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285화
Episode 54. 마왕 살해자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읽는 내내 제일 많이 했던 상상이 있다.
―만약 ‘멸살법’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아마 좋아하는 소설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상상을 해봤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멸살법’에 잘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의 내가 떠올렸던 무궁무진한 상상들 덕택인지도 모른다.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제일 먼저 이걸 하고, 그 다음은 이걸 하고, 히든 피스는 뭘 찾고······.
심지어 중학생 때는 교과서 귀퉁이에 도표까지 만들었다.
―유중혁 : 프로게이머 출신, 성격 엄청 나쁨, 싸이코패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죽임(가끔은 그냥 죽임), 무조건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함, 3회차까지는 그나마 인간성이 남아 있음······.
처음 멸살법의 ‘3회차’에 떨어진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내가 ‘바꿀 수 있는 세계’에 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마지막 회차에 떨어지기라도 했다면······.
「김 독자는 생 각 했다」
녀석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시이―발」
쐐애애애애액!
나는 파공성과 함께 날아드는 칼날을 보며,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잠깐만! 멈춰! 멈추라고!]
천 번이 넘는 회귀.
수백 번의 자살과, 한 개인이 겪을 수 있는 비극의 임계점을 넘겨 무감해진 정신. 극도로 만연해진 회귀 우울증······.
「1863회차의 유중혁은, 이 세계의 절망 그 자체다」
망설임 없는 칼날이 목줄기를 지나가려는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기지를 발휘했다.
[전용 스킬, ‘소형화 Lv.10’을 발동합니다!]
순식간에 쪼그라든 육체와 함께, 무심한 칼날이 허공을 스쳤다.
칼날 너머로 녀석의 놀란 눈동자가 보였다.
망할 놈. 내가 죽으러 여기까지 온 줄 알았냐?
아무리 제놈이 1863회차라 해도, 순순히 당해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전용 스킬, ‘책갈피’를 발동합니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건 안다.
그래도 발악은 해봐야지.
나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빼내며 녀석을 향해 소리쳤다.
“개자식아! 말은 하게 해줘야 대답을 할 거 아냐!”
내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간접 메시지가 쏟아졌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성좌, ‘달걀을 세우는 모험가’가 당신의 등장에 흥미로워합니다.]
[성좌, ‘하루살이의 왕’이 ‘철혈의 패왕’에 대항하는 당신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에게 강한 질투심을 느낍니다.]
[1000코인을 후원받았습니다.]
1863회차의 95번 시나리오.
세계가 이 꼴이 되어도, 여전히 후원을 하는 성좌들은 있다.
이제까지와는 후원의 성격이 좀 다르긴 하지만······.
유중혁이 경직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백청문의 무공? 이상하군. 이번 회차에서는 실전되었을 텐데······.”
천여 번이 넘는 회귀로 비틀린 녀석의 사고 회로가 팽팽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지금껏 내가 보인 행동만으로도, 이미 나를 죽여야 할지 살려야 할지 판단을 끝마쳤을 것이다. 두렵다.
[전용 스킬 ‘전지적 독자 시점’을 발동합니다!]
하지만 두렵기에, 지금은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으니까.
[해당 인물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전지적 독자 시점 ‘2단계’를 발동할 수 없습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 ‘1단계’를 발동합니다!]
······이해도 부족.
조금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유중혁도 아니고 1863회차의 유중혁이니까.
별 수 없이 1단계라도 발동해야 했다. 자세한 생각까진 읽을 수 없어도, 공격의 방향이라도 알면 도움이 될 테니······.
「목」
유중혁의 사념이 전해지는 순간, 나는 전력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해도 지금의 나를 쉽게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전인화]에 이어 [바람의 길]까지 사용한······.
“······컥?”
내가 몸을 돌리는 것이 먼저였는지, 새카만 그림자가 나를 앞질러간 것이 먼저였는지 모르겠다. 숨이 턱 막혔고, 오금이 저린 느낌과 함께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갔다.
꽈드드드드득.
전신을 우그러트릴 듯 죄는 마력의 향연. 나는 감전된 물고기처럼 허공에서 몸을 퍼덕거렸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전신을 진탕시켰다.
[몇몇 성좌들이 당신의 모습을 비웃습니다.]
까맣게 물들었던 시야가 개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녀석의 손아귀가 내 몸통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낀 목이 부러질 것처럼 아팠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마지막 회차의 유중혁이라도, [전인화]를 발동한 나를 이렇게 쉽게 잡았다고?
“마지막으로 묻겠다.”
냉담한 녀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깨닫는다.
방향을 미리 안다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멍청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녀석은, 애송이였던 3회차의 유중혁이 아니다.
