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287화 [대천사!] 마왕 오세는 경악을 넘어 혼절할 듯한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있어, <에덴>의 대천사들은 최악의 상성을 가지는 존재. 무려 두 명의 대천사의 동시 현현했으니 놀라 나자빠지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째서 대천사가? <에덴>의 천사들은 ‘그 일’ 이후 대부분 죽었을 텐데······!] 그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1863회차의 세계. 가브리엘과 요피엘은 아직 이 회차에서 일어난 일을 모를 것이다. [■댕, 그게 무슨 개소리야?] 기다렸다는 듯, 가브리엘의 진언이 울려퍼졌다. 우리엘의 친구 답게 걸쭉한 욕설. 나는 괜히 일이 커지기 전에 그녀를 만류했다. “가브리엘. 저놈들 헛소리는 들을 필요 없습니다. 빨리 처리하죠!” [······보채지 마. 건방진 인간 녀석.] 태클을 걸 곳이 한 군데 있었지만, 나는 일단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내 전신으로 가브리엘의 힘이 강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천사 가브리엘.] 쿠구구구구! 머리털이 곤두서는 격의 팽창이 느껴졌다. 드디어, 가브리엘의 주력 설화를 듣게 되는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물론 저 ‘좋은 소식’은, 어디까지나 가브리엘이 같은 편일 경우에만 해당된다. [겁먹지 마라! 대천사라 봐야 본거지를 잃은 잔당에 불과하다!] 마왕 오세가 성좌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 치고, 오세의 신형은 벌써 저만치 멀어지는 중이었다. 기합을 터뜨린 성좌들이 제각기 성유물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이것은 정해진 종말에 관한 것.] 가브리엘의 설화, 「종말의 계시」가 시작되었다. 「뿔이 두 개 달린 숫양을 네가 보았노니, 두 눈 사이에 있던 큰 뿔은 그 첫 임금이다.」 내 몸을 감싼 휘광 속에 황금빛 문자열들이 흘렀다. 그 문자열들을 따라 내 몸의 부피가 커지고 있었다. 번식기의 숫양처럼 온몸에 힘이 넘쳐 흘렀다. 마왕의 뿔이 자랐던 자리에 새하얀 뿔이 차례로 솟아 올랐다. 츠츳, 츠츠츠츠츳! [으, 으어어어어······.] 그 뿔을 본 것만으로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겁에 질리고 있었다. 몇몇 성좌들은 무력한 화신들처럼 병장기를 떨어트렸고, 일부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아!] 마치, 자신의 최후를 예견한 듯한 부나방처럼. 「그는 제 힘으로 힘이 점점 세어질 터인데, 제 힘으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내 등 뒤로 솟구친 여섯 장의 날개가 화려한 섬광을 내뿜자, 설화급 성좌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쿠과과과과과! 그러나 나는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 내 눈앞에 소환된 단단한 금속이 모든 종류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마치 거신족이나 쓸 법한 무기. 하얗게 빛나는 뱀이 자루를 타고 올라가고 있었고, 그 뱀의 아가리에는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눈부신 창극이 꽂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가브리엘의 신창(神槍), ‘편애(偏愛)의 천칭(天秤)’이었다. 나는 그 창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일순, 세계가 기울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근방의 모든 존재가 저울대에 오르고 있었다. 한쪽은 이쪽 저울대에, 다른 한쪽은 저쪽 저울대에. 고개를 돌리자, 가브리엘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짚었다. 「그는 끔찍스러운 파괴를 자행하면서도, 힘센 이들과 거룩한 백성들을 파멸시키리라.」 쿠오오오오오오! 창은 눈부신 빛살이 되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그 빛살을 내던졌다. 쿠콰콰콰콰콰콰! 그리고 세상의 일부가 지워졌다. 하늘에서 나를 공격하던 성좌도, 측면을 노리고 달려들던 녀석도, 전의를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녀석도. 마치, 세상에 없던 존재처럼 소멸했다. 남은 것은, 이쪽 저울대 위의 생명체들 뿐. 이것이 대천사의 진짜 힘이었다. 가브리엘이 영 못마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놈 놓쳤어. 꽃잎 한 장으론 한계가 있네.] 실제로, 미리 사태를 예견한 마왕 오세는 이미 점이 되어 달아나고 있었다. 하위격의 마왕으로는 홀로 대천사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그저 두고 보고 있을 요피엘이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아아! 내 등 뒤에서 생성된 붉은 안개가 창공을 덮으며 오세를 좇았다. 그르르르르르. 하늘 전체가 고통스럽다는 듯 울부짖었다. 겉보기엔 붉은 안개였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 하나가 작은 병정의 대군(大軍)이었다. 일대의 하늘을 붉게 물들인 <에덴>의 503부대.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을 따르는 핏빛 정예병들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피라냐들처럼 달려든 핏빛 안개 사이로 붉은 가시가 솟았다. 멀리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고, 천국의 병정들이 피의 축제를 벌였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잠잠해졌다. 