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265화 유중혁이 불러온 ‘지원군’은 총 셋이었다. 비스트마스터 신유승과, 강철검제 이현성. 그리고······. “현성 씨! 독자 씨 데리고 빠지세요!” 허공에서 쏘아진 [아리아드네의 거미줄]이 나를 이현성의 커다란 등짝에 붙여 놓았다. [헤르메스의 산책법]으로 창공을 달리는 고양이 수트의 여인. 올림포스의 화신, 유상아였다. “유승이는 먼 거리에서 브레스로 딜 넣어! 현성 씨 빠질 때까지 계속!” 쿠오오오오오! [키메라 드래곤]이 포효하며 브레스를 내뿜자, 묵시록의 이무기도 꽤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비명을 질러댔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화신에게 커다란 개연성을 할애합니다.] [성좌, ‘버려진 미로의 연인’이 자신의 화신을 지원합니다.] [성좌, ‘하늘 걸음의 주인’이 자신의 화신을 응원합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현성과 유상아를 후원하는 성좌들 또한 꽤나 분투하는 듯했다. 유상아의 능수능란한 지휘와 함께, 나는 이현성의 어깨에 들려 강제로 이송되었다. “······이현성 씨.” “가만히 계십시오 독자 씨.” “이렇게까지 하진 않으셔도 되는데요. 저도 이제 움직일 수 있어요.” 내 말에도 이현성은 단단한 팔을 풀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오직 협곡을 묵묵히 오르는 것뿐. 슬슬 협곡의 정상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이현성이 입을 열었다. “독자 씨, 수류탄 던져보신 적 있으십니까?” “······수류탄이요?” “수류탄을 사용하려면 총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안전 클립 제거, 안전핀 제거, 투척.” “저도 훈련소에서 던져 봐서 알아요.” “그러면 수류탄의 안전핀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아시겠군요.” 순간 나는 이현성이 무슨 말을 할지 깨달았다. “저는 안전핀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탄피 아니었습니까?”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현성이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안전핀은 채워 둘 수 있을 때, 잘 채워 둬야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협곡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아래쪽에서 유상아와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을 타고 협곡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환히 웃는 신유승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벅차 올랐다. “현성 씨.” “······예.” 결국, 이현성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왔기에,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말들이 있는 것이다. “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곁에서 코를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모른 척 해주었다. 잠시 후, 도토리처럼 도르르 굴러온 뭔가가 내 다리에 폭 부딪쳤다. “아저씨!” 내 너덜너덜한 다리가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꼭 끌어안는 모습. “오랜만이다, 유승아.” 외투에 얼굴을 묻은 신유승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신유승의 등을 작게 토닥여주는데, 멀리서 유상아가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독자 씨.” “예.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냐니,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시나리오가 시작된 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여전하시네요, 독자 씨.” 유상아가 가식 없는 얼굴로 웃었다. 멸망 전에도 멸망 이후에도, 내 농담에 웃어주는 사람은 유상아뿐이다. “다른 일행들은······.” “일단은 우리만 왔어요. 희원 씨랑 다른 애들도 많이 오고 싶어 했는데······.” “제가 이길영이랑 동전 던지기 해서 이겼거든요!” 신유승이 헤헤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렇군. 다들 동전을 던져서 내 목숨을 결정했다 이거지. 나는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유상아 씨.” “안 그래도 가야겠다 싶던 참이었어요. 독자씨 길흉화복에 안 좋은 점괘가 떴었거든요.” “길흉화복?” 길흉화복이라면 나도 알고 있는 성흔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그 성흔을 가지고 있는 성좌는 하나뿐이다. “네, 대흉(大凶)이 떠서 저랑 수영 씨랑 누가 가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유중혁 씨가 연락을······.”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설마 한수영과 유상아가 동전 던지기를 한 것은 아닐 테고······ 한수영에게 일이 있으니 유상아가 오게 된 거겠지. 한수영이 내가 맡긴 일을 잘 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참고로 수영 씨도 오고 싶어했어요.” “아······ 예. 그렇군요.” 