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화

274화 수르야는 마지막 문 너머에 있었다. 유중혁의 주먹이 문짝을 때려 부수자, 휑한 바람과 함께 뻥 뚫린 천공의 정경이 보였다. 수르야가 있는 마지막 열차 칸은 뭔가에 뜯겨 나간 것처럼 뒷부분이 잘려 있었다. [예상보다 빨리 왔구나.] 등을 보인 채, 천공의 전경을 보던 수르야가 말했다. 잘린 열차 너머로 보이는 네모난 우주. 지고한 신의 빛이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광활한 해변에서 모래알을 헤집는 손바닥처럼. 나는 일부러 공손한 투로 입을 열었다. “수르야, 여기까지 하시죠.” 우주의 섭리에 닿지 못하는 신의 빛이 나를 돌아보았다. 수르야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스타 스트림>은 이해할 수 없어도, 네깟 것 하나 읽어내지 못할 리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모든 세계의 결말을 아는 사내라······ 실로 광오한 설화다.] 아마 수르야도 내 ‘거대 설화’의 문장을 들은 모양이었다. 내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수르야의 곁에 서 있던 오이디푸스 왕이 대꾸했다. [비유일 뿐입니다. 말장난이지요.]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설화 내용에 나에 대한 정보가 직접적으로 나와서 좀 껄끄러웠던 참이니까. [성좌, ‘양산형 제작자’가 당신의 문장에 궁금증을 가집니다.] [성좌, ‘술과 황홀경의 신’이 당신의 거대 설화를 궁금해합니다.] 고오오오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긴장하라고 말합니다.] [성좌, ‘해상전신’이 불끈 주먹을 쥡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나를 보는 수르야의 눈빛이 달라지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무슨 말을 해도 그를 멈출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야 덤벼 보거라. 네게 주어진 시간은 10분이다.] 츠츠츠츠츠츠츳! 수르야의 네 팔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격을 개방하는 수르야의 몸집이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그는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설화의 힘으로 나를 배제하겠다는 의도였다. [10분 뒤, 이 마차는 ‘마계’와 충돌할 것이다.] 더 지체할 필요도 없다는 듯, 유중혁이 먼저 달려들었다. 유중혁의 전신에서 파천검성을 연상시키는 검푸른 아우라가 피어올랐다. 경지에 이른 [파천검도]가 불온한 빛살을 뿌리며 개화했다. ‘거대 설화’의 영향을 받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유중혁 또한 이 설화에 지분이 있는 존재. 온전치 못한 몸으로도, 유중혁은 이제 성좌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콰가가가가각! 칼날과 장봉이 부딪치는 파찰음. 유중혁의 공격을 받아낸 것은 수르야가 아니었다. [크으으읏······!] 오이디푸스 왕이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유중혁에 맞서고 있었다. [그아아아아아앗!] 과열된 화신체로 전력을 쥐어 짜내고 있음에도, 오이디푸스는 유중혁을 상대하는 것이 힘겨워보였다. “김독자!” 유중혁의 외침과 함께, 나는 오이디푸스의 수세를 뚫고 수르야를 항해 도약했다. 열차의 허공에서, 몸집을 몇 배로 불린 수르야가 나를 맞이했다. [전용 스킬, ‘전인화 Lv.12(+2)’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인화의 빛살이 나를 휘감으며, 백청의 전격이 수르야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일전에 수르야는 한 손만으로 내 [전인화]를 막아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츠으으으읏! 백청의 전격에 닿은 수르야의 피부가 그을리고 있었다. 조금이지만 타격이 있었다. 놀란 수르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꽈아아아앙! 수르야의 주먹과 충돌한 내가 허공을 날았다. 심장이 진탕되는 듯한 충격이 있었지만, 버틸만 했다. [‘거대 설화’의 힘이 당신을 가호합니다.] 세계의 문장들이 내 주변을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저 강대한 설화급 성좌와 겨룰 수 있게 만드는 힘. 이것이 바로 ‘거대 설화’였다. 그러나 수르야는 여전히 건재했다. [······말했을 텐데. 훔쳐 배운 스킬로는 이길 수 없다고.] 어쩌면 수르야의 말대로였다. 나는 언제나 타인의 기술로 싸워왔으니까. “이건 훔쳐배운 게 아닙니다. 읽은 거죠.” [읽어?] 페르세포네의 말처럼, 존재란 곧 이야기다. 오랜 세월동안 하루도 빠짐 없이 읽었던 문장의 기억. 내가 읽고 보아왔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 [전용 스킬, ‘제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됩니다!] 고오오오오! ‘제4의 벽’ 위로, 거대 설화의 문장들이 떠올랐다. 「이것은 독자(讀者)의 설화.」 나는 수르야를 향해 달렸다. 달려가는 궤적 속에, 홀로 이야기를 읽던 무수한 시간들이 함께 흘러갔다. 평범한 삶이었다. 어두컴컴한 방에 틀어 박혀 홀로 ‘멸살법’을 읽던 시간들. 