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291화 Episode 55. 행복한 기억 언젠가 한수영은 말한 적이 있었다. ―처음 [아바타]를 썼을 때 만든 분신이 있는데······ 기억을 너무 많이 줘버렸는지 갑자기 통제 불능이 되어서 회수를 못했어. “······재미있네. 그 얘긴 어디서 들었지?” [등장인물 ‘한수영’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가집니다.]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한수영의 분신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 생생해서, 한순간 이 존재가 정말 분신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실제의 한수영이었더라도 저렇게 태연하진 못할 텐데. “네 본체랑 친분이 좀 있어서. 걔가 입이 좀 가벼워.” “흠······ 유치한 도발이지만 이번만은 넘어가 줄게. 네 생각은 틀렸어. 나는 한수영의 ‘분신’이 아니라 진짜 한수영 그 자체야.” “뭐?” 생긋 웃는 녀석의 입 모양은, 정말 영락없이 한수영의 그것이었다. “나는 걔가 가지지 못한 기억을 갖고 있거든.” “기억? 무슨 기억?” “게다가 걔완 다르게 입도 아주 무거워.” 나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었다. “내가 듣기로 분신은 머리를 잘려도 살아있다고 하더군.”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오른손에 쥐어진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거칠게 울음을 토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화신 ‘한수영’을 바라봅니다.] 내가 발출한 설화급 ‘격’에 스위트 룸 전체가 둔중하게 흔들렸다. 아래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수영은 전혀 긴장한 눈치가 아니었다. “······마왕이라. 생각보다 거물이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의 여유를 깨달았다. 츠츠츠츠츳! 방 전체에 드리워진 개연성의 그물. 내가 발출한 격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해당 지역은 ‘시한부 불가침 구역’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 해당 지역에서의 전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시한부 불가침 구역’ 설정이라······. “······도깨비와 거래를 했나?” “유중혁을 통제할 수 있는 녀석이 왔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나는 더 이상 눈앞의 존재가 단순한 ‘분신’이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이 녀석의 말대로 이쪽이 진짜 ‘한수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등장인물 ‘한수영’이 ‘진실의 눈동자’를 발동하였습니다!] 진실의 눈동자. 적어도 ‘특성 간파’에 한해서는 안나 크로프트의 ‘대악마의 눈동자’에 비견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그 짧은 사이, 한수영은 내 정보를 읽어내려는 시도를 한 것이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발동합니다!] [‘제4의 벽’이 ‘진실의 눈동자’를 완전히 파훼······.] 튀어오르는 스파크와 함께, 한수영이 황급히 스킬을 취소했다. “······엄청난 스킬을 가지고 있네.” 한수영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유중혁처럼 억지로 [제4의 벽]을 뚫으려 하지도 않았고, 안나 크로프트처럼 당황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런 침착함조차, 내가 알던 한수영에겐 없던 것이었다. 한수영은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내 머리는 나중에 자르고, 우리 게임 하나 할까? ‘신성한 삼문답’이라고 알아?” 그것은 언젠가 내가 올림포스의 ‘아리아드네’와 했던 문답 교환이었다. “나나 그쪽이나 서로한테 궁금한 게 있잖아? 하나씩 교환해보자고.” 무슨 꿍꿍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대신 규칙을 하나 만들자. ‘거짓말’을 할 수 있게 하는 거야.” “······그러면 ‘삼문답 교환’이 무슨 소용이 있지?” “재미있잖아.” 한수영의 고양이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녀석이 무슨 생각인지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래, 좋아.” 내 대답과 함께, 허공에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신성한 삼문답(三問答)이 시작됩니다. ―양측은 세 가지 질문과 대답을 교환할 수 있습니다. ―양측은 각자 한 번씩, 문답의 대답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질문과 대답이 온전히 교환되기 전까지, 문답은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하지.”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네가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한 ‘이계의 언약’의 내용을 말해.” 내 첫 질문에, 한수영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등장인물 ‘한수영’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이 문답의 핵심은 상대방이 피해가기 힘들 정도로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 내는 것. 그리고 넘겨 짚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한수영이 토라진 듯 말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었어? 쉽지 않네.” “물은 말에나 대답해.” “그렇다는 건 그쪽도 ‘이계의 언약’을 맺었다는 뜻인가.” 역시 눈치가 빠른 녀석이다. 그건 3회차의 한수영과 비슷하군. 한수영이 말을 이었다. “나는 ‘어떤 세계’의 완성을 걸고 ‘은밀한 모략가’와 계약했어. 그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 그쪽도 내가 원하는 세계의 완성을 도와주기로 했지.” ―첫 번째 대답을 얻었습니다. 직관적이지는 않았지만 아주 영양가가 없는 대답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저 대답의 진위 여부다. [전용 스킬, ‘거짓 간파 Lv.6’을 발동합니다!] [등장인물 ‘한수영’이 ‘포커페이스 Lv.10’를 발동하였습니다!]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역시, 그 스킬을 쓸 줄 알았다. ‘등장인물 일람’을 통해 확인한 녀석의 스킬 목록에는 포커페이스가 있었으니까. 저 스킬이 있는 한, ‘거짓 간파’를 통해 대답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내게 해결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충족되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합니다!] 녀석이 ‘등장인물’이 된 이상, 나는 질문을 한 것만으로도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다음 순간. ······.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지」 「왁, 내 발 밟지 마!」 「뭘 훔쳐 보는 거야?」 ······. 순간적으로 들려온 수백 개의 목소리에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경악성을 내뱉을 틈도 없이, 나는 황급히 스킬을 취소해야 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의 발동이 해제됩니다!] 멍한 눈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자, 녀석은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그런 스킬 있을 것 같더라.” “······방금 그건 뭐였지?” “그거, 두 번째 질문으로 쳐도 될까?” 