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271화
하늘에서 몰아치는 성좌들의 입장음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에게 호의를 품은 성좌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두, 한 번씩은 내 편을 들어 주었던 성좌들이었다.
[성좌, ‘서애일필’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조선제일술사’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개중에는 지구의 성좌들도 있었고.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던 척준경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반가운 존재는 따로 있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은밀한 모략가.
나는 녀석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녀석이 호의를 갖고 내 시나리오를 꿋꿋이 지켜봐 주었다는 것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양손을 조심스레 모읍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쥡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툴툴대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이걸로 나와 함께했던 네 명의 초기 성좌들이 모두 모였다.
[‘73번째 마계’에 당신의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충만하게 쏟아지는 시선 속에, 나는 모든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수르야가 말했다.
[아이야, 너의 기대는 잘 알겠지만 그들은 너를 돕지 않을 것이다. 성좌들은 영리해서 너희 인간들처럼 미련한 선택은 하지 않으니까.]
나는 간신히 서 있는게 고작인 동료들의 모습을 보았다.
동료들은 쓰러진 유중혁을 중심으로 방진을 치고 있었다.
수르야가 웃었다.
[그들 중 누구도, 성운의 적의를 사고 싶어하진 않을 테니······.]
쿠구구구구!
말하기가 무섭게, 수르야와 나 사이에 지진이 일어났다.
땅은 순식간에 습기를 머금더니, 이내 눅눅하고 끈적한 늪으로 변했다.
츠츠츠츠츳!
한 걸음이라도 내딛으면 빨려들 것 같은 늪 속에서, 누군가가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게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 차렸다.
[성좌,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마계에 현현합니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
나와 ‘미식협’에서 다툰 적이 있는 성좌였다.
나한테 당해 빚더미에 앉았던, 그래서 집행부에 끌려 갔던 녀석.
그오오오오오!
삼십 미터를 훌쩍 넘는 체고의 도마뱀.
늪에서 깨어난 태고의 도마뱀이 전율적인 포효를 터뜨렸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를 알아본 파천신군이 내 곁으로 붙어서며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이번에 녀석은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빚을 갚으러 오신 겁니까?”
언젠가, ‘양산형 제작자’는 내게 조언했었다.
적을 너무 많이 만들지 말라고.
[······그깟 몇 푼쯤은 네가 도와주지 않았어도 갚을 수 있었다!]
홱 고개를 돌린 도마뱀의 거대한 아가리가, 성좌들을 향해 위협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나는 저 녀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온 것뿐이다!]
짧은 말을 마친 거대 도마뱀이 성좌들을 향해 돌진했다. 굉음을 내며 달려든 괴물에 성좌들이 소리를 지르며 물러났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저래봬도 설화급 성좌.
적이었을 때는 그토록 무서웠던 존재가, 같은 편이 되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 분노한 수르야가 일갈을 내질렀다.
[미식협의 졸개여······ 성운이 두렵지 않은 것인가?]
[성운? 하하하핫! ‘미식협’이 언제 그런 것 따윌 신경 썼던가!]
미식협의 성좌들 중 상당수는 <스타 스트림>의 이단아들이다.
소속된 <성운>이 있든 없든, 그런 것 따윈 아랑곳 않고 자신의 의지를 실천하는 존재들.
소속 <성운>이 없는 ‘성급한 늪의 포식자’는 그런 미식협의 성좌들 중에서도 유독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그아아아앗!]
거대한 도마뱀이 꼬리를 휘두르자 지표면이 갈라지며 거대한 파편들이 날아올랐다. ‘우레를 먹는 새’와 ‘나일강의 괴조’가 그에 맞서 달려들었다. 거대 괴수들이 육탄전을 시작하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하늘로 떠오른 수르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쓰레기 하나가 끼었다고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콰아아아아아!
수르야의 빛살이 나를 향해 쇄도했다.
[전인화]에 [바람의 길] 까지 사용했음에도 피하기 쉽지 않은 속도였다.
지고한 <로카팔라>의 격에 내가 맞설 수 있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츠으으으읏!
살갗이 찢기며 뼈가 드러났다. 통증이 엄습하는 와중에도,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벌기 위해 애썼다.
내 신경은 허공의 시스템 메시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곧 2차전의 승자가 발표됩니다.]
어차피 게임의 승자는 이쪽. 아무리 강력한 존재가 시나리오를 지연시키더라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즉, 시간만 벌면 이 승부는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다.
[아이야,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아까보다 훨씬 많은 양의 개연성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이 시나리오에 허락되어 있던 개연성이 아니었다. <베다>에서 제공하는 개연성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츠츠츠츠츳!