알바가 끝난 후 버스 안에서, 군대의 사지방에서, 공강 시간 강의실에서, 다시 퇴근길의 지하철에서······. 「동시에, 독자(獨子)의 설화.」 나는, 혼자 그 세계에서 살았다. 무수한 등장인물들에게 이입하며, 몇 번이고 다른 존재가 되었다. [고작 이런 설화로······.] 그러므로 나는 회귀를 해본 적 없는 회귀자였고. [전용 스킬, ‘바람의 길 Lv.11(+1)’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귀환을 겪은 적 없는 귀환자였으며. [3번 책갈피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전용 스킬, ‘야수왕의 감수성 Lv.10(+1)’이 발동 중입니다!] 어쩌면, 환생자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앙! 내 ‘격’과 부딪친 수르야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격과 격이 부딪칠 때마다 서로의 화신체가 망가지는 것이 느껴졌다. 수르야도 나도,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내 부딪치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무리다! ‘끝의 자격’을 얻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착각하는 듯 한데, ‘위대한 설화’만이 ‘끝’에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냐.” 아마 수르야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유중혁의 무수한 실패를 통해 배운 깨달음이었으니까. 쿠구구구구! 얼굴을 굳힌 수르야가 네 개의 팔에 강대한 힘을 집중시켰다. 아마도, 저것이 수르야의 마지막 공격이 될 것이다. 나는 물러서지 않고 [전인화]의 힘으로 그에 맞섰다. 모든 것을 녹이는 태양의 섬광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백청의 전격이, 그 섬광의 고열을 이기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서던 찰나, 거칠고 고독한 설화가 뒤쪽에서 나를 감싸왔다. 그것이 누구의 설화인지는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츠츠츠츠츳! 수르야와 나 사이에서 번쩍이는 스파크가 한층 더 거세어졌다. 천천히, 밀려나던 걸음이 멎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현성과 유상아. 거기에 정희원의 설화도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모두의 역사가, 내게 고스란히 깃들고 있었다. 「오랜 웅크림에서 깨어나, 멸악의 칼을 쥔 여인이 웃었다.」 이곳에는 없지만, 역사를 함께 공유한 이들도 있었다. 「어미를 잃고 곤충을 손에 쥔 소년이 울었고」 「돌아오지 않을 가족을 위해 성을 구축한 사내가 포효했다.」 이길영과 공필두. 「거짓으로 진실을 쌓아 올린 여인이, 기꺼이 그의 그림자가 되었다.」 거기에 한수영까지. 츠츠츠츠츳! [전용 특성, ‘시나리오의 해석자’가 발동합니다!] 내가 살아온 모든 궤적이, 이야기가 되어 길을 만들었다. 수르야의 화신체가 눈앞에 있었다. 충무공의 성흔으로도 읽을 수 없었던 수르야의 약점.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수르야의 어디를 찔러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전용 스킬, ‘독해력’이 발동합니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환하게 빛나며, 집약된 백청의 전격이 수르야의 가슴을 꿰뚫었다. 퍼거거거걱! 뭔가가 으깨지는 폭음과 함께, 모든 마력을 쏟아낸 나의 몸이 하늘을 날았다. 분수처럼 허공으로 쏟아지는 설화의 파편들 사이로, 무너지는 수르야의 거체가 보였다. [수르야! 지고한 빛의 신이여!] 오이디푸스의 고함과 함께, 정경이 무너지고 있었다. 대기권과 부딪친 운석이 산화하듯 수르야의 열차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나는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김독자!” 바람처럼 날아온 유중혁이 나를 붙잡았고, 떨어지는 일행들을 키메라 드래곤이 태웠다. 그야말로 간발의 차였다. 부스러진 마지막 칸의 파편 몇 개가 긴 꼬리를 남기며 지상으로 향했다. 쿠우우웅! 직격한 파편이 폭음을 남기며 울었다. 다행히 [공단]에 타격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키메라 드래곤의 머리통에서, 신유승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아이의 표정에서 완연히 드러나는 기쁨. 다음 순간, 뿌연 지상의 먼지 사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아직이다!]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쓰러진 성좌들의 곁에서, 그는 비참한 몰골로 우리를 향해 외쳤다. [구원의 마왕! 아직 ‘거대 설화’ 계승이 끝나지 않은 것을 안다! 지금이라도 우리에게 설화를 내놓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물러가겠다.] 이미 승부는 끝났음에도, 녀석은 포기하지 않았다. 날 대신해서 대답한 것은 유중혁이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지상에 착지한 유중혁은 나를 바닥에 내려둔 뒤, [흑천마도]를 꺼내며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오이디푸스 왕이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소중한 세계가 사라질 것이다.] “또 운명 타령이라도 할 셈인가? 