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286화 드디어, 기다렸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은밀한 모략가’의 개인 시나리오. +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 > 분류 : 서브(개인)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 제한시간 : ― 보상 : 해당 회차에서 획득한 설화(1), 스킬(1), 아이템(1)을 소지한 채 본래의 회차로 귀환 할 수 있음(필요 개연성은 해당 시나리오 제안자가 부담) 실패시 : 본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음, 화신체 소멸 + 시나리오 창을 열자마자 나를 사로잡은 항목은 ‘보상’이었다. [현재 관리국이 당신의 개연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이 ‘회차’의 소속원이 아니다. 때문에, 이 회차에서 아이템이나 스킬, 설화를 얻더라도 본래의 회차로 귀환했을 때 그것을 보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41회차에서 넘어왔던 ‘재앙 신유승’이 형편없이 약화되어 자신의 ‘격’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런데 이 ‘보상’이 사실이라면······ 나는 이 시나리오에서 얻은 것들을 본래의 회차로 가지고 갈 수 있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엄청난 보상이었다. 아무리 개연성의 제약을 받는다고 해도, 95번 시나리오의 전리품은 95번 시나리오의 난이도에나 어울리는 것들. 이곳에서는 어중간한 스킬이나 설화들도, 20번 시나리오에서는 천지를 격변시키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들 뜨지 마 김 독 자」 [제4의 벽]의 핀잔에 나는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실, 무작정 기뻐할 수 있는 상황만은 아니었다. 이 시나리오는 보상이 엄청난 만큼 실패시의 대가도 컸다. 실패시, 나는 본래의 회차로 돌아갈 수 없을 뿐더러 화신체를 잃게 된다. 이곳은 내가 속한 회차가 아니기에 내가 가진 ‘설화’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화신체를 잃는다면, 개연성의 후폭풍 속에 영멸 당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사실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해당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업데이트 중입니다.] 아직도, 가장 중요한 클리어 조건이 업데이트되지 않고 있었다. 차원을 건너오면서 오류가 발생한 것인지,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가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어느 쪽이라도 가능성은 있었다. 나는 멀리서 난투극을 벌이는 유중혁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은밀한 모략가’라면, 이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을 뭐로 정했을까. 지금까지의 ‘은밀한 모략가’의 행보로 봤을 때는······. 불길한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은밀한 모략가. ‘기어다니는 혼돈’일 거라 예상했지만,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계의 신격. 처음 채널이 열릴 때부터 나와 함께였지만, 나는 그에 대해 아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제천대성처럼 호방하지도 않고, 우리엘처럼 정의롭지도 않으며, ‘심연의 흑염룡’처럼 사악하지도 않은 존재······ 심지어 ‘멸살법’의 원작에도 존재치 않았던 성좌. 수식언 그대로, 그는 ‘은밀한 모략가’일 뿐이다. [당신이 가진 정보로 대상을 독해할 수 없습니다.] [전용 스킬, ‘독해력’의 발동이 취소됩니다.] [미지(未知)에 대한 호기심이 당신의 새로운 능력을 일깨웁니다.] ······모르겠다. 그는 과연 이 시나리오를 통해 내게 무엇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무엇을 얻고자 했던 것일까. 이계의 신격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역시나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크아아아아앗!] 지금 이 시나리오가, 저기서 성좌들을 학살하고 있는 괴물 녀석과 관련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 [됐다! 지금이다! 모두 협공해!] [죽어라 유중혁!] 잠깐 시나리오 창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전황은 예상 밖의 형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유중혁의 상태가 이상했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성좌들을 처죽이며 전장을 압도하고 있었는데······. 둔해진 몸놀림. 쏟아지는 포화를 그대로 얻어 맞으며, 유중혁의 몸이 굳어가고 있었다. ······저 자식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등장인물 일람’의 설정을 조정하여 녀석의 상태를 살폈다. + * 현재 대상이 상태이상에 걸려 있습니다. + 상태이상? 