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277화 내 ■■는 무엇인가. ‘양산형 제작자’라면, 당연히 그 질문을 던질 거라 생각했다. “궁금하십니까?” [이곳에 궁금하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 양산형 제작자가 옅게 웃자, 몇몇 성좌들이 헛기침을 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다른 일행들도 내게 주의를 집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다들 왜······.” “쉿.” 눈치 없이 끼어들려는 이현성을 정희원이 제지했다. 나는 천천히 장내의 모든 인원들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홀의 모든 존재가 나를 보고 있었다. ■■······. ‘멸살법’에서는 이것을 정말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한다. 가령, ‘도깨비의 왕’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이야기의 끝이자 시작.」 하지만 유중혁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빌어먹을 스타 스트림.」 이현성이라면 “전역”이라 표현할 것이고, 유상아라면 “노후 설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또 이지혜에게는 “졸업”이겠지. 그리고 놀랍게도, 그 모든 것이 ■■의 해석으로서는 틀리지 않은 것이었다. 양산형 제작자가 물었다. [‘끝의 자격’을 얻은 이는 모두 다른 ‘끝’의 이름을 얻지. 알고 있는가?] “가진 설화가 모두 다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애초에 ■■는 정확한 의미로 소통이 가능한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여기서 필터링이 풀렸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일 뿐이다. 아마 나처럼 히든 시나리오를 받은 성좌들 또한, 모두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 <히든 시나리오 ― 단 하나의 설화> 분류 : 히든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에 도달할 단 하나의 설화를 완성하시오. 제한시간 : ― 보상 : ??? 실패시 : ??? * 현재 당신은 ‘기(起)’를 완성했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추가 시나리오 설명을 참조하십시오. + 히든 시나리오, ‘단 하나의 설화’. 이 시나리오는 ‘끝의 자격’을 얻은 모든 존재들에게 부여되는 것이었다. 아득한 <스타 스트림>의 은하에서, 무수한 설화의 바다를 뒤져 단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 전설급 설화도, 신화급 설화도, 심지어는 내가 얻은 거대 설화도 결국은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가는 여정일 뿐이었다. 눈앞에 있는 양산형 제작자나, 저기 있는 페르세포네 또한 이 시나리오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끝내 도착하는 곳은 나와는 다른 곳이겠지만. [바앗!] 내가 지시하기도 전에, 비유가 홀의 채널을 차단했다. 아마,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비유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리라. 허공에서 성좌들의 항의 메시지가 흘러나오는 사이, ‘양산형 제작자’가 무거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은 ‘고갈(枯渴)’이었네.] 그가 선뜻 자신의 패를 공개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조금 놀랐다. 이어서 무대에서 춤을 추던 페르세포네도 말했다. [나는 ‘죽음’이었어요.] 고갈과 죽음. 모두 무언가의 ‘마지막’을 상징할 수 있는 단어들이었다. 늘 뭔가를 만들길 좋아하는 ‘양산형 제작자’나, 죽은 자들의 명계를 다스리는 ‘페르세포네’에게는 더없이 역설적인 끝이기도 했다. 저쪽에서 패를 꺼냈으니, 이제 나도 물러설 곳이 없었다. “다들 수식언을 걸고 맹세해주십시오. 여기서 제게 들은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내 말에 몇몇 성좌들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거야 당연히······.] [험, 뭘 그렇게 까지 하나? 우리가 어디 가서 그걸 말한다고······.] [얼마나 대단한 ■■이기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나는 즉답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웃었다. 그러자 성좌들 사이에서 고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설마······?] 성좌들의 머릿속에서 스치는 생각들이 눈에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성좌들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생각해라. 고민하고, 의심해라. 그래야 내가 원하는 그림에 도달할 테니까. 이윽고 성좌들의 술렁임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한수영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서울의 정경. 살아 남은 사람이 누구도 없는 거리를, 그녀는 홀로 걷는 중이었다. 머릿 속으로 온갖 망상들이 스쳐 갔다. 왜 내가 지금 여기에 있을까. 난 분명 염룡이랑 성좌들과 싸우고 있었는데. 아니, 그보다 ‘서울’은 폐쇄되었을 텐데, 어째서······. ―염룡아? ‘심연의 흑염룡’은 대답이 없었다. ―이봐, 누구 없어? 한수영은 무너진 잡거빌딩 사이를 거닐며 소리쳤다. 