선의의 거짓말이겠지. 걘 나 싫어하는데. 콰아아아앙! 수풀 지대 쪽에서 굉음이 터진 것은 그때였다. 다시 일행을 만난 것에 들떠서, 게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수풀 지대 쪽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상황은 알고 오신 건가요?” 유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형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어요.” 아무리 유중혁이 ‘유희의 지배자’에 탱커 포지션을 가졌다 해도, 지금쯤이면 체력이 거의 바닥에 이르렀을 터. 2차전은 여기서 승부가 갈릴 것이다. 키메라 드래곤이 후욱 하고 바람을 불자 인근의 나무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시야가 트이자, 성좌들이 격전을 벌이는 전장이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중혁!” 내 외침에 성좌들에 둘러싸여 있던 유중혁이 이쪽을 보았다. 「늦었군.」 여전히 시건방지지만, 전신에 피를 철철 흘리는 게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다. [놈이다! 저놈이 문장을 가지고 있다!] 특수한 스킬을 가진 녀석들이 있는 모양인지, 성좌 하나가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우리 팀을 제외하고 남은 성좌 및 참가자들의 숫자는 총 여섯. 그리고 이쪽은, 새로 보급된 인원을 포함해도 다섯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유중혁은 이미 전투불능에 가까운 상태. [가라!] 전면전이 시작되자, ‘인류의 시조’와 ‘바나라의 장군’을 중심으로 진형을 짠 성좌들이 밀려들었다. 그들에 대항해 가장 먼저 달려간 것은 강철검제 이현성이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는다!” 전방을 향해 함성이라도 발사하듯 달려간 이현성은, 무려 설화급 성좌인 마누와 양 팔을 마주댄 채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겨우 화신 따위와 손을 섞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 마누가 인상을 찌푸렸다. 강력한 ‘격’이 마누의 손끝에서 불타오르며 강철 외피가 조금씩 물렁해졌지만, 이현성은 조금도 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인류의 시조’를 노려봅니다.] 인류의 시조가 설화급이듯, 강철의 주인 또한 설화급. 드드드드드드! 이현성의 전신으로 자라나는 [강철화]의 가시들을 보며, 나는 그가 얼마나 혹독한 개인 시나리오를 수행해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고작 10번대의 화신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지금의 이현성은, 지금껏 있었던 어떤 회차의 이현성 보다도 압도적인 성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유상아도 마주 뛰어나갔다. “올림포스는 제가 맡을게요.” [네년, 제정신인 것이냐!] 유상아를 발견한 오이디푸스 왕이 괴성을 질렀다. 본래 둘은 같은 <올림포스>의 소속원. 하지만 지난 번에 디오니소스에게 들은 것이 맞다면, 올림포스는 지금 내전 중이었다. [하늘 걸음의 주인이여! 당신은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거요!] 정확한 상황은 모르겠지만, 헤르메스와 디오니소스를 주축으로 한 일부 그룹이 기존의 <올림포스>에서 독립하려 하는 것은 명백해보였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선회하는 유상아가 오이디푸스 왕과 격전을 시작하자, 신유승이 키메라 드래곤을 움직였다. 고오오오오오! 응집된 브레스가 전장을 뒤덮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성좌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제한 시간이 10분 남았습니다.] 2차전도, 어느새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현재 각 팀의 승점은 거의 동등한 상황. 때문에 성좌들도 필사적이었다. 그아아아아! 몇 명의 성좌들이 키메라 드래곤 쪽으로 가세하자, 금세 키메라 드래곤과 신유승은 위기에 몰렸다. 아까 [묵시록의 이무기]를 상대할 때 꽤나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인지, 드래곤은 생각보다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해치우시오! 덩치만 큰 놈일 뿐이니!] 이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면 불리해지는 것은 우리쪽이다. 경기는 3차전으로 흘러갈 것이고, 만약 거기서도 승점을 획득하지 못하면 우리는 패널티가 사라진 무대에서 성좌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유중혁이, [베르칸 공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작을 죽여. 놈이 문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을 뚫겠다.” 마력을 쥐어 짜낸 유중혁이 전방을 향해 [파천검도]를 사용했다. [놈들이 문장을 노린다!] 유중혁은 베고, 또 베며 길을 뚫었다. 마지막 힘을 다한 [흑천마도]가 거대한 반원을 그리며 바닥에 처박히자, 기회를 노리던 성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맡긴다, 김독자.」 마력이 다한 유중혁이 마누의 창에 심장을 꿰뚫렸다. [참가자 ‘유중혁’이 살해당했습니다!] 죽는 순간 까지도 녀석은 꼿꼿이 선 채였다. 앞을 막던 유중혁이 사라지자 성좌들은 곧바로 나를 향해 돌아섰다. 쇄도하는 원시의 창과 섬광포. 