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281화 정희원이 중얼거렸다. “······독자 씨?” 김독자가 발하는 빛살 너머로, 거대한 눈이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정희원은 미칠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떨었다.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일그러지며, 지진파와 함께 지반이 해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73번째 마계’가 고통 속에 울부짖습니다!] 파괴된 지각이 용암을 뿜어댔고, 넘쳐 흐르는 열기는 다시금 공허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공단]을 중심으로 모든 세계가 좁아지고 있었다. 이곳이 이 지경이라면, 다른 [공단]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뻔했다. 츠츠츠츠츳! 설화로 증폭된 초월좌의 마력이 움직였다. 저 ‘눈’에 직접 대항하는 것은 무리지만, 지진파를 지체시킬 수는 있었다. “빨리해라, 멍청한 제자야!” 키리오스의 외침과 함께, 공단의 흉벽 너머로 공간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안개 속에 파먹힌 지평선이 새카만 허무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지평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희원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맞다면, 스승들과 김독자는 이 상황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아저씨! 이거 대체 무슨 일인데!” 척준경의 화신체가 소멸하고, 키리오스와 파천검성이 저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될 때까지 그 ‘김독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쉴 새 없이 허공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리는 김독자의 입술. 저 먼 우주 속에서 뭔가를 찾아 헤매듯 바삐 움직이는 눈동자. 정희원은 깨달았다. 자신들이 포기하지 않았듯, 김독자 역시 포기하지 않았음을. 김독자가 천천히 지상을 향해 내려왔다. 그것을 신호로 정희원이 외쳤다. “다들 준비하세요!”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저희가 뭘 하면 됩니까?” 모두가 김독자를 보고 있었다.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김독자라면 뭔가 생각해둔 것이 있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김독자가 일행들을 마주 보았다. 지난 며칠 동안, 김독자는 일행들에게 많은 것들을 내주었다. 이현성은 새로운 방패를 받았고, 정희원은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 이지혜는 마력을 집중적으로 강화시켰고, 신유승과 이길영은 다수의 대군 통제 스킬을 익혔다. 그랬기에 일행들은 믿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설화의 소유주들에게 깃듭니다.] 그들이 함께 쌓은 이 ‘거대 설화’가 있다면, 그리고 김독자가 준비한 작전이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적이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수르야의 궤도 열차조차 떨어트린 게 그들이다. 설령 그 어떤 적이 온다고 해도······. “아저······씨······?” 가장 먼저 이상 신호를 보낸 것은 신유승이었다. 츠츠츠츠츳! 거친 스파크와 함께 신유승의 무릎이 꺾이듯 주저앉았다. 단단한 쇠사슬에 묶인 것처럼, 몸이 조금도 움직이질 않았다. 「이것은 독자(獨子)의 설화.」 김독자의 몸에서 흘러 나오는 ‘거대 설화’가, 강력한 족쇄가 되어 일행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현성의 거구가 느릿느릿 바닥에 주저 앉았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든 이현성이 물었다. “독자 씨? 이게 대체······.” 김독자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분명히 그곳에 있었음에도, 그는 함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분명히 다 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일까. 왜 저 사람은, 저기에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일까. 홀로 존재하는 ‘설화’는 없다. 김독자의 ‘왕이 없는 세계의 왕’이 유중혁의 ‘패왕의 이름을 계승한 자’와 연결되어 있고, 정희원의 ‘미래악의 배제자’가 김독자의 ‘이야기꾼을 능멸한 자’와 연결되어 있듯. 일개 설화도 그럴진대, 더 커다란 이야기를 공유하는 ‘거대 설화’라면 말할 것도 없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은, 끔찍한 전장에 참가했던 모두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마계의 봄’은 오직 김독자만의 것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의 최고 담화자(談話者)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일행에게 주어져 있던 ‘거대 설화’의 모든 지분이 통제되고 있었다. 