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275화 순식간에 성남시 인근을 쓸어버린 올림포스의 위인급 성좌들은, 천천히 공필두의 무장 성채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었다. [우리가 나서기엔 판이 너무 작은 것 같지 않나?] 성좌들은 하나같이 수치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이런 시나리오의 소재가 되기 위해 격을 쌓은 성좌는 아무도 없으니까. 의욕 없는 그 모습들에, 투박한 고대의 창과 방패를 쥐고 낡은 왕관을 쓴 성좌가 선심 쓰듯 입을 열었다. [불평은 그만 둬라. 이번 일만 끝내면 아버지께서 12신께 우리의 ‘승격’을 건의해본다고 하셨다.] [오이디푸스께서? 정말인가?] ‘눈먼 왕의 후계자’의 말에 성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성운에서의 ‘승격’이란, 성운 안에서 ‘거대 설화’의 지분이 향상됨을 의미했다. [햐아, 이제 우리도 소수점 첫째 자리로 갈 수 있는 건가?] 성운의 ‘거대 설화 지분’을 얼마나 갖느냐는, 곧 그 성좌의 강함을 방증하는 척도 중 하나다. 더 많은 지분은 더 많은 개연성을 담보하고, 그것은 더 많은 시나리오에서 제약을 벗어나는 원천이 된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도록 하지.] 시시덕대던 성좌들이 마침내 무장 성채로 진군을 시작했다. 제각기 쥔 성유물들이 허공에서 빛을 발하는 순간. 쿠르르르르. 하늘이 새카만 돔에 덮이듯 상공에서 빛이 사라졌다. 섬뜩하게 내려앉은 어둠에 무장 성채로 다가가던 위인급 성좌들이 동시에 멈춰섰다. [······뭐지?] 츠츠츠츠츳! 몰려온 먹구름에 일대의 빛이 모조리 꺼지고 있었다. 이 지역뿐만 아니라, 한반도 일대를 덮어버리는 새카만 어둠. 어찌나 깊은 어둠인지, 개연성의 스파크조차 그 어둠에 가려질 정도였다. ‘눈먼 왕의 후계자’가 당황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혹시······ 명계의 여왕이십니까?] 현재 한반도에 강림할 수 있는 성운은 <올림포스>뿐. 그리고 <올림포스>의 성좌들 중 적은 개연성으로 이만한 이적을 부릴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았다. 위인급 성좌들 중 하나가 희미한 빛을 내뿜어 주변을 밝혔지만, 불은 순식간에 꺼졌다. 블랙홀이 강림하여 모든 빛을 빨아들여버린 듯 불길한 적요가 덮쳐왔다. 불안해진 성좌들이 외쳤다. [여왕이시여! 오셨다면 부디 말씀을―] 성좌들 중 하나가 돌연 경고성을 발했다. [뭔가가 오고 있······!] 퍼거걱! 하늘에서 쏘아진 새카만 물체가 성좌 하나의 가슴을 꿰뚫었다. [끄어어억······!] 용의 발톱처럼 생긴 물체였다. 당황한 성좌가 피를 흘리며 발톱을 빼내려 했지만, 발톱은 점점 그 부피를 키우더니, 이내 성좌의 몸통 전체를 터뜨려버렸다. 꾸드득 소리를 내며 어둠 속의 점이 되어버리는 성좌의 화신체. 기겁한 성좌들이 소리를 질렀다. [으, 으어어어어!] 소리를 들었음에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과,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격’을 가진 존재라는 것. 명계의 여왕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모두 도망······!] 상황을 눈치 챈 ‘눈먼 왕의 후계자’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츠츠츠츠츠츳! 무장 성채 쪽에서 엄청난 스파크가 터져 나온 것은 그때였다. 어둠이 삼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한순간 도시의 어둠을 밝히자, 희붐한 사위 속에서 성채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눈먼 왕의 후계자’가 몸을 떨었다. [어, 어째서 당신이······!] 여인의 너머로 넘실거리는 흑염의 그림자. 이마를 덮는 흑발 사이로 적안(赤眼)을 빛내는 작은 소년의 얼굴이 언뜻 비쳤다. 쉬이이이익!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소년이 손을 들어 올리자, 새카만 용의 그림자가 창공을 뒤덮었다. 새하얀 치열 사이로 도드라진 송곳니. 소년이 웃자, 세상의 어둠이 숨을 죽였다. 그리고 학살이 시작되었다. * 오이디푸스 왕은 화면 너머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성좌, ‘눈먼 왕의 후계자’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성좌, ‘테베의 문지기’가 시나리오에서 퇴장하였습니다.] 화면을 새카맣게 메운 용의 그림자가, 달아나는 성좌들을 모조리 찢어발기고 있었다. 다행히, 한수영은 늦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광포한 웃음을 터뜨립니다.] ―아하하하하하핫! 한손에 붕대를 둘둘 감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괴이쩍은 웃음을 터뜨리는 한수영. 정말이지 흑염룡과 잘 어울리는 한 짝이었다. 저렇게 잘 놀 거면서 왜 지금까진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이디푸스 왕이 나를 보며 외쳤다. [어떻게 이런······ 어째서 묵시록의 후보자가 네 녀석들 따위와······!] 묵시록의 후보자······. 