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276화 Episode 52. ■■ 마왕 선발전이 끝난 후, ‘유중혁―김독자 공단’은 재건으로 분주해졌다. 전쟁의 폐해로 바닥에 나앉게 생긴 공민들은 암담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비형을 설득해 얻은 구호 자원들이 아니었다면 분위기는 더욱 험악했을 터였다. “시계탑은 저쪽으로! 어이, 거기 조심해!” 공작들의 사망으로 다른 공단의 공민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온 덕에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나는 공민들을 도와 이틀 간 재건에 열중했고, 덕분에 도시는 차츰 활발한 분위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유상아 씨.” 유상아의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없었더라면, 기초 재건은 보다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마의 땀을 닦은 유상아가 말했다. “······독자 씨도 좀 쉬셔야죠.” “전 괜찮아요. 유상아 씨는?” 유상아는 내 가슴팍을 둘둘 감은 붕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도 양호해요.” 양호······. 어쩐지 유상아 다운 단어 사용이었다. 나는 작업을 멈추고, 유상아와 함께 시계탑에 올라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유중혁을 비롯해 중상을 입은 일행들은 아일렌의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 비교적 경상이었던 정희원과 이지혜는 공단의 입구 쪽 건설을 돕고 있었고, 병동 쪽에서는 다 나았으니 퇴원할거라며 떼를 쓰는 이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틀 간 열심히 노력한 덕인지, 적어도 광장 일대는 이제 사람 사는 곳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 일정은 빠듯하지만, 지금 무리해둔 것이 나중에는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저기 오네요.” 허공에서 일렁이는 포탈. 광장 쪽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꼬맹이가 있었다. 나는 가볍게 시계탑 아래로 점프해 녀석을 맞이했다. “독자 형! 으와아아아아앙!” 와락 안겨든 이길영이 내 품속에서 발버둥쳤다. 나는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주었다. “잘 있었냐? 키 좀 큰 거 같은데.” “진짜요?” “응, 이제 거의 유승이랑 비슷하겠는데?” “곧 더 커질 거예요!” 허공에 발생한 포탈로 넘어온 것은 이길영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쿵 소리를 내며 광장의 바닥에 떨어졌다. “오랜만입니다, 공필두 씨.” “······흥.” 내 안위 따윈 별 관심 없다는 듯, 잠시 나를 노려보던 공필두는 유상아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유상아가 희미한 미소로 고개를 숙이자, 기분이 조금 풀린 듯 공필두가 말했다. “난 네놈 보러 온 거 아니야.” 그래도 이 정도면 공필두도 많이 변했다. 이제 누가 그를 두고 십악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수영은?” “수영 누난 당분간 요양을 좀 해야 할 것 같대요.” 내 배에다 이마를 툭툭 부딪치던 이길영이 말했다. 요양이라······. 아무리 [심연옥]을 제물로 바쳤다 해도, 개연성을 감수하고 흑염룡을 몸에 강림시켰으니 타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못 올 정도일 리는 없는데······. “아, 수영 누나가 이거 전해주라고 했어요.”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이길영이 내게 쪽지를 건넸다. 한수영 답게, 어쩐지 집요한 느낌으로 꼬깃꼬깃 접은 쪽지였다. 반짝이는 이길영의 눈을 피해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열었다. ―다음에 또 이딴 거 시키면 죽여버린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안 온 이유가 있었구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붕대를 감은 한수영이 미친년처럼 날뛰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직 몇 가지 문제가 남았어. 쪽지엔 그 외에도 몇 가지 정보가 쓰여 있었다. 지구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한반도나 성운 간의 정세 같은 것들. 다행히 지구는 내가 아는 원작의 사이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했다. 사실 대부분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였기 때문에 굳이 이런 식으로 전할 필요 없는 정보였다. 한수영도 그걸 알고 있는지, 영 중언부언하는 투였다. ―아무튼, 그렇다고······ 뭐······ 잘 지내 멍청아. 지구 오면 봐. 아쉽다. 이번에 만나면 제대로 놀려주려고 했는데. 나는 쪽지를 코트 속에 넣은 후, 이길영과 공필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밤에 연회가 있을 겁니다. 들어가서 씻고 준비하세요.” “연회?” “손님들이 오시기로 했거든요.”