그럴 리가 없다. 1863회차의 유중혁이 누구인가? 마계 서열 2위의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불구로 만들고, 4위의 ‘강령의 마신’을 찢어 죽인 장본인이 저 ‘유중혁’이다. 지금의 유중혁에게 무려 ‘상태이상’을 걸 수 있을 만한 존재는 저들 중에 없었다. 텅 빈 유중혁의 눈동자. 목에 뭔가가 턱 걸린 듯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있다. 딱 하나, 녀석에게 ‘상태이상’을 걸 수 있는 존재가 있었다. + * 현재 대상은 원인 불명의 ‘회귀 우울증’을 앓고 있습니다. + 바로 유중혁 자기 자신이었다. <회귀 우울증>. 무려 1863회차의 삶을 통해 망가진 녀석의 정신은, 저 정신병을 거의 ‘패시브 스킬’로 둔갑시켰다. 한번 저 우울증에 빠지게 되면, 녀석의 의식은 무지막지한 기억의 추에 붙들려 수면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죽여라! 놈도 무적은 아니다!] 무자비한 공격 속에, 단단한 유중혁의 몸도 조금씩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본래라면 이 상황에서 ‘회귀 우울증’이 도질 턱이 없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저 병증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저런 상태가······. 「제4의 벽이 말합니다. ‘하 하 하’」 “······설마 네 짓이냐?”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지만, 지금으로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조금 전 [제4의 벽]과의 충돌이, 유중혁의 내면에 어떤 파란을 일으킨 것이 틀림없었다. 젠장, 어쩌지? 꽈지지지지직! 얼굴을 감싸고 웅크린 유중혁의 살갗에서 피가 터져나왔다. 극성에 달한 [금강불괴]의 힘으로 아직까진 경상이었지만, 이대로 전투가 지속된다면 유중혁이 죽는 것은 정말로 시간 문제였다. 「내가 도와야 한다.」 「내가 왜 저놈을 도와야 하지?」 마음 속으로 선택지들이 싸우고 있었다. 「지금의 유중혁은 괴물이야. 도와봤자 깨어나면 나를 죽일 거라고.」 「잘 생각해봐. 넌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이 뭔지 모르잖아.」 아직 물음표로 남아 있는 시나리오 클리어 조건. 「만약 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이 ‘유중혁의 죽음’이라면, 나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하지만. 「만약, 저 시나리오의 클리어 조건에 ‘유중혁의 생존’이 필요하다면······.」 여기서 유중혁이 죽으면, 나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망할······.” 도울 것이냐, 말 것이냐. 굳건한 유중혁의 무릎이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평소라면 한 주먹거리도 안 될 녀석들이 신나서 유중혁의 전신을 뜯어대고 있었다. [하하핫! ‘철혈의 패왕’의 설화는 내가 갖겠다!] 어차피 유중혁은, 이곳에서 죽어도 회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새로운 회차를 시작하게 되겠지. 회귀를······.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빌어먹을 모략가.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이곳에서 유중혁이 죽으면, 원작에는 없던 세계가 태어난다. 유중혁은 또 다시 지옥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게 보여주었던 ‘버려진 회차’들은 또 만들어질 것이고, 그곳의 유중혁들은 또 다시 무한한 절망의 쳇바퀴 속에서······. ······에이 씨발 모르겠다. 나는 [전인화]를 발동하는 동시에 전신의 마기를 풀풀 흩날리며 유중혁을 향해 날아갔다. [어이! 내 몫도 남겨 두라고!] 내 거친 진언에, 유중혁을 공격하던 마왕과 성좌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냐?] [······마기(魔氣)? 처음 보는 녀석인데.] [너도 마왕 살해자를 죽이러 온 건가?] 내 몸에서 흘러 나오는 새카만 마기에, 일순 긴장했던 적들의 표정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예상대로다. 나는 ‘격’을 발출하며 말했다. [맞아. 좋은 건 같이 나눠 먹어야지. 안 그래?] [큼, 네놈은 늦게 왔으니 좋은 설화는 가질 수 없다.] [걱정 마. 나는 조신히 뒤쪽에서 돕기만 할게.] [좋은 자세로군. 자, 그럼 다들 계속······!] 빠가각! 나는 돌아서는 성좌놈의 머리통을 힘껏 갈겨버렸다. 성좌놈은 괴상한 비명과 함께 일직선으로 날아가 폐허 속에 처박혔다. [끄, 으, 으······ 무슨 짓이냐!] 딴에는 죽으라고 때린 건데, 부족했던 모양이다. 내 돌발 행동에 격분한 성좌들이 이쪽을 노려보았다. [지금 ‘마왕살해자’의 편을 드는 것인가?] 나는 대답하지 않고 ‘거대 설화’의 힘을 개방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심장 깊은 곳에서 용솟음 친 설화의 맥이 약동했다. 전신을 감싸안는 스파크와 함께, 설화의 에너지가 혈맥을 타고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내 ‘거대 설화’를 알아본 몇몇 성좌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마왕의 격? 저런 녀석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없겠지. 난 너네 세계 마왕이 아니니까. 