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283화 기어다니는 혼돈. 이 우주의 ‘근원’에 가장 가까운 이계의 신격 중 하나이자, 그나마 인간들에게 호의적인 존재······ 어디까지나 신화에 따르면 그렇다는 얘기고, 사실 ‘멸살법’에는 그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기어다니는 혼돈이라······ ‘최후의 벽’이 나를 그렇게 부르던가?】 “그냥 제 추측입니다.” 【‘공포의 기록자’들이 남긴 문헌인가. 100년도 되지 않은 기록을 믿다니, 생각보다 순진하군. 인간의 언어로는 미지의 편린조차 드러내지 못하거늘.】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멸살법’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의 원형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화에서도 ‘이계의 신격’에 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멸살법’의 74회차에서 ‘공포의 기록자’들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우리가 쓴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미지의 공포를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었던 것은 거짓말뿐이었다.”」 때문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든 채 물었다. “······지구에 알려진 신화가 틀린 겁니까?” 【나는 네게 ‘은밀한 모략가’다. 그것이면 충분하지.】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충분한 대답이기도 했다. 그가 ‘기어다니는 혼돈’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은밀한 모략가’는 수식언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신격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저것을 막아달라는 부탁이겠지.】 “그렇습니다.” ‘은밀한 모략가’가 내려다본 곳에, 무지막지한 안개 덩어리가 꾸역꾸역 행성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은밀한 모략가’의 권능으로 해당 계(界)의 시간이 느려져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정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르르르르······. 가만히 그쪽을 들여다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말했다. 【저 안개는 태초에서 비롯된 재앙. 온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 “방법이 있다는 걸 압니다.” ‘은밀한 모략가’는 내 말에도 아랑곳 않고 그저 우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긴장한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온한 소리를 내며 일렁이는 그림자. 채널에서 간접 메시지를 들을 때만 해도 이런 느낌일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장난기도 많고, 친화력도 좋은 성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눈앞의 ‘그림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무섭도록 차갑고 서늘한 감각뿐이다. 스스스스슷. 무슨 조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멀찍이 보이던 ‘73번째 마계’의 모습이 불현듯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배율의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는 것처럼, 나는 [공단]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독자아아아아아아! 환청처럼 들려오는 정희원의 목소리. 절망 속에 절규하고 있는 일행들이 보였다. 【왜 저들을 구하려는 것이지? 너 하나만 살아도 결말은 볼 수 있을 텐데.】 “저들이 있어야 결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 말을 하며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의 질문들과 대답들을 시뮬레이션했다. 움켜 쥔 손바닥에 땀이 고였다. 여기서 실패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대화에서 ‘은밀한 모략가’를 설득해야만 한다. 【그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면?】 나는 반쯤 벌렸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빌어먹을, 김독자! 그만둬! 제발! 돌아오라고!」 「난 이런 거 원하지 않아. 이런 식으로 살아남고 싶지 않다고.」 「뭐든 할게요. 죽으라면 죽을게요. 가만 있으라면 가만 있을게요. 하지만 제발, 그런 짓은 하지 마세요! 제발!」 [전지적 독자 시점]으로 들려왔던 일행들의 목소리. 그들은 전하지 못했으나, 나는 들었던 말들. 【저들이 원했던 결말이 저곳에서 너와 함께 죽는 것이었다면? 그래도 기어코 저들을 구하겠다는 것인가?】 나는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저주다.】 변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대신해 대답한 것은 나의 설화였다. [설화, ‘구원의 마왕’이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설화를 보며, ‘은밀한 모략가’는 계속해서 물었다. 【죽어야 할 자들을 살려서 세계선을 바꾸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힌 후 네가 원하는 결말에 도달한다고 한들······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림자의 텅 빈 눈이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싹한 냉기가 등골에 스며들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든, 너는 진정으로 그들에게 닿지는 못한다.】 간접 메시지로는 성좌의 본질을 알 수 없다. 책으로만 세계를 배운 내가 등장인물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어쩌면, ‘은밀한 모략가’를 만나러 온 것은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러서기엔 이미 늦었다. 나는 잠깐의 사이를 둔 채 입을 열었다.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벽’은 남지 않느냐고.” 그것은 언젠가 장하영이 했던 말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해도, 무엇을 전해도 벽 너머의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벽 위에 뭔가를 쓰고 또 쓰다 보면, 적어도 ‘벽’은 바뀐다고.” 장하영에겐 제대로 된 인사를 못 하고 왔다. 아마 유중혁과 같이 병동에 있었을 텐데. “그리고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언젠가, 누군가는 그 ‘벽’을 봐줄지도 모른다고.” ‘은밀한 모략가’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모든 문장은 해석자에게 다른 의미로 귀결된다.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밀한 모략가’에게, 내 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짜낼 수 있는 말이란 고작해야 28년분의 지혜뿐이었다. 부디 그 알량한 말들이 ‘은밀한 모략가’의 뭔가를 움직여주기를 기대할 뿐. 【너의 방식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궁금하긴 하군.】 마침내 은밀한 모략가가 입을 열었다. 【너의 방식으로 모든 것의 마지막에 도달해 세계를 구한다고 치자. 그러면 ‘다른 세계’는 어쩔 셈이지?】 “예?” ······다른 세계? 무슨 말인가 싶었던 순간, 바닥의 우주가 트럼프 카드처럼 뒤집혔다. 수십,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카드들은 제각기 다른 형상과 색감을 띤 채, 각자의 방식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타 스트림>보다 더 먼 차원. 