뒤늦게 일행들도 ‘거대 설화’의 지분을 사용해 저항했다. 정희원, 유상아, 이현성, 이길영, 신유승······. 하지만 그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합쳐도, 단 한 사람의 거대한 의지를 이길 수 없었다. 만약 유중혁이 깨어 있었다면 달랐겠지만, 지금 이곳에 유중혁은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정희원이 고통스럽게 외쳤다. “잠깐만! 뭔데요! 이거 대체 뭐냐고요!” 김독자의 표정을 올려다 본 정희원은 그제야 뭔가를 깨달았다. 닥쳐오는 위기를 앞두고 늘 김독자가 짓던 표정이 있었다.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씩 웃던, 조금은 재수 없지만 사람을 안심시키던 표정. 그러나 지금 김독자의 표정은······. 어째서. “어차피 이럴 거였으면 며칠 동안 준비했던 건 다 뭐예요! 나한테 준 스킬들은 대체 뭐냐고요!” 정희원의 처절한 외침에, 처음으로 김독자가 입을 열었다. “그건 28번 시나리오의 ‘사스콰치’들을 상대하라고 알려드린 겁니다.” “그, 그럼 제 방패는······.” “35번 시나리오에서 ‘알곤킨의 뱀’을 잡을 때 유용할 겁니다. 같이 드린 스킬도 꼭 잊지 마시고요. 사용법은 모두 알려드렸죠?” 늘 그랬듯, 그 모든 안배에는 이유가 있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묻는 일행들에게, 김독자는 하나하나 이유를 알려 주었다. “그럼 이건······ 이번 시나리오는······.” 하지만 그 안배들 중 어떤 것도, 지금 이 상황을 위한 것은 없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를 덮고서 저만치 닥쳐온 어둠. 그 어둠을 보며, 김독자가 말했다. “이건 제가 해결합니다.” “씨발! 개소리하지마!” 정희원이 울고 있었다. “못 보내! 또 혼자 가지마! 제발!” 아무리 김독자라도 저걸 혼자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두 명의 초월좌와 척준경조차 막아내지 못한 존재. 그런 존재를, 김독자 혼자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다. “으아아아아아! 싫어! 독자 형!” 지난 번처럼 빚을 지고 싶지 않아서 강해졌다. 지옥 같은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했고, 미친 듯이 괴수들을 잡았다. 정희원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혼자선 안 된다고 말한 건 당신이잖아! 우릴 모은 것도 당신이잖아! 당신이 이 모든 걸 알려줬잖아!” 희미하게 웃는 김독자의 입술에서 낯선 진언(眞言)이 흘러나왔다.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알아! 그걸 아는 사람이, 어떻게······!” [그래도 지금은 아닙니다.] 이현성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저는 이런 거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도움 필요 없단 말입니다. 전 여기서 죽겠습니다! 독자 씨랑 같이 여기서 죽겠습니다!” 이곳에서 죽겠다. 하늘을 보던 김독자가 시선을 낮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성좌, ‘구원의 마왕’이 일행들을 바라봅니다.] 일행들은 그 메시지를 들었다. 흩날리는 김독자의 머리카락을 보며. 긴 속눈썹과 눈동자를, 하얗게 빛나는 뺨과, 슬프게 일그러진 입술을 보며. 새삼스럽게도, 김독자가 그런 얼굴로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살아 주세요.] 마치 하나의 정언명령처럼, 무력하게 그 말을 들었다. [마왕, ‘구원의 마왕’이 시선을 거둡니다.] 김독자의 모습이 변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츳!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마왕의 힘이 깨어나고 있었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73번째 마계’의 설화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하얀 김독자의 코트가 마기로 인해 검게 물들어 갔고, 김독자의 머리 위에 뿔 두 개가 솟았다. 오직 ‘마왕’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왕화]의 권능이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자신의 친우를 바라봅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자신의 적수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분통한 고함을 내지릅니다.] [성좌, ‘지고한 빛의 신’이 ‘73번째 마계’의 마지막을 지켜봅니다.] 김독자의 어깻죽지를 뚫고 자라난 새카만 깃털이 밤하늘을 품듯 펼쳐졌다. 시계탑의 초침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김독자의 신형이 솟구쳤다. 마치 이 시간을 떠나듯이, ‘구원의 마왕’은 하나의 빛이 되어 하늘을 날았다. 콰아아아아아! 김독자의 신형이 창공을 꿰뚫는 순간, 천둥이 내리쳤다. 몇 번인가 우레가 쏟아졌고,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던 안개가 주춤거렸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광경. 일행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김독자가 사라진 밤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완성되지 못한 시계탑은 삐걱거리면서도 계속해서 시간을 밀어댔다. 1분, 2분, 3분······.