허공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마왕의 화신체가 부스러기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가브리엘이 내 발을 움직여 마왕의 파편을 짓밟았다. [별 것도 아니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출현에 크게 당황합니다.] [살아남은 마왕들이 <스타 스트림>의 개연성을 의심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대천사들의 비정상적인 개입에 비난을······.] [닥쳐 ■■들아.] 등 뒤로 뻗어나왔던 여섯 장의 날개가 무수한 깃털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고, 대천사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속이 살짝 메슥거렸지만, 생각만큼 몸의 부담은 심하지 않았다. 95번 시나리오에 허락된 개연성이 그만큼 풍부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와 맺은 ‘이계의 언약’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내겐 좋은 일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내게 현현한 요피엘이 힘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요피엘이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저것도 죽여라.] 그곳에,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는 유중혁이 있었다.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저 녀석은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절대악(絕對惡)이다.] 오른쪽 눈동자가 따끔, 하는 느낌이 들더니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성흔, ‘죄업의 눈동자’가 발동합니다!] 죄업의 눈동자. 대천사 요피엘의 성흔이었다. [대상의 ‘죄업’ 수치를 측정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 쌓인 ‘죄업’을 보는 눈. 방금 전까지 유중혁이 있었던 자리에는 새카만 심연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상의 ‘죄업’을 수치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암흑. 그저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아득해질 것만 같은, 그런 암흑이었다. 마왕 오세도, 절대악 계통에 속한 다른 성좌들도 그런 죄업을 가진 존재는 없었다. 요피엘이 말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죄업이다. 저렇게 밀도 깊은 죄업은, 바알이나 아가레스를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다. 이 세계의 모든 죄업을 합쳐도 저 자가 가진 죄업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안다. 유중혁은 많은 죄를 저질렀다. 많은 사람을 죽였고. 많은 세계를 멸망시켰다. 셀 수조차 없는 원혼들이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저 자는 죽어야 한다.] 하지만. “안 됩니다.” 녀석이, 구한 것도 있었다. “죽일 수 없습니다.” 녀석이 망친 모든 것에 비하면 티끌일지 몰라도. 분명, 구해낸 것이 있었다. 츠츠츠츠츳······.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그 찌릿찌릿한 시선 속에, 나는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녀석은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지금 죽여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마왕’. 너를 아직까지 살려둔 것은 서기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왕 살려주신 거, 한 사람 더 살려주시죠.” 드드드드드······. 돌아보자, 유중혁의 몸이 가는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녀석의 의식이 어떻게든 수면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유중혁을 향해 요피엘이 말했다. [그가 깨어난다면 나도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 요피엘이 다시 자신의 안개를 일으키려는 기색이 보였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이것뿐인 것 같다. “죽이지 않고도,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요피엘의 붉은 안개가 멈칫했다. “그가 본래의 의식을 되찾지 않도록 하고, 의식을 잃은 그를 조종할 방법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저 자를 속박할 방법이 있단 말이냐? 그대는 대체 무슨 흉계를······.] 요피엘이 다시 한 번 격을 일으키려는 순간, 가브리엘이 나섰다. [요피엘, 내버려둬 봐. 어차피 우리도 상황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해.] 요피엘은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 [······만약 깨어날 기미를 보인다면, 바로 놈을 즉살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유중혁을 향해 다가갔다. “야.” 드드드드드······. 