너희가 마계에 투자할 개연성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마계가 아니라면?]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거대한 패널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른 행성이 있었다. 유중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성좌의 자존심 따윈 다 팔아치운 모양이군. 마지막 발악인가?” 이 시점에서는 <올림포스>가 가진 개연성 전체를 다 쏟아부어도, 지구를 멸망시킬 수 없다. 유중혁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전혀 당황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자 오이디푸스 왕이 웃었다. [지구를 날리는 건 무리지.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떨까?]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패널의 화면이 바뀌었다. 순간 화면에 떠오른 정경에, 유중혁과 일행들의 표정이 굳었다. 화마(火魔)에 휩싸인 한반도가 그곳에 있었다. *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마계나 갈 걸 그랬나.” 붉고 푸른 불길로 타오르는 경기도를 바라보며, 한수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한수영이 마계를 가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신은 현재 마왕 ‘안드라스’의 저주에 걸려 있습니다.] 한수영은 일전에 김독자의 계략에 걸려, 마왕의 저주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섣불리 그 지역에 방문했다간 그대로 마왕의 한끼 식사가 되는 수가 있었다. 곁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이길영이 외쳤다. “지금쯤이면 다들 독자형이랑 같이 있겠죠? 좋겠다 신유승······.” “그렇겠지. 근데 거기가 여기보다 더 힘들걸.” 화마 속에서 다가오는 재앙의 기척을 느끼며, 한수영은 침을 삼켰다. 독자 일행들이 하나둘 마계로 ‘개인 시나리오’를 받아 떠난 뒤, 한반도에는 ‘재앙 시나리오’가 들이닥쳤다. [재앙 시나리오의 제한 시간이 30분 남았습니다.] 문제는, 이번에 들이닥친 ‘재앙’이 성좌들이라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올림포스.” 도깨비 관리국과 어떤 뒷거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재앙 시나리오’의 ‘재앙’으로 온 것은 <올림포스>의 성좌들이었다. 난이도가 난이도인 까닭에, 30분만 버티면 시나리오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 30분 안에 한반도가 이 지구에서 없어질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긴 했지만. “······이제 어쩔거냐?” 두툼한 입술로 담배 연기를 뿜어낸 공필두가 물었다. 그나마 경기 지역이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은 숙련도가 급상승한 공필두의 [무장 성채] 덕분이었다. 한수영이 답했다. “조금만 더 버텨 봐. 방법은 있으니까.” “상대는 성좌들의 화신체다. 숫자만 다섯이 넘어. 뭘 어떻게 이기겠다는 거냐? 이건 김독자 그놈이 오더라도 안 돼.”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전부 위인급의 성좌들. 아마 <올림포스> 고대의 영웅이거나, 하급 신격에 준하는 존재들일 것이다. [이 작은 땅에는 배포 또한 작은 놈들 뿐인 모양이구나!] 쩌렁쩌렁 울리는 격만으로도, 머릿속이 지끈지끈 아파왔다. 한수영은 침착하게 품속에서 몇 개의 새카만 돌을 꺼냈다. [심연옥]. 그것은 헤어지기 전 김독자가 모아 놓으라고 말한 아이템이었다. 이 아이템이 있었기에, 부족한 개연성으로도 일행들을 마계로 보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세 알을 사용했으니, 남은 것은 여섯 알. 숫자가 좀 모자라긴 했지만, 어차피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이거······ 벌레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거 아닌가 몰라.” 이길영의 벌레들이 성채를 보호하고, 공필두의 성채에서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한수영은 심연옥을 제물로 강림 의식을 시작했다. 딱 한순간만, 이 비틀어진 저울의 평형을 맞출 수 있는 존재를 부를 수 있다면. 츠츠츠츠츳! 스파크가 튀며, 심연옥이 하나 둘 개연성의 제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무려 여섯 알의 심연옥을 사용해야만 그 힘의 일부를 불러올 수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 쿠구구구구구! 경기도의 하늘이 새카맣게 물들며 우레가 쏟아졌다. 어마어마한 격이 한수영의 등 뒤로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수영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염룡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습니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