흐릿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세계. 그곳에, 내가 읽었던 ‘멸살법’의 세계가 있었다. 극장 던전에서 개복치처럼 죽어가던 유중혁의 8회차가 있었다. 파천검성에게 까불다 황천길로 간 18회차의 유중혁이 있었고. 동료를 제물로 비정한 선택을 했던 41회차의 유중혁이 있었으며. 다시, 절망을 딛고 일어서는 181회차의 유중혁이 있었다. ······. 한때 나를 구했던 유중혁의 이야기들이 눈앞에 전시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회차’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네가 구원하지 못한 그 세계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 것이냐?】 생각해 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질문이었다. 저 ‘이야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유중혁의 3회차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원래 있어야 했을 ‘멸살법’의 모든 사건들은,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줬던 그 ‘세계’의 모든 일들은······ 이제, 없는 것이 되는 것일까. 나를 보던 ‘은밀한 모략가’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 어느새 바닥의 화면은 ‘73번째 마계’로 바뀌어 있었다.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은밀한 모략가’는 나와의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예상은 했다. 모든 ‘이계의 언약’엔 까다로운 조건이 깃드니까. “당신에게 종속되거나, 제가 죽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좋습니다.” ‘은밀한 모략가’의 입이 희게 벌어졌다. 내가 말한 조건들이 그저 우습다는 듯이. 【때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모두 네게 달린 일이지.】 “좋습니다. 하지만 조건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일행들을 구해 주십시오.” 【앞서 말했듯 저 ‘안개’를 없앨 수는 없다.】 “그럼······?” 【저 [공단]의 필멸자들만 구하면 되는 거겠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은밀한 모략가’가 쓰려는 방식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디로 옮겨 주길 원하지?】 “지구입니다. 가능하면 ‘서울’이면 좋겠군요.” 【그곳은 시나리오 폐쇄 지역인데, 바라는 게 많군.】 츠읏,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긴 손가락 중 하나가 잘려 나갔다. 두둥실 떠오른 그림자의 소지(小指)가, 이내 수만 개의 점으로 화해 우주를 날았다. 점들은 순식간에 은하를 건너 ‘73번째 마계’로 파고들었다. 발아래의 화면으로 [공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새로운 시나리오와 함께 어딘가로 이송되는 사람들. 공단의 인구는 족히 십만에 육박했다. 지금 ‘은밀한 모략가’는 그 모든 화신들에게 ‘개인 시나리오’를 발송한 것이다. 츠츠츠츠츠츳! 엄청난 개연성을 소진하는 일이었음에도, ‘은밀한 모략가’는 그저 손가락 하나의 희생으로 개연성을 대신했다. 시나리오를 받은 일행들이 마계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난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함’이 뒤늦게 행성을 먹어치우기 시작했지만, 이미 마계는 텅 비어버린 후였다. 일행을 놓친 안개가 분한 듯 울음을 토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내 차례로군.】 “말씀하시죠.” 【너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누굴 죽이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쩌면 특수한 제약이 걸려 있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은밀한 모략가’조차 건드릴 수 없는 개연성이 얽힌 존재거나. 【언약을 받아들이면 알게 될 것이다.】 “······거부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말에 ‘은밀한 모략가’가 지구로 이동한 일행들 쪽을 보았다. 【아직 내겐 손가락이 아홉 개 남았다.】 “받아들이죠.” 어쨌든 최악은 면했다. 일행들은 무사히 지구로 돌아갔고,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새로운 ‘서브 시나리오’를 획득하였습니다.] [<스타 스트림>의 시나리오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해당 시나리오의 정보를 재구성 중입니다.] [새로운 설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였습니다!] [당신에게 <스타 스트림>이 이해할 수 없는 설화가 발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나뿐이다. 나만 잘 해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날 것이다. ‘은밀한 모략가’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우주의 암흑이 일그러지며 작은 포탈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실 너 말고도 같은 언약을 행했던 존재가 있었지.】 ······나 말고도? 원작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이 시기에 ‘이계의 언약’을 행할 법한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네게 기대하는 바가 크다. 무사히 시나리오를 마친다면, 별 탈 없이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포탈은 내가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의 크기로 커졌다. 【다른 신격이 너를 이송해 줄 것이다. 그에게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 말과 동시에, 나는 포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사위가 한바탕 이지러지며, 온 세상이 의도를 읽을 수 없는 포스트 모던의 유화처럼 번져갔다. 화려한 색감 속에서 몇 번인가 구역질이 일었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는 거대한 문이 있었다. 쿠구구구구······. 나를 마주한 것은 끝없는 우주를 메우고 있는 거대한 거품들, 그리고 그 중심을 차지한 원형의 문이었다. 문이 커다란 눈을 뜨고 나를 보는 순간, [제4의 벽]이 경기를 일으키듯 발동했다. [‘제4의 벽’이 경고성을 발합니다!] 이 ‘멸살법’ 안에, 저런 거대한 ‘관문’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모 략 이 보 낸 존 재 인 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나를 굽어보았다. 【최 후 의 벽 의 파 편 ······ 그리고 ······.】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 답답한 목소리였다. 【······ 종 결 된 사 건 으 로 의 여 정 ······.】 “······저는 어디로 가게 되는 겁니까?” 【모 든 것 은 이 미 쓰 여 있 고, 동 시 에 쓰 여 지 고 있 다】 ······역시, 평범한 대화가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계의 신격’이란 대개 그렇다. ‘은밀한 모략가’가 무척 예외적인 경우일 뿐. 【과 거 현 재 미 래 는 다 르 지 않 으 니 부 질 없 는 이 야 기 만 이 남 으 리 라】 콰아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차원의 문. 저 안으로 발을 내딛으면,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저곳으로 들어가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품속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 따뜻하고 작은 솜뭉치 같은 것이 손과 함께 빠져 나왔다. [바앗!] 눈물을 그렁그렁 머금은 비유가 나를 향해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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