“용살검 ‘아론다이트’는 어디 있지?”
······제발 목을 틀어쥔 채 묻지 말라고 외치고 싶다.
“란슬롯의 화신체가 여기 있는 걸 보면, 분명 네놈이 알고 있을 텐데······.”
아, 방금 죽은 성좌가 그 ‘란슬롯’이었어? 제길.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 알아내는 수밖에.”
유중혁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빛났다.
역시나, 3회차든 1863회차든 유중혁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현자의 눈 Lv.???’을 발동하였습니다!]
수천 번의 회귀를 거치며, 녀석의 ‘현자의 눈’은 가공할 수준에 이르렀다. 아마 지금 저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는 유중혁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이계의 신격 정도일 것이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현자의 눈’을 탐지하였습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현자의 눈’이 내 몸을 훑는 순간, 벽이 움직였다.
한 톨의 정보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내리 꽂히는 시선 앞에, 조금의 빈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굳건히 선 [제4의 벽].
츠츠츠츠츠츳!
‘정체불명의 벽’을 만났을 때보다 더 강력한 스파크가 눈앞에서 터져나왔다.
「제 법」
이번만큼은 [제4의 벽]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쯤 되면 [제4의 벽]이 대단한 건지, 유중혁이 대단한 건지 나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제4의 벽]은 물러서지 않았고, 유중혁도 포기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 사이에서 죽어라 튀겨지는 것은 나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진언으로라도 비명을 지를까 고민하던 찰나.
“큭······?”
유중혁이 먼저 힘을 거두었다. 얼마나 강하게 충돌한 것인지, 황금빛으로 소용돌이치는 녀석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호승심을 느낍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당신을 향해 강한 적개심을 내비칩니다!]
저 ‘현자의 눈’으로도 뚫을 수 없는 방벽이라니.
[제4의 벽]이 얼마나 굉장한 스킬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은 그때였다.
츠츠츠츠츠츳!
[제4의 벽]은 유중혁의 ‘현자의 눈’을 막아낸 것으로도 모자라, 나를 움켜쥔 유중혁의 손등을 타고 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흘러나온 활자들이 녀석의 몸을 벌레떼처럼 뒤덮자, 처음으로 유중혁이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꿈틀거리며 움직인 활자들은 이내 하나의 기억이 되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것은 [제4의 벽]에 기록되어 있던, 나의 ‘3회차’ 기억이었다.
「“이 손 놓고 꺼져, 빌어먹을 새끼야.”」
「“아마 그렇겠지. 어쨌든 희망적인 상황인 건 확실해.”
“······뭐가 희망적이라는 거지?”
“중혁아, 우린 세계를 구할 수 있다. 알지?”」
「“우리 성운의 이름은······ 김독자 컴퍼니······.”
“이름 같은 건 아직 없다. 그리고 지지자는, 지금부터 구할 것이다.”」
눈앞의 유중혁은 이해할 수 없는 기억들.
모두, 이 회차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들이었다.
츠츠츠츠츠······.
두 눈을 멀게 할 듯한 스파크가 조금씩 잦아들며, 유중혁의 표정이 점차 드러났다.
“네놈은 대체······?”
저 ‘1863회차’가 경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머릿속으로 [제4의 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잘 했지 김독 자」
잘했냐고?
“말해라. 방금 그건 뭐지? 말하지 않는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우드드드드득!
잘하긴 뭘 잘해, 시발.
[큭······ 아니, 잠깐만! 일단 대답할 시간을 좀······!]
꾸드드드드득!
나는 유중혁의 손아귀 속에서 백청의 마력을 폭발시켰다.
어떻게든 녀석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이 정도로는 무리겠지만, 최소한 ‘거대 설화’의 힘을 빌려올 때까지라도 시간을 벌어야······.
콰아아앙!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폭발 속에 유중혁이 나를 놓쳤던 것이다. 본인도 놀랐는지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굼뜬 움직임으로 다시 손을 뻗는 유중혁. 어떻게 된 건가 싶었지만, 겨우 잡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전력으로 [바람의 길]을 발동하자, 백청의 기류가 하늘 위에 무지개처럼 남았다. 금방 쫓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 외로 유중혁의 기척은 바로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의외의 정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뭐야 저거?
내 의문과 동시에, 귀청을 찌르는 진언이 창공에 울려 퍼졌다.
[유중혁!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원한을 갚겠다!]
근처 건물의 옥상에서 이글거리는 붉고 푸른 눈동자. 늘씬한 유선형의 몸을 가진 두 마리의 흑표범이 강대한 격을 내뿜으며 유중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마왕, ‘안락과 흉포의 마신’이 화신 ‘유중혁’에게 적의를 보입니다!]