익숙한 광화문의 폐건물들 사이로 괴수들의 사체가 늘어져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들끓는 사체들을 지날 때마다, 한수영은 소름이 돋았다. 하나하나가, 지금의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괴물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데. 질문을 해봐도 대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설령 있더라도 대답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만약 이곳에 살아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놈은 저 괴수들을 피떡으로 만든 무시무시한 괴물일 테니까. 꿈이라면 제발 깨어나길 바랄 뿐······.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스쳐간 것은 그때였다. 하얀 백색 코트를 입은 익숙한 인형(人形).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독자! 사내가 이쪽을 돌아보는 순간. 피육을 꿰뚫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코트 사이로 불쑥 칼이 튀어나왔다. 붉은 빛으로 물드는 백색의 코트. 소리를 지르며, 한수영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악, 하악······.”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인 후에야, 현실 감각이 천천히 돌아왔다. “뭐야······.” 답지 않게 혼잣말까지 내뱉었다. 식은땀으로 등이 푹 젖어 있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당신의 혼잣말에 만족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이제야 당신이 진정한 자신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닥쳐.” 흑염룡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면, 확실히 현실은 맞는 것 같았다. 한수영은 한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왜 그 녀석이 꿈에 나온 걸까. 평소였다면 개꿈이라며 넘어갔을 한수영이었지만, 미신이 현실이 되는 세상이다 보니 이런 꿈 하나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관자놀이를 짚은 팔에 붕대가 감겨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바로 직후였다. “이런 빌어먹을. 아직도 안 풀었네.” “풀지 말아라. 다쳐서 감아둔 거니까.”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는 여인이 서 있었다. “······김독자 엄마?”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는 건 너뿐이구나.” 이수경은 수건으로 한수영의 등과 이마를 닦아 주었다. 한수영이 물었다. “왜 마계엔 안 갔어?” “내가 무슨 면목이 있다고 거길 가겠니.” “김독자가 좋아했을 텐데.” “네가 가는 걸 더 좋아했을 거다.” “······아줌마 자기 아들을 잘 모르네.” 한수영이 작게 입술을 비죽이며 말했다. 이수경은 옅게 웃더니, 젖은 베개피를 새 것으로 갈아 주었다. 새 베개피가 기분 좋은지 코를 박고 킁킁거리던 한수영이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 잘 해결된 것 같네.” “뭐가 말이니?” “김독자 대흉(大凶) 사건 말야.” 흑염룡이 신난 꼴을 보니, 마계 쪽도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한반도의 피해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경기 지역에 타격이 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시민들은 무사히 대피시켰고······. 뒤숭숭한 꿈을 꾼 게 좀 걸리긴 하지만, 어차피 꿈은 꿈일 뿐······. “전부 끝나진 않았어.” “······어?” 이수경은 말없이 접시 하나를 가져 오더니, 그 위에 [길흉화복]의 점괘를 띄우기 시작했다. 한수영은 잠자코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글자의 궤적을 읽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다시 점괘를 쳐주기를 부탁했다. 점괘는 같았다. 붕대로 둘둘 감긴 팔을 내려다보던 한수영이 말했다. “김독자한테 연락해줘.” * 연회가 끝난 밤. 나는 홀로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보통이라면 느긋한 마음으로 핫초코라도 한 잔 타서 ‘멸살법’을 읽기에 적합한 시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거대한 파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수르야와 내가 싸웠던 열차의 마지막 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당시의 기억을 재구성해보았다. 수르야의 열차는, 신화 속의 열차 보다 훨씬 짧았다. 그리고 열차의 마지막 칸은 뒤가 뻥 뚫려 있었다. 마치, 도중에 열차의 일부가 찢겨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즉, 그 칸은 ‘원래의 마지막 칸’이 아니었던 것이다. 눈을 뜨고, 다시 파편의 상흔을 살핀다. 척준경이나 스승들이 전력을 발해야 부술 수 있는 수르야의 열차를, 아예 통째로 뜯어낼 정도의 괴력. ······이건 역시 ‘그거’겠지. 똑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문틈 사이로 유상아가 나를 보고 있었다. “미안해요 독자 씨. 방해했나요?” “아닙니다. 제가 불렀는데요.” 나는 급히 테이블을 정리하며 유상아를 맞이했다. 