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282화
[‘제4의 벽’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시작은, 수르야와의 격전을 치룬 직후였다.
거대 설화를 얻고, 일행들과 함께 마계를 지켜냈던 그날.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3차 수정본).txt
나는 ‘멸살법’의 세 번째 수정본을 받았다.
「눈을 떴을 때, 유중혁은 생각했다. ······4회차로군.」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
오히려 기대되기까지 했다. 지금의 ‘3회차’는 유중혁이 겪었던 그 어떤 회차보다 완벽한 회차였다. 스물 다섯 번째 시나리오에서 마왕이 되고, ‘거대 설화’까지 얻었으니까. 어쩌면, 이번 수정본에서는 내가 원하던 ‘결말’이 기록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잘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녀석도 그렇게 말했다. ‘이계의 신격’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게 그랬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유중혁은 지난 1차와 2차 수정본 때와는 달랐다.
이성을 잃고 있었고, 성급했고, 계획적이지도 않았다. 3회차를 겪고 온 유중혁은, 어딘가가 심각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날, 3회차의 모든 것이 끝났다.」
그 부분을 읽었을 때에야, 나는 뭐가 잘못된 것인지 깨달았다.
쿠구구구구.
흉벽 너머로 몰려오는 ‘검은 안개’를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는 [제4의 벽]이 문장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김독자는 생각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죽으면 나는 살아날 수 없다.
이제 내겐 부활 특성이 없으니까.
저 ‘이계의 신격’에게 삼켜지게 되면, 나는 수식언의 맥락과 함께 통째로 소멸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놈을 막을 수만 있다면······.
「‘멸살법’ 어디를 뒤져도, 지금의 내가 놈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한수영은 말했다. 지구의 시나리오는 원작의 궤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우리는 원작의 특수를 노리며 원하는 결말로 향할 수 있다.
시계탑 아래로, 나를 올려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보였다.
「아니, 한 가지 방법은 있다. 원작에서는 ‘실패한’ 방법.」
······나만 잘 하면 된다.
「살아야 한다. 싫어도 살아야 한다.」
누구도 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만, 모두가 ‘결말’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까.」
쩌저저저저적!
밤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눈동자가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초월좌들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미리 이야기를 맞춘 키리오스가 이쪽을 보며 외쳤다.
“빨리해라, 멍청한 제자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탑 아래로 내려갔다. 척준경과 스승들이 벌어준 시간을 헛되이 써서는 안 된다.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으아아아아아! 싫어! 독자 형!”
“혼자선 안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우릴 모은 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이 이 모든 걸 알려줬잖아!”
일행들의 외침 속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한다.
정말로.
정말로, 필요한 이야기만 한다.
[살아 주세요.]
머리에서 돋아난 뿔이 간지럽다. 등에서 솟은 날개가 아프다.
정희원의 절규와 이현성의 울부짖음이 들린다.
아이들이 나를 향해 손을 뻗는다.
미리 내게서 이야기를 들었던 유상아는, 울면서도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유상아는 잘 해낼 것이다.
쿵, 하고 지면을 내리찍는 순간 전경이 빠르게 밀려났다.
일행들의 비통한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어쩌면 말해주고 싶었다.
「나도 당신들과 결말을 보고 싶다.」
콰아아아아아!
대기권을 꿰뚫는 폭음과 함께 날갯죽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술잔을 떨어트립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깊은 탄식을 뱉습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무운을 빕니다.]
어떤 성좌들은 나를 걱정했고.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일부 성좌들이 당신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또 어떤 성좌들은 나를 비난했다.
그리고 누구도 코인을 후원하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성좌들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코인을 받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뺨을 닦으며, 김독자는 막막한 우주를 바라보았다.」
안개의 중심부. 그곳에 척준경과 파천검성, 그리고 키리오스가 만들어낸 작은 상흔이 보였다. 나는 [전인화]를 전력으로 발동해, 그 상흔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본래였다면 절대 시도하지 않았을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계의 신격들은 자격이 없는 존재와는 언어를 나누지 않으니까.
고오오오오오!
오른손에서 피어오른 [백청강기]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의 칼날을 키웠다.
전신의 혈관을 긁어대며 발출한 마기가 희고 푸른 강기의 다발 위에 검은 아우라를 덧씌웠다. 오른손에 깃든 마력이 폭발하며 안개의 중심부에 강력한 충격파가 터졌다. 일순간 아주 작은 틈새가 벌어졌고,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꾸구구구구국.
새카만 안개 속에 진입하자, ‘이계의 신격’이 정체를 드러냈다.
침투한 세균을 눈치챈 백혈구처럼, 수천, 수만, 수억······ 셀 수도 없이 많은 입자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 더 네임리스 미스트(The nameless mist).
이 <스타 스트림>의 성간을 떠도는 재앙의 이름.
나는 그 존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위대한 이계의 신격이여.]
엄밀히 말해, 이 안개는 그 신격의 원형(元型)조차 아닐 것이다.