하긴, ‘오이디푸스 왕’ 정도면 이제 그 정도 정보 권한은 갖고 있겠지. 심연의 흑염룡은 ‘묵시록의 최후룡’ 후보 중 하나였다. [당신의 계책에 다수의 성좌들이 경탄합니다.] [성좌, ‘드러 누운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순수하게 감탄합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를 획득하였습니다.] 어둠으로 물들어 가는 경기도를 보며, 나는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심연의 흑염룡을 끌어들이는 것은 정말 최후의 수단이었다. 자칫하면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한수영도 있고, 흑염룡과 맺은 약속도 있으니 놈이 한반도를 파괴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끄······ 으······.] 고개를 숙인 오이디푸스 왕이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렸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나와 유중혁이 동시에 칼을 세워 들었다. [네놈······!] 흑염룡에게 당한 성좌들 중에는 오이디푸스 왕의 아들도 있었다. 격분한 오이디푸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덤벼들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죽여버리겠다!] 예상대로, 오이디푸스와 함께 살아남은 성좌들이 동시에 격을 발출했다. ‘거대 설화’는 얻었지만, 여전히 저쪽도 만만한 전력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전인화]를 재차 발동하려는 순간, 땅속에서 솟아오른 뭔가가 오이디푸스의 목을 잡아챘다. [커헉······!] 거대한 몸집의 수르야가, 네 개의 팔 중 하나를 움직여 오이디푸스의 목줄기를 틀어 쥐고 있었다. 오이디푸스 왕이 경악한 눈으로 수르야를 돌아보았다. [어, 어째서······!] [······그만하라.] 수르야의 중후한 ‘격’이 다른 성좌들을 내리 눌렀다. [더 이상 추한 꼴을 보이지 말아라.] [싸움에서 진 개의 말을 듣진 않겠다! 이렇게 끝낼 수는······!] 다음 순간, 오이디푸스 왕의 몸이 폭발했다. 잔혹하게 터져 나간 화신체가 수르야의 눈앞에 잿더미로 흩어지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성좌들의 움직임이 굳었고, 긴장한 일행들도 한 걸음을 물러났다. 그렇게 심한 중상을 입고도, 아직 저만한 힘이 남아 있다니······ 그야말로 경이로운 생명력이다. 나는 남은 일행들의 전력을 빠르게 계산했다. 만약 지금 당장 수르야와 부딪치게 된다면······. [우리의 패배다.]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수르야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일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희열에 입술을 깨물었다. 저 위대한 <로카팔라>가, 자신의 입으로 패배를 인정했다. [‘마왕 선발전’의 승자가 정해졌습니다.]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에, 멀리서 절규가 들려왔다. ‘마왕 선발전’에 패배한 공작들의 비명이었다. 스스스스스······. 하나 둘, 우리를 노려보던 성좌들의 화신체가 흩어져 갔다. 시나리오가 끝나자 <스타 스트림>이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던 개연성을 회수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르야의 몸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는 수르야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것이냐고. [구원의 마왕.] 하지만 수르야의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면 수르야는 평범한 성좌가 아니었다. 다른 성좌도 아닌, 위대한 <로카팔라>의 일좌. 지고의 수식언을 가진 그 성좌가, 우리를 상대로 온갖 비겁한 술수를 써온 것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이번 ‘선발전’은 그의 격과 자존심에 지대한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인 수르야가 물었다. [‘끝의 자격’은 얻었는가?] “아마 얻게 될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하찮은 위로는 집어 치우라는 듯, 수르야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내가 너의 설화를 지켜볼 것이다.] 수르야 또한, 언젠가 ‘끝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이곳이 아닌, 저 높은 <스타 스트림>의 후반부 시나리오에서. 파스스스스스······. [그리고······.] 짧은 순간, 수르야의 시선이 떨어진 열차의 파편을 향했다. 나와 수르야가 부딪쳤던 칸의 파편이었다. 그런데 그 파편 중 일부의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그것은 나와의 전투로 망가진 흔적이 아니었다. 그 전부터 열차에 새겨져 있던 상흔.