔 개소리야? 이딴 괴물 사부로 둔 적 없어.” 이지혜의 눈이 사납게 빛났다. “내 사부는 훨씬 더 멋있는 사람이야.” 이지혜의 칼날에서 오색의 아우라가 흘렀다. 나는 반사적으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했다. 무슨 공격을 하든, 방향이라도 알면 피하기라도 쉬울 테니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스킬 발동이 취소됩니다!] ······유중혁의 이해도가 낮은 건 그렇다 쳐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이지혜가 그렇게 복잡한 인간은 아닐 텐데. 적어도, ‘내가 아는 이지혜’가 맞다면······. [등장인물 ‘이지혜’가 성흔 ‘칼의 노래 Lv.10’를 발동합니다!] ······기어코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그러면 이쪽에도 생각은 있다. 나는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강하게 움켜쥐며 성흔을 발동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5’를 발동합니다!] 내 칼날에서 솟아난 오색의 빛을 확인한 이지혜의 표정에 의아함이 스쳤다. 아직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 ‘성흔’은 확률 싸움. 어디, 누가 더 운이 좋은지 보자고. 선수는 이지혜였다. 허공에 떠오른 문자열이 움직이며 충무공의 글귀가 흘러나왔다. 「초 10일. 맑다. 아침밥을 먹은 뒤 동헌에 나가 일을 하였다.」 빙고. 이지혜의 안색이 구겨지는 것이 보인다. ‘칼의 노래’는 어디까지나 충무공의 일기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스킬. 재수가 없으면, 아무 효과도 발동되지 않는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28일. 맑다. 활 10순을 쏘았는데 5순은 모두 맞고, 2순은 네 번 맞고, 3순은 세 번 맞았다.」 내 칼날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눈이 휘둥그레진 이지혜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성좌, ‘해상전신’이 경악한 눈으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옷깃에 붙은 불을 꺼뜨린 이지혜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너 뭐야! 어떻게 내 배후성의 성흔을 쓰는 거지?” “궁금하면 대화를 하자고.” “팔다리 정도는 잘려야 똑바로 대답을 할 모양이네.” 내 공격이 성질을 돋운 모양인지, 이지혜의 얼굴이 조금 진지해졌다. “어떤 배후성의 잡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믿고 나대다간 큰 코 다칠 거야.” 이지혜가 허리춤에서 새로운 검을 뽑았다. 놀랍게도, 나도 알고 있는 아이템이었다. 사인참사검(四寅斬邪劒). 지금껏 내가 읽었던 그 어떤 회차에서도, 이지혜가 저 ‘사인참사검’을 손에 쥔 기억은 없었다. “북두성군이여! 힘을 주소서!” 이지혜의 외침에 하늘에서 몇 개의 별들이 빛났다. 북두성군은 원래 총 일곱 명. 하지만 후반 시나리오로 들어서며 몇 명이 죽은 탓인지 빛나는 별은 네 개뿐이었다. 기이이이잉! 눈부신 빛을 쏟아내는 사인참사검이 성유물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지혜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는 뻔했다. 사인참사검은 성좌와 화신체의 링크를 베어, 아주 잠깐 그 연을 끊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권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를 본 이지혜의 표정이 괴이했다. “너······ 링크가 없어?” 당연히 없지. 나는 지금 화신체와 본체가 하나인 상태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이지혜’를 바라봅니다.] 경악한 이지혜가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가. 나는 품속에서 이지혜의 손에 쥐어진 것과 똑같은 검을 꺼냈다. 기이이이잉! “어,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는 눈부신 광휘를 뽐내는 [사인참사검]을 굳게 쥔 채 유중혁의 어깨에서 도약했다. 방심한 이지혜가 눈을 크게 뜬 순간, [바람의 길]의 궤적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츠츠츠츠츠츳! 터지는 스파크의 폭음 속에 이지혜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아아아악!” 그녀를 수호하던 해상전신의 별이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물러섰다.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에게 분노를 토합니다!] ······얕았다. 잠깐이나마 ‘해상전신’과의 링크를 끊어 이지혜를 무력화시킬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얗게 탈색된 이지혜의 눈동자. 95번 시나리오에 이르러, 설화급 성좌에 오른 충무공이 내 눈앞에 현신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주변의 물가를 확인했다. 만약 여기서 ‘유령 함대’의 본선이 소환되기라도 한다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콰콰콰콰콰! 청계천의 지류가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스파크와 함께 유령함대의 환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나는 반사적으로 뒤쪽의 페트병, 정확히는 그 안에 꽂혀 있던 꽃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천사의 힘을 빌려야 하나? 그녀들이 힘을 빌려줄기는 할까? 눈앞의 이지혜는, 적어도 ‘악’은 아닐텐데. “충무공. 그만 멈추십시오.” 진중한 사내의 목소리.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곰 같은 사내의 손이 이지혜의 어깨를 짚고 있었다. [성좌, ‘해상전신’이 노여워합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차가운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들끼리의 으르렁거리는 기싸움. 결국, 먼저 물러선 것은 충무공이었다. 