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272화 Episode 51. 거대 설화 대천사 우리엘이 73번째 마계에 등장했다. 원작에서도 후반부로 가면 우리엘이 화신체에 직접 강림하는 경우는 왕왕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겨우 25번째 시나리오였다. 당황한 마왕들과 성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고요히 눈을 감은 정희원의 뒤쪽으로, 우리엘의 투명한 형상이 비치는 것 같았다. 화려한 아우라와 함께, 우리엘의 긴 금발이 허공에 물결쳤다. 츠츠츠츠츠츳! 개연성의 저울이 다시 기울고 있었다. 완전히 균형이 무너졌던 저울이, 우리엘 하나의 출현으로 서서히 평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이젠 오히려 이쪽이 더 무거워진 것 같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저게 우리엘의 전력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쿠구구구구구! 전장의 모든 싸움이 중단되었다. 수르야가 긴장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고, 난투극을 벌이던 성좌들도 격전을 멈추었다. 대천사의 강림은 성좌들에게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올빼미 얼굴에 불타는 검을 쥔 마왕이었다. [대천사!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난 것이냐!] 나는 녀석을 알고 있었다. ‘불화의 조성자’. 63번째 마계의 마왕인 ‘안드라스’. 놈은 언젠가 자신의 권속을 죽인 한수영에게 저주를 내린 적도 있었다. 이어서 곁에 있던 다른 마왕도 입을 열었다. [시, 시, 시체가 되고 싶은 모양이군, 대천사.] 녹색 갑주에 왕관을 쓴 해골. ‘시체를 철학하는 군주’. 54번째 마계의 마왕인 ‘무르무르’였다. 비록 하위권의 마왕들이라곤 해도, 둘 모두 나와는 차원이 다른 강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강자들의 표정에서, 낯선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강림을 마친 우리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섬연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세상을 오시하자, 세계의 색깔이 변하는 느낌이었다.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나조차, 심장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73번째 마계’를 바라봅니다.] 대천사의 시선은 ‘멸망’을 암시한다. 세계의 정화를 위해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산 것들을 바라보는 응시의 눈빛. 그녀의 시선에 ‘73번째 마계’가 떨고 있었다. [■■들아. 오랜만이다?] 두 명의 마왕이 서너 걸음을 물러났다. 정희원의 한쪽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너······ 내가 전에 그 칼 들고 다니지 말라고 했지? 나랑 캐릭터 겹치니까 짜증난다고.] 그 말에, 마왕 안드라스가 불타는 검을 스르륵 내렸다. 안드라스의 올빼미 눈이 빠르게 깜빡였고, 무르무르의 해골턱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나온 것은 무르무르였다. [어리석은 대천사여! 지금 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아니면······ 설마 에, 에덴이 ‘선발전’에 개입하기로 한······.] [■까. 내 멋대로 온 거니까.] 나는 새삼 우리엘의 설정을 떠올렸다. 그동안 우리엘이 내게 살갑게 굴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에덴>의 가장 무시무시한 대천사 중 하나였다.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 그 어떤 대천사보다도 잔혹한 전투광이며, 가장 많은 악마를 학살한 대천사. 그녀가 허공으로 손을 치켜들자, 그녀의 손에 흰색의 불꽃으로 일렁이는 검이 나타났다. 그녀의 검 앞에, 주변의 모든 불길이 경의를 표하듯 꺼졌다. [지옥염화]의 가장 지고한 불꽃을 담은 검. 우리엘의 성유물인 [업화의 불꽃]이었다. 그녀가 검까지 빼들자 마왕들은 다급한 표정이 되었다. [협정을 잊은 건가?] [■먹어. ■같은 ■■들아.] [뭐, 뭣.] [아, ■발, ■같은 필터링이······.] <에덴>의 대천사들은 품격 유지를 위해 성운 측에서 자체 필터링을 걸어 놓는다는 설정이 떠올랐다. 그런 우리엘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 것은 그때였다. [김독자?] 내가 너무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우리엘이 어색하게 웃으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안녕?] 종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창피한 듯 어색한 인사였다. [다수의 성좌들이 할 말을 잃습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뻘짓 말라며 손가락질을 합니다.] 방금 전까지 어마어마한 위협을 당하던 마왕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제정신을 차리고 꾸벅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우리엘.” [응!] 우리엘이 방긋 웃었다. [당신은 대천사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새로운 설화를 획득하였습니다!] [설화, ‘대천사의 사랑을 받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내가 무서워할까 심려했던 것인지, 배려심이 가득 담긴 간접 메시지의 폭탄이 쏟아졌다. 솔직히, 나는 조금 감동받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게 호의를 표한 성좌들은 꽤 있었다. 하지만 우리엘만큼 열심히 나를 도와준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늘 받기만 했을 뿐. 