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하지만 이 공단의 위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초대에 응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의 초대에 응합니다.] ······. 허공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간접 메시지를 보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 선발전 이후, 유중혁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회복되려면 얼마나 더 걸릴까?” “앞으로 2주일은 더 있어야 할 거예요.” 유중혁의 맥을 짚던 아일렌이 병실을 나서며 내쪽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당신도 좀 쉬어야 해요. 알죠?” “걱정 마.” 아일렌이 나간 후에도, 나는 유중혁의 병실을 떠나지 않았다. 잠든 녀석의 안색은 내가 본 어떤 ‘유중혁’ 보다도 더 창백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회귀’가 발동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는데도 돌아가지 않은 유중혁은 이 녀석이 처음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에게 꽂힌 설화팩들을 점검했다. 설화팩은 잘못 꽂으면 항마(降魔)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 나처럼 [라마르크의 기린]이 있는 경우라면 좀 다르지만······. “······팩도 꼭 지같은 것만 꽂아 쓰네.” 「내가 간다 고독한 세상아」 「소드마스터가 제일 쉬웠어요」 「난 다섯살 때부터 검을 잡았어 천재였지」 다행히 설화 전문가인 아일렌은 유중혁의 설화 구성을 잘 파악한 듯했다. 실제로 144회차의 유중혁은 이현성의 군대 설화를 잘못 수혈 받고 잠깐 돌아버린 적이 있었다. “입맛이 까다로운 녀석이야.”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거의 경기를 일으킬 만큼 놀랐다. 돌아보자, 수려한 외모의 거인이 벽에 기대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네가 들어오기 전부터.” 파천검성은 태연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유중혁 쪽을 일별했다. “너무 과한 치료야. 저놈은 무림 만두 몇 개만 던져 주면 금방 나을 텐데.” “여긴 무림 만두가 없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해도, 파천검성의 눈빛에 떠오른 기류는 몹시 온화했다. 무서운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래서, 널 때렸다는 게 저놈이냐?” 파천검성의 반대쪽 천장에 개구리만한 뭔가가 거꾸로 붙어 있었다. 키리오스 로드그라임이었다. “스승님.” “말해라. 저놈이냐?” 그러고 보니 키리오스를 무림으로 보낼 때 헛소리를 지껄였던 게 떠올랐다. 파천검성의 제자에게 두드려 맞았다고 그랬었던가. 키리오스의 잘 생긴 눈썹이 휘어지며, 그의 전신에 [전인화]의 아우라가 감돌기 시작했다.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이냐?” 나는 침을 삼키며 말을 주워 섬겼다. “그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닙니다! 사실 이놈이랑 사이가 꽤 안 좋거든요. 실제로 얻어 맞은 적도 있고······.” “얻어 맞기만 한 것이냐?” “물론 제가 때린 적도······.” 시스템의 허점을 노리긴 했지만, 왕좌 쟁탈전에서 유중혁을 피떡이 되게 때려준 적이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듣던 파천검성의 표정에 흥미가 스쳤다. “흐음. 내 제자를 때렸다고?” “그래서 누가 이겼지?” 허공에서 두 스승의 시선이 부딪쳤다. 그저 시선이 충돌했을 뿐인데도, 공간 지각이 흐트러지며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돌아왔길래 분명 사이가 좋아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나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파천검성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둔한 질문이군. 얼굴만 봐도 네 제자놈보다 내 제자가 한수위인 것이 자명하거늘.” “근육만 키운 기생오라비보다 내 제자가 약할 리 없다. 저래봬도 내 비전 무공을 전수한······.” “그래봤자 또 작아지는 무공이겠지.” 츠츠츠츠츠츳! 아무래도 이대로는 병실이 폭발할 것 같아서, 나는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두 분께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해 쏟아졌다. 나는 ‘격’을 발동해 간신히 그 압력을 견뎌내며 물었다. “<제1 무림>은 어떻게 됐습니까?” 줄곧 궁금했던 의문이었다. 파천검성과 키리오스가 이곳에 왔으니, 무림이 무사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상대는 ‘이계의 신격’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키리오스였다. “흥, 이 몸이 손수 움직였는데 그런 세계 하나 못 구할 것 같으냐?” 그렇게 말한 키리오스는 뭔가 기분이 상한 듯 그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가버렸다. ······왜 저러지? 파천검성은 키리오스가 빠져나간 창문 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막긴 막았는데, 전부 막았다고 보긴 힘들다.” “‘이계의 신격’은 퇴치한 겁니까?” 파천검성의 전신에서 은근히 느껴지는 ‘거대 설화’의 기운. 