나는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한수영이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뭐, 이건 서비스로 대답해 줄게. ‘아바타’ 스킬을 응용한 거야.” 그제야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방금 한수영은 ‘분신’을 이용해 자신의 자아를 수백 개로 쪼갠 것이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한수영을 보며, 나는 간만에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이제껏 이런 적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한수영이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묻지.” ―화신 ‘한수영’이 첫 번째 질문권을 사용합니다. “너 ‘멸살법’이라는 소설 쓴 적 있지?” 어떤 질문은 질문 그 자체로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 이 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겠다. 여기선 내 특기를 좀 발휘해야겠군. “맞아. 내가 쓴 거야.” [등장인물 ‘한수영’이 ‘거짓 간파 Lv.10’을 사용합니다!] [전용 스킬, ‘포커페이스 Lv.5’를 발동합니다!] 미안하지만 ‘포커페이스’ 스킬은 나도 가지고 있다. 이 회차로 넘어오기 직전에, [도깨비 보따리]에서 필요한 스킬을 잔뜩 구입했거든. [‘포커페이스’의 영향으로 ‘거짓 간파’가 무력화됩니다!] 그 메시지에, 한수영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너 진짜 재밌네.” 재미있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 “······이 자가 정말 유중혁인가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매만지던 이설화가 물었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말로만 듣던 ‘철혈의 패왕 유중혁’. 마치 등신대처럼 서 있는 유중혁은 그녀를 본 체 만 체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짧은 새, 유중혁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먼저 핀잔을 준 것은 이지혜였다. “다들 구경이라도 났어? 화면으로 자주 봤으면서 왜들 그래?” “신기해서 그러지······. 이렇게 가만히 있는건 처음 보잖아. 어떻게 한 거지? 독을 쓴 건가?” 심지어는 상황실에 앉아 있던 한동훈도 패널창을 띄워 유중혁을 관찰했다. 슬그머니 다가온 김남운은 유중혁의 곁에 서서 미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찰칵. 찰칵. 그 모습을 보던 이지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지금 뭐하냐?” 화들짝 놀란 김남운은 어차피 들킨 거 어쩔 수 없다는 듯 폰을 허공으로 띄웠다. 그러자 김남운의 그림자에서 뻗어 나온 손이 김남운을 대신해 스마트폰을 쥐었다. “야, 너도 같이 찍자. 이런 기회 흔치 않다고.” “뭐야, 이거 안 놔? 사진을 왜 찍어?” 손목을 잡힌 이지혜가 으르렁거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진이 찍혔다. 사진 속엔 무표정의 유중혁과 낄낄 웃는 김남운, 그리고 성질을 부리는 이지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거기 군인! 옆에 서 있지 말고 비켜! 우리 사진 찍고 있잖아!” 멀뚱히 서 있던 이현성이 한소리를 듣자, 다가온 이설화가 김남운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남운이 너 현성 씨한테 존댓말 하라고 했지?” “아 싫어, 나한테 잔소리 좀 하지 마!” 찰칵. “근데 이 사람 진짜 안전한 거 맞니?” “내가 한 번 찔러 볼까?” “그딴 짓 하지마. 아까 올라간 놈이 이상한 트리거 걸고 갔어. 자칫하면 몰살이야.” 찰칵. “트리거? 무슨 트리거?” “이 녀석한테 위해를 가하면 폭주하도록 지시한 것 같아.” “흠, 위해라······ 그럼 이건 어때?” 김남운이 씩 웃으며 유중혁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유중혁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뭐야,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그럼 이건?” 텅 빈 유중혁을 둘러싼 채, 사람들은 웃으며 떠들었다. 신기해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즐거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찰칵. 몇 번이나 찍히는 사진 속에서, 유중혁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텅 빈 동공의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아주 희미한 감정. 어쩌면 유중혁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 어귀가 답답한 것 같기도 한 마음. 하지만 제대로 된 의식이 없는 유중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어, 뭐야. 방금 움직인 것 같은데?” “······잘못 본 거 아냐?” “아냐! 진짜로······.” 그가 아는 것은, 김독자가 남긴 말뿐이었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경고! 경고! ‘염화의 대천사’가 근접하고 있습니다! 허공에서 들려온 경고음에, 유중혁에게 붙어 있던 일행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소리친 것은 김남운이었다. “뭐? 시발! 그 미친년이 여길 왜 와?” “엿 됐다. 다들 준비해. 현성 아저씨는 빨리 올라가서 사부한테 알려줘요!” 흩어지는 일행들 속에서, 유중혁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방해된다는 듯 그를 치고 지나갔다.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유중혁은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패널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홍염 속에 불타오르는 눈부신 천사가, 귀기 어린 안광을 빛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천사의 불타는 검이 움직일 때마다, 일대의 폐허가 불바다에 휩싸이고 있었다. 유중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텅 빈 기억 속에서, 유중혁은 그 천사를 본 적이 있다. 행복한 기억. 이상하게도, 그 기억은 낯설면서도 기꺼웠다. 마치 중간에 두터운 벽이 드리워진 것처럼, 멀고 차가운 기억들.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작은 인형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히죽 웃습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이 불필요한 희생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벽에 남겨진 기록일 뿐이었고, 그는 그것을 훔쳐 보았을 뿐이었다. 그 기억은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일. 허구(虛構)였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에 감동합니다. 그럼에도 어째서, 그 허구를 이토록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유중혁은 이해하지 못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에게 볼을 부빕니다. 불타는 대천사가 화면 속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유중혁은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우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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