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266화 순간적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되돌아왔다. 의식이 정전된 같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지만, 보이는 것은 새카만 천장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천천히 심호흡을 한 후, 무거운 머리를 움직여 사고를 시작했다. 나는, ‘마왕 선발전’의 2차전에 참가중이었다. 마지막 순간 [베르칸 공작]을 죽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수르야의 일격을 맞아 사망했다. 이후 시스템 메시지가 쏟아지는 것을 듣긴 들었는데······. 2차전은 이긴 건가? 아니면······ 진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적의 문장을 빼앗아 게임에 승리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문장을 빼앗겨 게임에 패배했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둘 다 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지금으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다. [당신은 살해당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메시지 하나뿐이었다. 내가 게임에서 죽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장소에서 눈을 떴다는 것. “윽······.”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자, 내가 누워 있던 공간이 조금 더 명료하게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등잔들이 벽감 사이사이에 설치되어 있어, 드넓은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낯선 장소였다. 내가 서 있는 곳에는 [000~100]이라는 팻말이 적혀 있었고, 팻말을 중심으로 큼직큼직한 책장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퀴퀴한 책 냄새. 마치 대학의 장서관을 연상시키는 듯한 광경이었다. ······도서관? 내가 왜 여기 있지? 나는 가장 가까운 서가의 책들 중 하나를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다. 「이설화가 죽은 뒤, 유중혁은 몇 번이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진 특성과 스킬만으로는 절대로 놈들을 이길 수 없었다. 시나리오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성좌들의 힘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강했다. 이설화의 복수도, 이지혜의 복수도 할 수 없었다. 절망 속에서, 유중혁은 생각했다.」 익숙한 문체의 문장들이 줄지어 이어졌고, 나는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 문장들을 읽었다. 「‘만약, 내게도 ‘배후성’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멸살법’에 자세히 나오던 장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내 상상 속에서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반복되었던 장면이었으니까. 「[성좌, ‘???’가 당신을 화신으로 삼고 싶어합니다.]」 이것은, ‘유중혁’이 처음으로 자신의 배후성을 얻던 순간이었다. 배후성이 없는 화신으로 한계치까지 수련을 반복했으나, 끝내 시나리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0회차의 유중혁. 「새로운 특성, ‘회귀자’가 개화합니다!」 그런 유중혁이, 처음으로 ‘회귀자’가 되던 순간의 이야기. 나는 반사적으로 책을 덮고 제목을 살폈다. [유중혁, 0회차 56권의 기록] 왜인지,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눈이 조금 더 어둠에 익숙해지자 주변이 한결 잘 보였다. 이곳은, ‘멸살법’의 모든 기록이 모인 도서관이었다. 나는 살짝 질린 채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3149편보다 훨씬 많을 것 같은데.” ‘멸살법’이 길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다 채울 정도의 책이라니. 내가 평생을 다 바쳐도 이 서가의 절반이나 읽을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찌릿. 두통이 시작된 것은 그때였다. 웅크려 있던 기억들이 알껍질을 깨듯 내 안에서 밀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낯설었던 이 장소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저 벽감의 등잔들도, 이 서가의 책들도. 팔뚝에 서서히 소름이 돋으며 강렬한 기시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이 장소에 이미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언제였지? 대체 언제······. 「김 독 자」 도서관 전체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지는 목소리.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말투였다. “······제4의 벽?” 그러자, 도서관 전체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영혼 체 가 위험 했 다」 “위험해?” 「내 가 불렀 다아······.」 [제4의 벽]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혹시, 여긴 네 안인 거야?” 