아마 <제1 무림>과 관계된 거대 설화인 게 분명했다. 파천검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벅찬 상대였지만, 못 싸울 것도 아니었다. 저 재수 없는 역설 놈도 와줬으니까.” 이계의 신격을 그저 ‘벅찬 상대’ 정도로 표현하는 것은 파천검성 정도가 되니 가능했다. “문제는 그다음에 온 녀석이었다.” * 이계의 신격에도 급은 있다. 말하자면, 그들 중에도 네임드가 있는 것이다. 가령 ‘옛 존재’라든가, ‘위대한 옛 존재’로 통칭되는 신격이 그들이다. ―녀석은 ‘옛 존재’도 ‘위대한 옛 존재’도 아니었다. 그런데 개중에는 그런 범주조차 넘어서는 까마득한 존재들도 있다. ―그런 녀석은 처음 보았기 때문에, 놈에 대해서는 확실히 설명할 수가 없다. 확실한 것은 나와 역설이 힘을 합쳐도 당해낼 수 없었다는 거다. 사실, 싸움조차 되지 않았다. 놈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무림과 함께 우주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파천검성의 말은 기이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원작의 전개대로라면, 그날 <제1 무림>에 그런 신격이 나타날 개연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신격이 나타났고,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알 수 없게 물러났다. ―마치, 다른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사라지더군. 옛 존재도 위대한 옛 존재도 아닌 존재. 파천검성이나 키리오스 같은 강자들이 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어 전의를 상실할 정도의 신격······. 와아아아아! [공단]의 중앙 홀에서는 조촐한 파티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몸이 회복된 몇몇 일행들. 그리고 초대를 받은 몇몇 성좌들의 상징체도 보였다. [흐음, 구원의 마왕. 내가 보낸 선물은 잘 받았나요?] 짓궂게 웃으며 다가오는 페르세포네. 역시나 이번에도 상징체는 유상아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상징체를 처음 보는 일행들은 놀란 표정이었다. 특히 유상아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저 이제 가터벨트 안 좋아합니다.” 차이나 드레스를 입고 있던 페르세포네가 부채를 흔들며 웃었다. [그래요? 꽤 성능이 좋은 걸로 보냈는데.] 성능이라는 말에 곁에 있던 이현성이 귀를 쫑긋 세우는 것이 보였다. 엉뚱한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재빨리 말을 받았다. “선발전에선 은혜를 입었습니다.” [흐음, 난 한 게 없는데요?] “‘하늘 걸음의 주인’을 설득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재 <올림포스>는 분열된 상태. 그녀가 헤르메스를 설득하지 않았더라면, 선발전에서 내가 싸워야 할 <올림포스>의 성좌들은 이보다 더욱 많았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생각해줘요.] 희미하게 미소를 띤 페르세포네는 기분이 좋은지 홀의 중심으로 올라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녀는 유상아를 끌어 당겨 파트너로 삼았는데, 처음에는 당황하던 유상아도 이내 질 수 없다는 듯 냉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정희원이 휘파람을 불었다. “상아 씨 멋지다!” 구석에서 벌써 열 번째 건배사를 마친 디오니소스. ‘성급한 늪의 포식자’와 술잔을 나누는 척준경의 모습도 보였다. 소규모 연회이긴 했지만, 지금껏 참석했던 그 어떤 연회보다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광경이었다. [모처럼의 휴식이로군. 축하하네, 구원의 마왕.] 뒤를 돌아보니, 헌앙한 정장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양산형 제작자.” 그 또한 이번 ‘선발전’에 도움을 준 성좌들 중 하나였다. [설화는 잘 보았네. 과연, 미식협에서 큰 소리를 칠만하더군.] “과찬이십니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양산형 제작자’와 잔을 부딪쳤다. 향을 맡아보니 꽤 독한 알콜이라, 슬쩍 입만 대고 도로 내려놓았다. 우리는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도 ‘양산형 제작자’는 질문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 말로 그를 비롯한 성좌들이 이곳에 참석한 이유이자, 내가 이번 연회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했다. 술을 홀짝인 ‘양산형 제작자’가 지나가듯 말을 던졌다. [‘끝의 자격’을 얻었으니, 필터링도 해제되었겠군 그래.] 장내의 분위기가 미세하게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홀은 여전히 떠들썩했지만, 하나둘 내게 모여드는 성좌들의 시선이 있었다. 페르세포네, 척준경, 디오니소스······. 사실 다들 관심없는 척 하면서도 이쪽 얘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성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을 무렵,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자네의 ■■는 무엇이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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