나는 다시 한번 [전인화]의 힘을 집중해, 방심하고 있던 성좌 하나의 뱃가죽을 날려버렸다. 꽈아아아앙! 내 일격을 맞은 성좌가 신음을 토하며 십여 걸음을 물러났다. 저 유중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그럭저럭 싸워볼 수도 있겠는데 생각하던 순간. 츠츠츠츠츳! [설화 운용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스타 스트림>에서 당신이 소유한 ‘거대 설화’의 근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거대 설화’의 힘이 급격하게 축소됩니다.] ······제길. 역시 이 모양인가. 내 ‘거대 설화’의 터전인 <73번째 마계>는 이곳에 없다. 심지어 그 거대 설화를 함께 만들었던 존재들도 없다. 그러니 내 설화가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성좌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격을 남발하며 유중혁을 불렀다. “인마! 정신 차려 새끼야!”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녀석을 깨울 대사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퍼뜩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내 격이 급격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다시 기세등등해진 마왕 오세가 외쳤다. [마왕 살해자와 한패다! 저놈부터 죽여!] 성좌들의 수는 마왕 오세를 포함해 일곱이었다. 지금의 내 전력으로는 당연히 상대할 수 없었다. 퍼억! 퍼어어억! 필사적으로 공격들을 피해냈지만, 역시 95번 시나리오는 95번 시나리오였다. 평범한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일 뿐인데도, 공격 한 방 한 방이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스팟! 날아드는 맹공에 살점이 뜯기고, 운신의 폭은 점점 좁아져 간다. 급박한 와중에도 나는 유중혁을 깨울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했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고, 개중에 몇 가지는 확실히 유중혁의 정신 머리를 찾아 놓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내가 생각한 방식으로 놈을 깨우면, 나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 터질 듯 입술을 깨문 채,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별 수 없다. 어차피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은 했으니까. 나는 짧게 심호흡을 한 후, 쏘아붙이듯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입 다물고 가만히 계실 겁니까?” 내 말에 성좌들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갑자기 뭔 소리냐는 눈빛들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계속했다. “제가 여기서 죽으면 그쪽들도 곤란하실 텐데요.” 그러자 다음 순간, 내 가슴팍의 주머니가 환하게 빛나며 진언이 들려왔다. [뭐야, 알고 있었어?] 당연한 얘기지만, 난 유중혁을 깨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모르는 게 이상하죠. 저는 꽃꽂이에 취미가 없거든요.” 코트의 바깥 주머니에 꽂힌 두 송이의 꽃. 붉은 코스모스와 흰 백합. 처음부터 이들의 존재를 눈치챘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세계선’을 넘어올 때에야 깨달았다. 정말이지 대담한 성좌들이다. [쳇. 별 수 없네.] 진언의 정체를 깨달았는지, 나를 적대하던 성좌들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들을 비웃듯 ‘백합’이 말했다. [꼭 우리 둘 다 나서야 되나? 요피엘 너 혼자 할래?] [그들은 <에덴>의 적. 즉각 처형이다.] [······같이 하자는 거지? 귀찮은데. 알았어.] 다음 순간, 코스모스와 백합의 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바람에 흩날렸다. 창공을 향해 멀어지는 꽃잎과 함께, 눈앞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잠시 그 메시지를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츠츠츠츠츠츳! 엄청난 존재감이 내 등 뒤에 강림하기 시작했다.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성좌들의 표정을 보며,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궁금하긴 했다. 그때의 ‘정희원’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그리고 이젠 아주 잘 알겠다. 등줄기로 뻗어 나오는 여섯 장의 날개. 넘치는 개연성 속에서, <에덴> 최고 대천사들의 ‘격’이 내 전신에서 발출되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서울’에 현현하였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서울’에 현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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