그러나 창극과 폭렬은 내게 닿지 못했다. 까가가가각! “독자 씨!” 이현성이 [강철화]를 발동해 성좌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뜨거운 열기와 충격 속에 몹시 고통스러울 텐데도, 이현성은 오히려 활력이 도는 표정이었다. 멀리서 꽁무니를 빼는 [베르칸 공작]의 모습이 보였다. [제한 시간이 5분 남았습니다.] “현성 씨, 날 던져요.” “안 됩니다. 또 그런 짓을······!”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은 던질 수밖에 없어요.” 나는 흔들리는 이현성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죽는다고 진짜로 죽지도 않는다고요.” 진짜로 죽는 것은, 이 ‘선발전’에서 패배했을 때다. 잠시 나를 보던 이현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현성의 눈동자는 어느새 군인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 거짓말을 또 믿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 지금은 억지를 부릴 때가―” “죽을 때는 같이 죽는 겁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크게 기뻐합니다.] “반드시 그럴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이현성이 나를 업은 채 달리기 시작했다. 돌진하는 이현성에게 부딪친 마누가 볼링핀처럼 바닥을 굴렀다. [커억! 건방진 화신 따위가······!] 폭주하며 달리는 이현성을 막아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잠깐은 그렇게 보였다. [교만한 아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겨우 그런 ‘역사’로는 무리다.] 투콰아앙! 강력한 ‘격’이 만들어 낸 힘에 이현성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어느새 힘을 회복한 ‘지고한 빛의 신’ 수르야가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제3의 눈]을 제대로 못 쓰더라도 그는 <베다>의 로카팔라. 우리를 막을 권능은 수도 없이 많이 가지고 있다. 네 개의 팔이 움직이자, 이현성이 달리던 대지가 통째로 밀려났다. 달려도 달려도, 오직 제자리걸음만을 반복할 뿐인 땅.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인간에게 어울리는 장소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에게 말이지.] 나는 이현성의 등 뒤에서 [전인화]의 힘을 발동했다. 휘두른 주먹에서 뻗어나간 섬전이 수르야의 몸통에 격중했다. 쿠구구구구구! 하지만, 수르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 개의 팔이 만들어 낸 투명한 방어막이, 내 모든 공격을 무화시키고 있었다. [정말 이 정도인가? 너는 정말 겨우 이 정도로, ‘이 시나리오의 끝’을 보고자 하는 것이냐?] 내가 쌓아온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힘이었다. [전인화]도, [백청강기]도 먹히지 않는다. [시대가 많이 변했구나. 겨우 그 정도 ‘역사’로······.] 고작 삼십 퍼센트의 힘이 개방된 상황인데도 이런 격차가 난다. 그런데 만약 백 퍼센트의 힘이 개방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아저씨를 무시하지 마!” 날아오른 키메라 드래곤의 머리에서, 신유승이 외치고 있었다. 고오오오오오! 신유승의 신호와 함께 쏟아지는 브레스. 가소롭다는 듯, 수르야가 팔을 휘저어 브레스를 흩어버렸다. 그 틈을 이용해 이현성이 도약했다. 콰아아아앙! [강철화]를 발동한 이현성의 몸이 수르야와 충돌했다. 무수한 공격을 받고도 끄떡없던 수르야의 몸이 처음으로 움찔 떨렸다. “으아아아아아아!” 이현성은 미친 사람처럼 수르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강철화]를 발동한 주먹이 갈라지고, 피를 쏟고, 부서진 뼛조각이 튀고 있음에도 이현성은 멈추지 않았다. 쩌저저저적. [‘73번째 마계’가 당신과 조력자들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당신에 관한 새로운 설화가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신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의지가, 저 지고한 신의 방어벽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약간의 틈. 인간의 역사가 만들어 낸,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현성 씨.” 그리고 나와 이현성은, 그 균열을 놓치지 않았다. 마치 수류탄을 던지듯, 이현성이 [소형화]를 통해 작아진 내 몸을 힘껏 던졌다. 나는 수르야의 팔이 형성하던 방벽을 돌파해 그대로 베르칸 공작을 향해 쇄도했다. 놀란 공작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내가 [전인화]를 발동해 녀석의 목에 검을 꽂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참가자 ‘구원의 마왕’이 참가자 ‘베르칸 공작’을 살해했습니다!] ······해냈다. 아찔한 승리감과 함께, 머릿속으로 무수한 시스템 메시지들이 흘러 들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들을 다 읽기도 전에, 나를 쥐어 터트린 힘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얼핏 스쳐간 것은 수르야의 얼굴이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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