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김독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정희원은 절규했다. “김독자아아아아아!” 거의 동시에 경계를 지키던 초월좌들이 흉벽에서 튕겨져 나왔다. 넝마가 된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춤거리던 안개가 다시 세계를 파먹고 있었다. 지평선을 모조리 먹어치운 그것은 어느새 흉벽 근처까지 와 있었다. 입자 단위로 해체되어 스러지는 흉벽.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정희원은 생각했다. 막지 못했다. 그 김독자조차, 저걸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범람한 안개가 [공단] 전체를 덮쳐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츠츠츠츠츳! 정희원은 자신의 몸이 어딘가로 전송되는 것을 느꼈다.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유상아도, 울부짖으며 하늘을 보던 이현성도. 다리를 끌어 안은 채 주저앉은 한명오와 부서진 성을 사수하던 공필두까지. 모두, 새하얀 스파크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유중혁―김독자 공단’에 있던 모든 것이,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었다. 분통하다는 듯, 안개 건너편에서 위협적인 울음이 들려왔다. 【■■■■······ ■■■■■■!】 이윽고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 희미한 소란 속에서 유중혁은 눈을 떴다. 전신의 근육이 잘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래도 [기사회생]의 후유증이 큰 것 같았다. 금이 간 천장을 올려다 보며, 침착하게 몇 번인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해냈다. 마왕 선발전이 있었고. 회귀를 거부했고. 김독자와 함께, 수르야와 싸워 이겼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에 활력이 돌았다. 이겼다. 이긴 것이다. 거칠게 움직인 마력이 전신을 순환하자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천천히 감각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깜빡이자, 주변의 정경도 점차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실이었다. 부드러운 침대의 감촉. 오른손에 딱딱한 뭔가가 느껴졌다. 옅은 신음과 함께 상반신을 들어 올리자, 조그만 회중 시계가 시계 끈과 함께 팔에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움직이는 시계 바늘이, 그의 심박처럼 가늘게 뛰고 있었다. 잠시간 유중혁은 그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창 밖으로 희미한 볕이 들고 있었다. 마계의 볕이라기엔 지나치게 환한 햇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유중혁은 창가로 다가갔다. 무너진 [공단]의 흉벽 너머로 낯설면서도 익숙한 정경이 보였다. 부서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폐허가 된 경복궁. 무너진 광화문의 잡거빌딩들 사이로 피어오르는 연기. 이곳은 서울이었다. 창밖으로 주저앉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왜 그가······ 그들이, 서울에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공단]의 건물들과 함께 통째로. 유중혁은 황망한 눈길로 일행들을 헤아렸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 스산한 느낌에 중얼거린 순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설화, ‘생과 사의 동료’가 침묵합니다.] 멍한 얼굴로 메시지를 보던 유중혁이 다시 한 번 창밖을 살폈다. ······없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떤 별의 빛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환한 하늘. 그 너머로 보이는 성좌들의 빛을 헤아린다. 헤아리고, 또 헤아린다. 모르겠다. 별들이 너무 많아서, 찾을 수 없는 것인가. 유중혁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메시지 창이 열리며, 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메시지가 반송되었습니다.] 오류일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반복해서 메시지를 보냈다. 보내고, 보내고, 또 보내고. 돌아오는 메시지의 숫자만큼, 유중혁의 시선도 천천히 낮아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금일 제공된 메시지 할당량을 모두 소진하였습니다.] 째깍거리는 회중시계를 전경으로, 담담한 메시지들만이 유중혁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 . [성좌, ‘구원의 마왕’은 <스타 스트림>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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