그럼에도 우리엘은, 나를 위해 오늘 이곳에 와주었다. 정희원의 양 팔을 걷어부친 우리엘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걱정 마 김독자! 내가 다 죽여줄게!] 저것이 퍼포먼스라는 것은 알고 있다. 이곳은 마계. 정말로 대천사가 여기서 힘을 발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불을 보듯 빤했다. 그렇지만, 우리엘이 저렇게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엘?” 콰아아아아아! “잠깐만요! 우리엘!” 우리엘의 검극에서 솟아난 염화가 끊임없이 뻗어 나가며 하늘에 도달하고 있었다. 저것이 바로 진정한 [지옥염화]. 일격으로 하나의 세계를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우리엘의 진짜 힘이었다. [대, 대천사가 미쳤다! 도망쳐!] [미친년이다!] 기겁한 성좌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우리엘이 진짜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다. 급기야 어딘가에 숨어있던 독각까지 나타났다. [자, 잠깐만요. 대천사님. 진정 좀 하시고······!] 그 간사한 모습에 열불이 났다. 승자 발표까지 지연시키면서 시나리오 내팽개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엘이 말했다. [■까.] [예, 예?] [시나리오 ■까! 도깨비 ■까! ■발, ■같은놈들아.] 우리엘은 정말로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녀의 분노에 마계의 하늘이 울부짖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구! 대천사의 검이 지상을 내리 찍으려는 그 순간.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분노를 토합니다.] 하늘에서 검은 마력이 격렬하게 몰아쳤다. [마왕,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대천사를 응시합니다.] [마왕, ‘강령의 마신’이 자신의 격을 드높입니다.] [마왕, ‘검은 갈기의 사자’가 에덴을 향해 일갈을 터뜨립니다.] 수식언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최고위격의 마왕들이, 하나둘 이쪽 채널에 등장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칫하면 여기서 성마대전이 일어나게 생겼다. 그런데 나타난 것은 마왕들만이 아니었다.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물병자리에 핀 백합’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성좌, ‘붉은 코스모스의 지휘관’이 채널에 입장했습니다.] 등장한 것만으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최상위격의 성좌들. <에덴>의 주요 성좌들이 채널에 입장하자, 채널의 부피가 급격하게 커졌다. 품속의 비유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떨었다.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지엄한 눈으로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를 바라봅니다.] 우리엘의 검이 움찔 떨렸다. 마치, 시간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모든 마왕과 대천사들이 우리엘의 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검의 향방에, 마계와 에덴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마계의 마왕들과 에덴의 대천사들이 긴급 회동을 열었습니다.] 츠츠츠츠츳! [현 시간부로 해당 시나리오의 마왕과 대천사들이 모두 긴급 소집됩니다.] 거대한 개연성이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우리엘의 검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정희원의 몸이 흔들리며, 대천사의 기척이 마계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우리엘이 옅은 미소로 나를 보며 말했다. [끝까지 도와주고 싶었는데.] 뒤늦게야, 나는 우리엘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이런! 이럴 수는 없다!] 사라지는 것은 우리엘만이 아니었다. 미리 강림해 있던 마왕들 또한, 개연성의 스파크 속에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엘은, 자신을 희생해 이곳의 모든 마왕의 손발을 묶은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로군.] 감탄했다는 듯, 척준경이 중얼거렸다. [저 지엄한 대천사가 그대를 위해 이토록 큰 희생을 할 줄이야······.] 우리엘이 감당하게 될 징벌에 대해서는 나도 예상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성마대전의 협약을 위반한 대천사. 그녀는 아마 <에덴>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제재를 당하게 될 것이다. [꼭 이겨, 김독자.] 사라지는 우리엘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녀의 모습은 잿빛 속에 흩어진 뒤였다. 나는 쓰러지는 정희원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우리엘의 격을 그대로 감당한 정희원은 몹시 고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격의 풍압에 고개를 들자, 그곳엔 이 모든 사태를 지켜보던 수르야가 있었다. [내 판단이 틀렸군. 설마 대천사를 불러낼 정도의 성좌였을 줄은 몰랐다.] 우리엘 덕분에, 마왕들의 참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나빠진 것도 있었다. 줄곧 나를 은근히 깔보던 수르야의 눈빛은, 이제 더 없이 진지한 빛을 띠고 있었다. 수르야의 좌우를 지키는 오이디푸스 왕과 마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부터 진심으로 임하겠다.] 