원형이 낳은 끔찍한 분신들 가운데 하나일 뿐.
그런데 그 분신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부탁합니다. 물러가주십시오.]
내 말에, 입자들이 파르르 진동했다.
당연히 말이 안 통할 거라 예상은 했다.
츠츠츠츠츳!
주변으로 모여든 안개의 입자들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당신의 화신체를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이 당신의 정신을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의 영향으로 이 아득한 존재 앞에서도 나는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대 설화’가 조금씩 갈려 나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안개가 알 수 없는 이계의 언어를 지껄였다. 아마 해석이 되었더라도 제대로 듣지 못했을 것이다. ‘형용할 수 없는 아득함’은 무의식에 가까운 존재니까.
이야기를 좇는 본능만이 남은, 굶주린 포식자.
질식시킬 듯 몰려드는 안개 속에서 내 존재는 조금씩 옅어져 갔다.
[······빌어먹을 새끼.]
츠츠츠츠츳.
우리엘이 강림해도, 이 녀석은 막을 수 없다.
현시점의 제천대성이나, 심연의 흑염룡으로도 안 될 것이다.
셋 다 온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
「그렇기에, 지금 김독자를 도울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멸살법’에는 나오지 않았던 존재.
하지만 지금 나를 도와줄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저 ‘안개’에 대적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
험한 안개 입자 사이로 어렴풋이 이계의 별빛들이 보였다. 그에게 ‘제대로’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
[은밀한 모략가!]
전력을 다해 발출한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성간을 건너간다.
일순 안개가 꿈틀대며 포효했고, 저 먼 은하 건너편에서 뭔가가 반짝였다.
나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나는 당신과 ‘이계의 언약’을 맺겠다!]
*
이계의 언약을 맺었던 유중혁의 모든 회차는 불행해졌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오거나, 말도 안 되는 계약을 이행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 방법뿐이었다.
내게 생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안개는 포식을 멈추지 않았다.
나를 먹는 것도, 73번째 마계를 먹어 치우는 것도 그만두지 않았다. 뜯겨 나가는 설화를 보며 불현듯 좋지 않은 예감이 스쳐갔다. 설마 ‘은밀한 모략가’도 이 녀석을 막을 수 없는 건가?
츠츠츠츠츠츠츳!
시공간이 삐끄덕거리며, 모든 것의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실로 압도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힘이, 근처의 시공간 전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안개가 울부짖었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의 생명 활동이 급격하게 잦아들었다. 마치 빙하 속에 얼어붙은 생명체처럼, 영원히 그 시간 속에 갇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모르는 어떤 은하에 서 있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 보자 <스타 스트림>의 정경이 보였다.
<스타 스트림>의 외곽, 저 별들의 성운에서 ‘가장 먼 곳’.
성류를 밝히는 무수한 별들이 발치에 매트처럼 깔려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지루한 광경이지.】
다른 이계의 신격과는 달리 몹시 명징하고 또렷한 목소리.
사람의 형체를 띤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너를 기다렸다. ‘종장(終章)’을 추구하는 존재여.】
벌린 입 속으로 새하얀 어둠이 보였다.
그저 담담히 말을 듣는 것 뿐인데, 화신체가 위태롭게 떨려왔다.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그 어둠의 중심부에 똬리를 튼 악(惡)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떨었던 것은, ‘은밀한 모략가’가 품은 불길한 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영원(永遠)’을 갈망하는 존재라 불러야 할까.】
나는 잠시 입을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
그의 말은 내게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영원(永遠).
종장(終章).
서로 상반되는 두 단어가, 하나의 말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거대 설화를 얻었을 때 내가 들은 메시지와도 같았다.
―당신은 ‘영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당신은 ‘종장’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기이하게도 내 ‘끝’은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양산형 제작자’를 비롯한 성좌들이 내게 필터링의 정체를 물었을 때 ‘종장’이라고 답했던 것은, 그쪽이 성좌들을 설득하기 더 쉬웠기 때문일 뿐이었다.
나는 누구에게도, 내 ■■가 두 가지 의미라는 것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면, 말하지 않은 것이 더 크게 들리는 법이지.】
[‘제4의 벽’이 불길하게 흔들립니다!]
[‘제4의 벽’이 부피를 키우며 당신을 보호합니다.]
[‘제4의 벽’이 ‘은밀한 모략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냅니다!]
【‘최후의 벽’의 파편인가······ 걱정 마라. 해칠 생각은 없으니.】
알 수 없는 웃음이 그림자의 입가를 스쳐갔다.
은밀한 모략가.
제천대성, 우리엘, 심연의 흑염룡과 더불어 가장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온 성좌.
‘멸살법’을 읽은 나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몇 번이나 그와 만나는 연습을 했지만, 그게 이런 식이 될 줄은 몰랐다.
“처음 뵙겠습니다, ‘은밀한 모략가’.”
나는 그를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작가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시나리오의 심해를 ‘기어다니는 혼돈’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