「맞 아」 “여기서 어떻게 나가? 출구는?” 「······.」 “······이봐?” 몇 번을 더 불러 보았지만, [제4의 벽]은 대답이 없었다. 걸핏하면 졸리다며 잠들어버리는 녀석이니, 이번에도 잠들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별 수 없이 스스로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해당 장소에서는 ‘전지적 독자 시점’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장소에서는 ‘책갈피’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용할 수 있는 스킬들은 모두 막혀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장서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동서남북은 물론이거니와 위 아래 어디에도, 출구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탈출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자, 오히려 마약 같은 안락감이 찾아왔다. “······천국이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멸살법’. 오직, ‘멸살법’으로 가득 찬 세계. 만약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 이곳에 왔다면 나는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읽어도 끝나지 않을 이야기가 있다. 영혼체니까 배도 고프지 않다. ······어차피 이대로는 나갈 방법도 없으니까, 책이나 좀 더 읽어볼까. 혹시 모른다. 책 안에 방법이 있을 수도 있고. 나는 책장의 책들을 꺼내 옆에 쌓아놓고 한 권씩 읽기 시작했다. 간만에 봐도, ‘멸살법’은 ‘멸살법’이었다. “······뭔 설명이 이렇게 많아.” 주변이 고요했기 때문일까. 평소보다도 책을 읽는 속도가 더 빨랐다. 하지만 대충 읽지는 않았다. 한 점의 고기를 썰기 위해 오래도록 굶어온 미식가처럼, 나는 문장 하나하나를 잘게 썰고 음미하며 삼켜갔다. “자식, 이때는 귀여웠네.” “······젠장, 초반에 좀 더 기를 죽여 놨어야 하는데.” 어떤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 어떤 이야기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 정보는 까먹고 있었네······.” “뭐야, 이런 일도 있었어?” 이곳에 아무도 없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자연스레 혼잣말이 나왔다. 정말로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진짜 혼잣말이었다. 그렇게 몇 권이나 책을 더 읽었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뿌듯함과 함께, 따뜻한 온기 같은 것이 솟았다. 갑자기 약한 마음이 들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여기서 머무르는 것은 어떨까. 만약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이곳에서는 시나리오 때문에 죽을 일도 없고. 성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데. 한 칸의 책을 후루룩 읽고 난 뒤에는, 적당히 책장을 건너 뛰어 읽거나 중간부터 책을 펼치기도 했다. 「유중혁은 가끔 생각했다.」 「‘만약 그때, 그 다리 위에서 녀석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은, 녀석을 그곳에서 죽였더라면······ 내 남은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뭔가 익숙한 구절에, 나는 반사적으로 책의 제목을 살폈다. [유중혁, 3회차 12권의 기록] ······역시나, 3회차였나. 나는 몇 권의 책을 더 펼쳐 보았다. 어떤 책에는 내 욕이 적혀 있었고. 「‘빌어먹을 김독자.’」 그리고 어떤 책에는. 「“김독자, 정신차려라! 김독자!”」 조금은 고마운 말들도 적혀 있었다. 그리고 어떤 책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 필터링이 된 것처럼 읽을 수 없는 문장들. 아예 에피소드 일부가 백지인 책도 있었다. 아직, 그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처럼. 모든 책들은 회차의 순번에 맞게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찾기 쉽도록 일부러 정리해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건너편 책장에서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때였다. 파스슷. 나는 반사적으로 책장을 덮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의 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였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굴러 다니는 책들에 몇 번인가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집요하게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서가의 팻말들은 빠르게 바뀌었다. [000~100]에서 [100~200]으로. 다시, [200~300]으로. [유중혁, 373회차 24권의 기록] [유중혁, 473회차 31권의 기록] 무수한 서가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유중혁, 573회차 27권의 기록] [유중혁, 681회차 12권의 기록] ······. 숨이 조금씩 벅차왔고, 여전히 서가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영혼체 상태일 텐데도 숨이 벅차왔다. 