녀석의 몸에서 일어나는 진동이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원작에서 몇 번인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마 몇 분 후면 유중혁의 의식은 깨어나겠지. 그렇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움직여 유중혁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녀석이 내게 그렇게 했듯이. 나보다 체구가 큰 녀석이었기 때문에 들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놔, 라.” 이제 거의 수면 근처까지 올라온 유중혁의 의식이 말을 시작했다. 나를 붙잡으려는 듯, 살기로 가득 찬 녀석의 손끝이 아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유중혁이 어떻게 하면 ‘회귀 우울증’에서 깨어날지 알고 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나는 녀석이 어떻게 하면 저 우울의 심해 아래로 더 깊이 가라 앉을지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중혁의 손끝을 보던 나는 툭 던지듯 입을 열었다. “기억나냐? 33회차. 40번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고 이지혜가 했던 말.” 유중혁의 눈빛이 멍해지더니, 움직이던 손끝이 멈췄다. 「“사부한테 다음 회차라는 게 없다면 좋을텐데.”」 “생각해 봐. 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야. 그렇지? 모든 회차에는, 잠깐이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어.” 유중혁의 표정이 굳어진다. “173회차. 너는 꽤 오랫동안 지구를 지켜냈어. 이지혜가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모습도 보았고, 이설화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안고 웃는 모습도 보았지.” 「“중혁 씨는 살아 있어서 행복해?”」 한마디 한마디를 뱉어낼 때마다, 유중혁의 표정이 무너져 간다. 유중혁을 무너트리는 것은 절망이 아니다. “383회차. 마침내 75번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을 때. 정말 운 좋게도 그 회차에선 아무도 죽지 않았지. 그런 적은 처음이었어. 그때 이현성이 말했었지.” 「“중혁 씨, 저는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않을 겁니다.”」 녀석의 머릿 속에 작은 깃털 같은 기억이 하나둘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498회차······.” 유중혁의 손바닥이 자신의 귀를 막기 위해 움직인다. 평소의 유중혁이었다면 이런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나는 녀석의 양손을 붙잡은 채,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일이 열 번.” 물에 빠진 인간은, 단지 깃털의 하나의 무게 때문에 더 깊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스무 번.” 숨이 막히고, 폐가 조여온다. 유중혁이 겪는 기분을 나 역시 고스란히 느낀다. 오직 나만이 느낄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밑바닥에 깔린 가장 근원적인 어둠이, 자아를 탐욕스레 삼키는 것이 보였다. “백 번. 천 번도 넘게 반복되었어.” 그 모든 세계는 멸망했다. 모든 행복했던 기억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흘러갔다. 무수한 회귀 속에 행복의 의미는 퇴색되었고. 그가 지켜냈던 모든 가치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유중혁.” 유중혁의 자아가 까마득한 심해로 가라앉고 있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영영 올라올 수 없는 곳으로.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모두 지켰나?” 망연한 얼굴의 유중혁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걱정 마라 유중혁. 남은 모든 뒷감당은 내가 할 테니까. 너는, 그만 쉬어라. [등장인물 ‘유중혁’에 대한 이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공허한 유중혁의 눈동자가, 주인을 잃은 기억을 토하고 있었다. ‘전지적 독자 시점’을 쓰지 않았지만, 그것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죽고 싶다.」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하늘에서 몇 방울인가 비가 떨어졌다. 마왕과 성좌들의 혈향이 묻은, 검은 비였다. 비를 맞은 유중혁의 얼굴에도 새카만 물이 번져 흘렀다. 천천히 낮아진 유중혁의 시야가, 이윽고 나보다 아래로 떨어졌다. 한 인간의 정신이 붕괴하는 모습을 나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고장난 목소리.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유중혁이 더듬거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 지?” 나는 유중혁의 두 팔을 놓으며 말했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끝내 줄게.” 유중혁이 텅 빈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보고 있지 않았다. 흐릿한 하늘 위로, 방금 업데이트가 완료된 ‘서브 시나리오’ 창이 띄워져 있었다. + <서브 시나리오(은밀한 모략가) ― 회귀의 끝 > 클리어 조건 : 유중혁을 죽이시오. + 나는 바닥에 꽂힌 유중혁의 진천패도를 향해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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