유상아는 살짝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 편에 조심스레 앉았다. “······차라도 드릴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럼 물이라도······?” “좋아요.” 조그만 테이블을 마주한 채,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부른 것은 나였지만, 화제를 쉽사리 꺼내진 않았다. 유상아 역시 내게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까. “물어 보세요.” “사실, 꽤 오랫동안 독자 씨에 대해 생각했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한 어조였다. “어째서 남들이 모르는 미래를 알고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그처럼 침착할 수 있고, 항상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해답을 찾아내는 것일까.” “······그래서 뭔가 알아 내신 게 있습니까?” “어떤 것은 알 것도 같았고, 어떤 것은 감도 잡히지 않았어요.” 아마도 유상아는 나를 공부했을 것이다. 앱으로 틈틈이 스페인 어를 공부하듯이, 나라는 사람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누구보다 먼저 유의미한 결과에 도달했을 것이다. “독자 씨에게 이 세계는 ‘소설’ 같은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죠?” “오늘 연회에서 하신 말씀 때문에요.” ······과연 유상아다. 정말, 그렇게 밖에는 말할 도리가 없었다. ―저는 ‘종장(終章)’을 향해 가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란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종장.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겨서 도달해야 하는, 모든 페이지의 끝. 유상아가 말을 이었다. “성좌들이 크게 놀라더군요. 경악하는 이들도 있었고, 경탄하는 이들도 있었어요.” 성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의도로 던진 발언이었으니까. “독자 씨가 나가신 후에 명계의 여왕께 물어보았어요. 왜 그렇게들 놀란 것인지.” “뭐라고 하시던가요?” “독자 씨가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고 했어요.” 물로 입술을 축인 유상아가 계속해서 말했다. “■■는 모든 존재에게 ‘다른 형태’로 주어진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대부분은 지극히 개인적인 단어를 받는다고도 들었고요. 세상에는 무수한 ■■가 있지만, 개중에 명백한 ‘끝’을 암시하는 단어는 극히 드물다고 들었어요.” 누가 들어도 명백한 ‘끝’을 의미하는 것. 모든 존재에게 탁월한 범용성을 가지는 말. “그리고 그처럼 명백한 ‘끝’을 암시 받은 존재들은, 모두 위대한 성좌들 뿐이라고도 했어요. <올림포스>나 <베다>, 그리고 <파피루스> 같은······ 초거대 성운의 최상위 신격들.” “······.” “그리고 이제······ 독자 씨도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유상아는 복잡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떨리는 그녀의 눈빛은, 그녀 자신도 잘 가늠할 수 없는 듯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잘 된 일이죠.” “······잘 된 일이라고요?” “이제야 뭘 좀 해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나는 웃었다. 하지만 유상아는 웃지 않았다. “세계가 멸망한 후, 저는 독자 씨가 더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예전보다 자주 웃고, 더 활기차 보여서······ 그래서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말 꼬리를 흐린 유상아가 고개를 숙였다. “왜 독자 씨는 이 세계를 ‘허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유상아는 나를 모른다. 내게 ‘소설’이라는 것이 뭔지. 이 세계가, 내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지는 곳인지. 설명할 수도 없고, 아직은 설명해서도 안 된다. “저, 미안해요. 독자 씨. 제가 주제 넘은 말을······.” 그럼에도 내게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유상아 뿐이었다. 남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무언가를, 홀로 눈치채주는 사람. [전용 스킬,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합니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동료였다. 어쩌면 이 세계가 시작되기 전부터 그랬다. [해당 인물의 정보는 ‘등장인물 일람’으로 열람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떠오르는 메시지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해당 인물은 현재 정보를 수집 중입니다.] 언젠가 처음으로 유상아에게 ‘등장인물 일람’을 썼을 때, 나는 유상아의 정보를 읽을 수 없어 몹시 불안했었다. 그런데 왜인지, 이제는 그 반대였다. 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창밖을 내다 보았다. 청명한 하늘. 아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세계가 그곳에 있었다. “유상아 씨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준비할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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