그래도 나는 계속 달렸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였다. 여기서 만약 그를 놓치면, 다시는 못 잡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달렸을까. 인기척이 조금 가까워졌다. “잠깐만!” 외치는 순간, 갑자기 앞쪽의 바닥이 쑥 꺼졌다. 비명과 함께 관성을 이기지 못한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책장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유중혁, 1863회차 22권의 기록] [유중혁, 1863회차 23권의 기록] [유중혁, 1863회차 26권의 기록] ······. 책들이 머리 위로 우당탕 쏟아졌다. 유중혁의 주먹에 맞는 것처럼 아팠다. 간신히 책 더미를 헤치고 나오자, 내가 쫓던 그림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제길······.” 대신 내 눈앞엔 새카만 낭떠러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 “아······.” 나는 홀린 듯 그 낭떠러지 안을 들여다 보았다. 이곳이 이 도서관의 끝. 모든 이야기의, 끝이었다. 그 안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마치, 내가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뭔가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곳으로 가면, 저 안으로 들어가 볼 수만 있다면······. 서서히 기울어진 몸이 낭떠러지 쪽으로 가까워지려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꽉 잡으며 말했다. 「(떨어지면 죽어. 거긴 진짜로 벽의 ‘너머’ 거든)」 *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정신 차려라.”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유중혁 씨, 그만 때려요! 독자 씨 얼굴이 퉁퉁 부었잖아요!” “대체 왜 안 일어나는 거지?” “숨은 아직 붙어 있어요. 뭔가 영혼에 충격을 받은 것 같은데······.” 유상아의 말에 유중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는 뺨이 탱탱 부은 김독자가 축 늘어져 있었다. 곁에서 곰만한 덩치의 이현성이 몸을 웅크린 채 정신 나간 얼굴로 김독자의 전신을 주물럭대고 있었다. “독자 씨······ 정신 차리십시오. 제발······.” 2차 전이 종료됨과 동시에, ‘신화의 전장’은 갑작스레 해체되었다. ‘유중혁―김독자 공단’의 참가자 및 조력자들은 모두 공단의 황무지 앞에 내버려졌다. 유상아는 같은 진영에 서 있는 몇몇 인물을 바라보았다. 개 두 마리, 예쁘장한 미소년 하나. 그리고 한명오······. “용케 살아 계셨네요. 한 부장님.” “유, 유상아 씨······.” 한명오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유상아는 곧장 곁에 있던 장하영을 바라보았다. “그쪽 분은······ 우리 편이신가요?” “아, 저는······.” 유상아의 투명한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장하영이 말을 더듬었다. 자신을 뭐라 소개해야 할지 모르는 투였다. 그때, 장하영의 눈에 신유승의 모습이 들어왔다. “앗, 너는 혹시 그 영상의······?” “······저를 아세요?” 신유승 덕분에 ‘73번째 마왕’ 시나리오를 떠올린 장하영은, 뒤늦게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아챈 듯했다. “저 진짜 팬이에요! 우와, 이렇게 지구의 화신분들을 만나게 될 줄은······.” 화색을 띤 장하영이 눈을 반짝이며 유상아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손을 잡힌 유상아가 옅게 웃으며 허공을 보았다. “그나저나······ 우린 이긴 걸까요, 진 걸까요?” 허공에 떠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 한 줄 뿐. [현재 2차전의 승자 팀을 판별 중입니다.] 장하영이 말했다. “김독자가 먼저 죽인 거 같은데, 그럼 우리 승리 아닐까요?” “하지만 곧바로 우리 문장도 빼앗겨서······.” 그러자 유중혁이 고개를 저었다. “김독자가 더 빨랐다.” 강한 확신이 담긴 그 말에, 장하영과 유상아의 안색도 밝아졌다. 유중혁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황무지의 건너편에서 새카만 먼지구름이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강력한 ‘격’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듯한 광경. 다가오는 존재들이 무엇일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을 굳힌 유중혁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현재 2차전의 승자 팀을 판별 중입니다.] 여전히, 하늘에 떠 있는 문구는 그것뿐이었다. 정확히는 벌써 삼십분 째 그대로였다. “다들 준비해라.” “네?” “뭔가가 잘못됐어.” 메인 시나리오에 한해서는 일처리 속도가 빠른 관리국 녀석들이, 겨우 승자 판별 하나에 삼십 분이나 시간을 지체할 턱이 없었다. 즉, 이 상황은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 누군가가, ‘시나리오’가 이대로 끝나길 바라지 않고 있다는 것. 츠츠츠츠츳! 현재 73번째 마계는 ‘신화의 전장’을 현현할 막대한 개연성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 유중혁은 [흑천마도]를 뽑아들며 말했다. “이번엔 게임이 아니다.” ‘우레를 먹는 새’가 토한 끔찍한 포효가 하늘을 뒤덮었다. 더 이상 게임의 페널티를 받지 않는 성좌들이, 하늘을 건너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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