유령함대의 환영이 하나둘 사라지자, 힘이 풀린 이지혜가 바닥에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그런 이지혜의 앞으로 사내가 나섰다. “그쪽 분도 거기까지 하시죠.” 나는 멍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말 오늘은 몇 번이나 놀라게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무슨 짓이야, 현성 아저씨! 저 자식 유중혁 편이라고!” “아직 제대로 알아본 게 아니잖아.” 25번 시나리오든, 95번 시나리오든. 3회차든, 1863회차든······. 이현성은, 내가 아는 그대로의 이현성이었다.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는 이현성이라고 합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김독자입니다.” 고생을 많이 했는지 이현성의 이마에도 굵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꽉 짜인 강철 같은 근육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흔이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지혜와 마찬가지로, 이현성 또한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1863회차에서, 유중혁은 모든 동료를 잃었으니까. 이현성이 말했다. “김독자 씨. 우리는 당신과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기 있는 ‘유중혁’이 필요할 뿐입니다.” 사람 좋은 미소였지만, 나는 미소의 이면에 깔린 침착함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이현성 역시 아흔 네 개나 되는 시나리오를 헤쳐온 것은 마찬가지. 내가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한다면, 이현성은 이지혜보다 더 철저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나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나는 차분한 어조로 되물었다. “왜 유중혁이 필요한 겁니까?” “이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할 열쇠를 그가 가지고 있으니까요.” 95번 시나리오가 무엇인지를 아는 나는 이현성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당신들 그룹에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예?” “95번 시나리오까지 왔다면, 당신들도 그룹이 있을 텐데요.” “아, 그룹이라면 저랑 지혜가 전부······.” “한 번만 더 거짓말을 한다면, 앞으로 당신의 말은 신뢰하지 않겠습니다.” 이현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리더는 누굽니까? 이현성 씨 당신인가요?” 이현성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역시, 몇 회차가 지나든 감정을 숨기는 데는 능숙하지 못한 사내다. “그건······.” 흐려지는 말 꼬리가 내게 확신을 주었다. 이현성과 이지혜는 그룹이 있고, 리더는 그들이 아니다. 이 ‘1863회차’는, 내가 알던 ‘1863회차’가 아니다. 확실한 가설이 서자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뒤늦게 여러 가지가 이해 될 것 같았다. 유중혁에 대한 내 이해도가 이상하게 낮았던 이유도. 죽었어야 할 이지혜와 이현성이 살아 있었던 이유도. 나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 원작에서는 활약하지 않았던 누군가가, 이 ‘회차’에 있는 것이다. “유중혁을 원한다면, 나를 당신들의 리더에게 안내해주십시오.” 그러자 이현성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과 유중혁이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저야 뭐 보다시피 약골이고, 유중혁은······ 지금이라면 안전합니다. 제 말을 꽤 잘 듣거든요.” “뭔 개수작이야! 저 자식이 누구 말을 듣는다고······!” 유중혁에 대해 제법 잘 이해하고 있는 모양인지, 이지혜가 악을 썼다. 이현성 역시 불신 가득한 눈빛이었다. “김독자 씨, 당신은 유중혁의 동료입니까?” ······동료라. “그렇습니다.” “······솔직히 믿을 수 없군요. 유중혁에겐 어떤 동료도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증거를 보여드리죠. 유중혁.” 유중혁이 나를 바라보았다. “검을 집어 넣어.” 유중혁이 거대한 [진천패도]를 고분고분 집어 넣었다. 이지혜가 흠칫 몸을 떨며 외쳤다. “겨우 그 정도로······!” “유중혁, 이리와.” 유중혁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질겁한 이지혜가 이현성의 뒤로 숨으며 외쳤다. “현성 아저씨! 조심해! 저러다가 분명 공격할 거―” “유중혁, 앉아.” 유중혁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이지혜와 이현성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긴, 놀랍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아는 ‘유중혁’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어제 처맞은 게 꽤 아팠으니 이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하기로 했다. 무슨 서커스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그들을 향해, 나는 씩 웃으며 물었다. “또 뭐 시켜볼 일 있으십니까? 흙이라도 먹여 볼까요?” 내 말에,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마주보았다. 손을 번쩍 든 이지혜가 뭐라 외치려는 순간, 이현성이 깊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 본거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도중에 나타난 ‘이름 없는 것들’로 인해 시간은 생각보다 지체되었다. 폐건물 사이를 돌아다니는 이계의 신격들을 피해다닌지 두 시간 정도 지났을까. 멀리서, 그들의 본거지로 보이는 건물이 나타났다. “저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나와 똑같은 코트를 입은 한 사내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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