하늘의 천칭이 뒤바뀌듯,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고 있었다.
[<베다>의 뜻이 이곳에 임하리라.]
수르야의 뒤쪽으로 환한 태양이 강림하고 있었다. 온 몸이 녹아버릴 것처럼 땀이 흘러내렸다. 하나, 둘, 셋, 넷······ 하나하나가 지상을 불태워 버리기에 족한 광원(光源)들. 쳐다보는 것만으로 눈이 멀어버릴 듯한 ‘격’에 나는 차마 수르야를 바라보지 못하고 이글거리는 놈의 그림자에 집중했다.
[설화, ‘열두 태양의 왕’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베다>의 수르야.
그는 열두 명의 태양신을 통합한 왕이었다.
[이제 격의 차이를 알겠느냐?]
탈진한 일행들이 곳곳에서 쓰러진 채 신음을 흘렸다.
“아으, 으으으······.”
그아아아아!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고통스러운 듯 몸부림을 쳤고, 전투를 치르던 다른 성좌들도 수르야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 보고 있었다.
수르야는 지금도 강력하지만, <베다>의 ‘멸망 시나리오’가 끝나면 더욱 강력해지는 성좌였다. 훗날 태양신 사비트리와 비바스바트의 힘을 모두 흡수한 수르야는, ‘멸살법’ 265회차의 지구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괴물이 된다.
하지만 적이 아무리 강해도 발악은 해봐야 했다.
[성흔, ‘칼의 노래 Lv.3’을 발동합니다!]
[충무공이 남긴 소절이 당신의 검에 무작위로 깃듭니다.]
「야밤에 신인(神人)께서 꿈에 나타나 말씀하시길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저렇게 하면 패할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언젠가 ‘레서 드래곤’을 상대할 때 들은 적이 있는 구절이었다.
[위인급 성좌의 성흔인가. 하찮은 재주를 쓰는구나.]
스킬의 효과 덕분인지 나는 선글라스를 낀 것처럼 광원을 정면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구절은 적의 약점을 색깔로 알려주는 효과가 있다. 초록색은 강한 부분이고 붉은색은 약한 부분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수르야를 노려보았다.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
등에서 식은 땀이 흘렀다.
[그래, 무엇을 보았느냐?]
고요히 웃는 수르야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훔친 성흔으로 날뛰어 봤자다. 성좌위에 올랐다고 해도, 너는 태생이 인간인 존재.]
수르야의 전신은 모두 초록빛.
어디에도 약점 따윈 보이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로는 신을 넘을 수 없다. 이 <스타 스트림> 어디에도, 그런 존재는 없었으니까.]
수르야는 나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다.
‘성급한 늪의 포식자’가 돕는다 해도 무리다.
나는 찢어진 코트를 던지며 말했다.
“······개연성의 저울이 기울었어. 그건 우리도 추를 더 올려 놓을 수 있다는 뜻이야.”
[누가 온다한들 저울은 평형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다.
나는 신도 영웅도 아니니까.
<스타 스트림> 전체를 뒤지면 내 이야기 정도는 흔한 것일 지도 모른다.
[밤하늘의 성좌들이 결단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이 세계의 누군가는, 그런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건 달아봐야 알겠지! 오십시오, 고려제일검!”
츠츠츠츠츠츳!
폭발적인 스파크와 함께, 먹구름을 꿰뚫고 한 줄기 유성이 떨어졌다.
[성좌, ‘고려제일검’이 당신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화려한 검식이 하늘을 찢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던 삼검식이었다.
[누가 나 척준경을 불렀는가!]
벼락처럼 내리꽂힌 검이, 수르야의 태양 하나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폭발과 함께, 수르야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하찮은 위인급 따위가······!]
뜨거운 섬광이 지상을 향해 쏟아지는 순간, 뭔가가 지반을 쿵 내리찍으며 나와 동료들을 뒤쪽으로 날려 보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한 사내의 품속에 있었다. 크기로만 치면 파천검성 못지 않은 거한.
[간만이구나, 후인이여.]
웅장한 격을 뿜어대는 고려제일검의 본신이 눈앞에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르신. ······격이 변하셨군요.”
분명 위인급 성좌였던 척준경은, 이제 완연한 설화급의 격을 내뿜고 있었다.
[그대 덕분이지. 여러 일들이 있었다.]
예상은 했다. 그때 척준경은 ‘이계의 신격’과의 싸움에 동참했었다. 분명 나 못지 않게 강력한 설화를 얻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한 단계 높은 격으로 상승할 수 있었겠지.
[마침내 그대에게 빚을 갚을 수 있겠구나.]