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알겠다.] 수르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주변을 압박하던 격들이 동시에 사라지자, 묘한 적요가 자리 잡았다. 실감이 나질 않았다. 계획했던 것들을 침착하게 실천했고, 몇 가지는 운이 따랐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스물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유중혁도 수르야가 사라진 자리를 보고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 ‘마왕 선발전’을 클리어하였습니다.] [해당 선발전의 보상이 준비 중입니다.] [마계에 새로운 마왕이 등장했습니다!] [당신은 ‘73번째 마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나와 유중혁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허공에서 나를 굽어보는 무수한 존재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당신에게 호기심을 갖습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당신을 자신의 마계에 초대합니다.] . .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축하 인사를 보냅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당신에게 선물을 보냈습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건배사를 제의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크게 기뻐합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선들이 있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에서부터, 지금의 나로서는 발끝조차 쳐다볼 수 없을 아득한 존재들까지. 털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장하영이 멍한 목소리를 냈다. “······끝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들을 둘러 보았다. 정희원을 업은 이현성이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다친 유상아를 부축한 이지혜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신유승이 내 소매를 붙잡은 채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축 늘어진 오수를 입에 문 파천신군이 가볍게 짖었다. 그리고 그 뒤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아스모데우스의 화신체를 품에 안은 한명오가 지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바위 언덕에 파천검성과 키리오스의 모습도 보였다. 다친 몸을 웅크린 ‘성급한 늪의 포식자’와, 그의 등에 걸터 앉은 척준경까지. 이들 중 하나라도 없었더라면, 결코 이겨낼 수 없었을 시련이었다. [당신들의 ‘성운’이 <스타 스트림>에 널리 알려집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성운 ‘김독자 컴퍼니(임시)’를 기억했습니다.] 메시지를 들은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부터 바꿔야겠군.”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는 녀석을 향해 나는 씩 웃어 주었다. 조만간 성좌들에게 성운 이름을 공모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하늘 너머로 깊은 어둠이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시련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 설화’가 완전히 개화합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을 얻었습니다.] 폐허가 된 마계의 공단에서, 공민들이 하나둘 성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승리에 도취된 사람들. 누군가가 함성을 질렀고, 또 누군가가 나와 유중혁의 이름을 연호했다. 아일렌과 마르크의 모습도 보였다. [<스타 스트림>이 당신의 ‘거대 설화’에 만족합니다.] [당신은 ‘끝의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마침내, 내가 기다리던 메시지들이 들려왔다.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전설급 설화들이 서막을 구성합니다.] [당신의 첫 번째 거대 설화가 ‘기(起)’를 완성하였습니다!] 오랜 인내의 끝에, 드디어 최종 시나리오로 향하는 첫 발자국이 찍힌 것이다. [당신에게 ■■의 권한이 주어집니다.] [■■의 필터링이 해제됩니다.] 오래도록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마지막 장의 정보가, 드디어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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