[마왕, ‘금단을 보는 눈동자’가 화신 ‘유중혁’에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1863회차의 유중혁은 그 어떤 회차보다 강력하지만 그만큼 적도 많다.
때문에 나는 두 표범의 진명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안락과 흉포의 마신, ‘오세’.
금단을 보는 눈동자, ‘플라우로스’.
각각 57번째 마계와 64번째 마계의 마왕들이었다.
그 자존심 강한 마왕들이 수치심도 잊고서 화신 하나를 향해 협공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마왕 살해자’여! 오늘 그대의 이야기는 이곳에서 끝날 것이다!]
지금의 유중혁은,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니까.
쿠구구구구구!
나는 잘 됐다 싶은 심정으로 터져 나오는 굉음 사이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상황을 살폈다. 여유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저 싸움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고 있었다.
다른 싸움도 아니고, 무려 1863회차 유중혁의 전투.
쉽게 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콰아아아아앙!
귀가 멀 듯한 폭음이 터지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전투에 열광합니다!]
쏟아지는 간접 메시지 속에서, 유중혁이 검을 뽑았다.
3회차에서는 이미 부러졌던 [진천패도].
수많은 시나리오를 거치며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개량된 그 칼날이, 어둠 속에서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에 대항하듯 마왕들도 자신의 권능을 발했다.
[피조물들이여, 죽음 속에서 일어나라!]
죽은 마계의 백작과 공작들이 언데드가 되어 땅을 박차고 나왔다. 하나하나가 생전의 전투력을 보존한 정예 개체들.
그러나 유중혁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사자 소환술’인가? ‘강령의 마신’도 그걸 썼었지.”
유중혁은 웃고 있었다.
“놈의 시체는 지금 죽은 성좌들의 별자리에 걸려 있다.”
[닥쳐라!]
빛살이 번뜩이는 순간, 유중혁의 검이 움직였다.
그 검술을 뭐라 불러야 할까.
······파천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검술이라는 것.
갸아아아아아!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잔혹한 검술이라는 것.
그아아아아악!
검에 잘려 나간 마계의 귀족들이 비명을 지르며 산화했다.
마계의 고위 공작급이면 위인급 성좌에 비견된다.
그런데 그런 존재들이 일검에 몇 개체씩 터져 나가고 있었다.
단 1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수십 개체의 언데드 귀족들을 순살(瞬殺)한 유중혁은, 어느새 마왕 플라우로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어떻······.]
퍼거거걱!
마치 장난감처럼, 마왕 플라우로스의 머리통이 폭발했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빛. 무감한 미소를 띤 채, 단 일격으로.
유중혁은 마왕을 죽였다.
[이······ 이 미친 놈이!]
대노한 마왕 오세가 격을 발출하며 소리쳤다.
[성좌들이여! 무엇을 망설이는가!]
부름과 동시에, 폐허 곳곳에 숨어 있던 성좌들이 뛰쳐 나왔다.
대부분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었다.
위인급부터 설화급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가 쟁쟁한 성좌들이, 유중혁 하나를 해치우겠다고 저렇듯 떼지어 달려들고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설화 ‘영원불멸의 지옥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중혁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넘실대는 핏빛 아우라가 성좌들과 격돌했다.
퍼걱! 퍼거거걱!
무섭도록 패도적인 힘이었지만, 일격 일격에 침착함과 절제가 배어 있었다.
유중혁의 검이 움직일 때마다, 성좌들의 대열이 무력하게 흔들렸다.
[절대악 계통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을 증오합니다.]
하나, 둘 터져가는 성좌들의 화신체들.
저 드높은 성좌들이 저렇게나 초라해보일 수 있을까.
약간의 조급함도 찾을 수 없는 표정으로 유중혁은 전투를 계속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거대 설화 ‘고독한 멸망의 순례자’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유중혁은 오직 ‘왼팔’만을 사용해 성좌들을 해치우고 있었다.
하나의 성좌가 쓰러질 때마다 내 팔에도 소름이 돋았다.
[절대악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전투에 경악합니다.]
증오는 경악이 되었고.
[절대악 계통의 일부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을 두려워합니다.]
경악은, 이내 두려움이 되었다.
[다수의 성좌들이 화신 ‘유중혁’의 힘에 치를 떱니다.]
전율이 일었다.
미친 놈······ 진짜로, 미친 놈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유중혁을 쓰러트릴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은밀한 모략가’에게 받을 시나리오가 뭔진 모르겠지만,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절대로 저 녀석과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메시지가 들려왔다.
[‘은밀한 모략가’님께서 의뢰한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