척준경이 눈치를 주듯 하늘을 올려다보자, 성좌들의 간접 메시지들이 이어졌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분하다는 듯 침음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우울한 눈빛을 합니다.]
아마 이곳에 오고 싶었던 것은 다른 성좌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개연성의 제약도 있고, 성운들의 눈치도 있으니 움직이지 못했겠지.
특히 우리엘은 <에덴> 소속이니 문제가 더욱 복잡할 것이다.
잘못하면 ‘성마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니······.
우리엘한텐 지금까지도 충분히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섭섭하진 않았다.
“옵니다.”
콰아아아아아아!
수르야가 쏘아 보낸 빛살들이 파도를 이루어 덮쳐왔다.
[······인도 쪽 신격들이 장난이 아니라는 건 알고있었지만, 과연 괴물이구나.]
척준경은 나를 보호하며 밀려드는 빛살들을 베어갔다.
하지만 척준경의 칼날도 조금씩 녹거나 부식되고 있었다.
[태산도 바다도 갈라 보았지만, 태양을 베어본 적은 아직 없다. 저런 괴물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예’를 데려왔을 것을.]
‘예’라면 아마 중국 신화의 ‘태양 사냥꾼’ 예를 말하는 것이겠지.
척준경이 그쪽과도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는 어차피 <황제> 소속의 성좌니, 수르야를 상대하려 하진 않을 것이다.
[그대는 내가 상대하겠다!]
‘인류의 시조’가 척준경을 향해 달려들었다. 희대의 무장들이 격전을 벌이자 주변은 순식간에 검강의 잔흔으로 폐허가 되어갔다.
[‘73번째 마계’의 문장이 당신의 설화를 기웃거립니다.]
내 품속에서 흘러나온 뭔가가 두둥실 하늘 위로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그것은 내가 지난 게임에서 얻었던 ‘문장’들이었다.
수르야가 벽력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뭣들 하고 있는 건가! 시간이 없다! 빨리 놈들을 죽여!]
이 문장들은 ‘거대 설화’를 이루는 재료들.
마침내 이 세계의 ‘거대 설화’가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왕, ‘불화의 조성자’가 당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방관하며 소극적인 움직임만을 보이던 마왕들이, 마침내 움직였다.
‘불화의 조성자’가 날려 보낸 가벼운 열풍에, 나는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허공을 날았다.
우군이 두 명이나 왔는데도, 전황은 터무니없이 불리했다.
츠츠츠츠츠츳!
마왕들이 힘을 개방하자 개연성의 저울이 다시 한 번 삐걱거렸다.
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누가 저 강력한 마왕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떠올려도 당장 도움을 청할 만한 성좌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가오던 마왕들이 일순 주춤한 것은 그때였다.
“전군 발포하라!”
투콰아아앙!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포 소리와 함께, 익숙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나야!”
[성좌, ‘해상전신’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늦어서 미안해!”
멀리 떨어진 공단의 해자(垓字) 쪽에서, 이지혜의 유령함대가 이쪽을 향해 발포하고 있었다.
분노한 마왕들의 간접 메시지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이지혜를 향해, 두 명의 마왕이 몸을 돌리고 있었다.
“지혜야!”
도와주러 온 것은 좋지만, 이지혜 하나만으로는 무리였다.
상대는 마왕 둘.
저런 무모한 짓을 하면, 순식간에 살해당할 뿐이다.
“도망쳐!”
발을 끌며 걸음을 재촉했지만, 먼젓번에 당한 상처 때문에 운신이 쉽지가 않았다. 마왕들은 포화를 맞아가며 어느새 이지혜의 근방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바람의 길]을 사용하지 않으면.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때였다.
“독자 씨, 또 혼자 하려고 하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수르야의 빛을 너무 오래 쐰 탓일까. 스쳐가는 여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동전 던지기 져서 늦게온 거니까, 너무 섭섭해하진 마요.”
여인은 마왕들을 향해 걸어갔다.
“잠깐만요! 희원 씨!”
정희원은 강하다.
아마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하며, 더욱 강해졌겠지.
하지만 마왕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무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하더라도 마왕을 상대로는······.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걱정마요.”
착각일까.
그녀의 등 뒤로 천사의 날개 같은 것이 겹쳐 보였다.
“싸우는 건 내가 아니니까.”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격’이 눈앞에서 발현하고 있었다. 이지혜를 향해 돌진하던 마왕들이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츠츠츠츠츠츠츠츠츠츳!
정희원에게 강림한 성좌의 힘이 마계 전역을 뒤덮으며, 한순간 세계가 은빛으로 물들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73번째 마계’에 현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