수르야의 신형이 쏜살같이 창공을 뚫고 솟아 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변한다 싶더니, 일대를 중심으로 엄청난 풍압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쿠과과과과과과! “이, 이게 무슨 소리야?” 떨어져 있던 일행들이 하나둘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지칠 대로 지친 장하영이었다.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저건 또 뭔데?” 찬란한 태양의 너머로, 먼 우주를 뚫고 뭔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대기를 모조리 찢어 발기는 파공음. 마치, 운석이 충돌할 때나 들을 수 있을 듯한 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것은 거대한 마차였다. 무지막지한 크기의 황금빛 암말이 가속을 거듭할 때마다, 마계 전체가 터질 것처럼 뒤흔들렸다. “······마차?” 저런 것을 마차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기관차라고 해야 할까. 어떤 단어도 어울리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크기의 물체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의 재앙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유상아가 입을 열었다. “수르야의 마차. 전설에 따르면 13만 킬로가 넘는 길이의······.” “13만? 그게 말이 돼요?” 장하영이 묻자, 유상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신화겠죠.” 거대한 거북이와 코끼리가 지구를 떠받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게 저 인도 신화의 신격들이다. 그러니 저런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기관차가 나타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구! 문제는 저 재앙을 우리가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대 설화, ‘베다(Vedas)’의 일부를 목도하였습니다.] [당신의 설화 이해력이 상승합니다.] ······수르야가 말한 ‘진심’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었나. 나는 전신의 솜털을 오싹하게 만드는 ‘격’에 감탄했다. 저것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으로, 나는 압도적인 절망감을 느꼈다. 고작 ‘일부’를 목도했음에도, 보통의 ‘설화’와는 차원이 다른 힘. 저것이 바로, 내가 [거대 설화]를 손에 넣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제길, 달아나라!] 창공을 뚫고 돌진해오는 마차의 위용에, 벌써 몇몇 성좌들은 꽁무니를 감추고 없었다. 성좌든 뭐든, 저것을 맞고 무사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척준경이 침음하며 말했다. [일이 정말 곤란하게 됐군. 저놈은 이 세계를 멸망시킬 생각인 것 같다.] “······겁먹으신 겁니까?” [아니, 재밌겠군.] 척준경은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내가 일행들을 향해 뭐라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곁에 우뚝 섰다. 그는 척준경도, 성좌도 아니었다. “······깼냐?” 돌아보자, 그곳에는 [흑천마도]를 짚고 일어선 유중혁이 있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기사회생 Lv.10’을 발동합니다!] 유중혁의 몸이 마침내 ‘기사회생’을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것이다. 유중혁의 마지막 모든 생명력이, 새카만 검극 위에서 환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직 입과 성대는 회복이 더딘 모양인지, 유중혁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전지적 독자 시점’을 통해 유중혁의 생각이 들려왔다. 「김독자.」 “그래.” 아마도, 이것이 마계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다. [‘73번째 마계’가 당신의 선택에 주목합니다.] 이번만큼은, 나 또한 무엇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이곳의 누군가가 죽을 수도 있었고. 어쩌면, 나나 유중혁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말했다. “갑시다.” 유상아와 이현성이 고개를 끄덕였고, 키메라 드래곤에 올라탄 신유승이 내 곁에 섰다. 해자 쪽에서 하늘을 보던 이지혜도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우리를 도울 성좌는 없었다. 이제 이곳엔 오직 인간뿐이었다. 하지만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충분히 끌었으니까. 모두 우리엘 덕분이다. [‘73번째 마계’의 의지가 당신의 선택에 반응합니다.] 어쩌면, 수르야가 진심을 발휘한 것은 실수였다. 다가오는 재앙 앞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닐 것이다. 멸망 시나리오를 앞둔 <제1 무림>이 그랬듯, 이 <73번째 마계> 또한 선택의 시간을 맞이했다. [‘73번째 마계’의 ‘거대 설화’가 발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파괴하려는 존재를 주인으로 삼으려는 세계는 아무도 없다. [‘73번째 마계’가 자신의 주인을 택했습니다.] 당황한 도깨비와 성좌들이 메시지를 터뜨렸다. 그러나 나는 그들 중 어떤 이의 목소리도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이야기를 듣는 쪽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으니까. [당신의 ‘거대 설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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