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262화 “······뭐야?” 깜짝 놀란 장하영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래서 시간을 끌라고 한 거야.”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우레를 먹는 새’를 살해하였습니다!]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유중혁과, 당황하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좌,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깜짝 놀라 고성을 지릅니다!] [성좌, ‘바나라의 장군’이 화신 ‘유중혁’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유중혁’의 움직임에 경악하여 눈을 비빕니다.] 몰아치는 공격에도 유중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이곳의 모든 지형지물을 파악하고 있는 듯 자유로운 움직임. 격노한 ‘오이디푸스 왕’이 지팡이 끝에서 섬광포를 내갈겼을 때, 이미 유중혁의 신형은 그곳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디로 간 거지?] [찾아! 이 근처에 있다!] 성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유중혁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장하영과 함께 커다란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유중혁의 특성 중 하나는 바로 ‘프로게이머’. 녀석은 모든 종류의 게임에서 압도적인 어드밴티지와 적응력을 얻는다. 게임은 아직 초반이고 능력치도 제한되어 있는 상황. 성좌들이 게임에 익숙해지기 전인 지금, 이 ‘첫판’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유리한 무대였다. 상대가 그 어떤 성좌라 해도, 일대일 상황이라면 지금의 유중혁을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저기 있다!] 수풀의 기척을 쫓아간 ‘바나라의 장군’이 입에서 칼날 바람을 토해냈다. 쐐애액,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풀숲이 일거에 누웠지만, 이번에도 유중혁은 그곳에 없었다. 당황한 ‘바나라의 장군’이 물러서는 순간, 바닥의 흙더미 사이로 섬광 같은 빛살이 번뜩였다. 피하기엔 너무 늦은 일격이었다.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바나라의 장군’을 살해하였습니다!] 그래, 둘 정도는 잡아줘야 유중혁이지.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2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중혁’의 활약으로 전장에 혈향이 불기 시작합니다!] 곁에 있던 장하영이 유중혁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부들부들 떨었다. “저거 뭐야? 괴물이야?” “비슷하지. 한국 최고의 프로게이머였으니까.” 어디까지나 ‘멸살법’의 설정상 그렇다는 얘기지만. 먼 곳에서 ‘바나라의 장군’의 화신체가 반쪽으로 갈라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게임의 룰을 적용 받고 있으니 정말 화신체가 죽지는 않겠지만, 정신적 타격이 상당할 것이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즐거워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유중혁’에게 20,000 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바나라의 장군’의 진명은 인도 신화의 원숭이 영웅인 ‘하누만’이다. 같은 원숭이 출신이라는 특징 때문인지, 두 신격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보다. [제기랄, 쫓아!] 두 명을 학살한 유중혁은, 이번에는 암석 지대의 협곡 아래로 숨어들었다. 마침 저쪽에서도 한 명의 원군이 더 나타났다. [성좌, ‘인류의 시조’가 건방진 후손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고간만 간신히 가린, 원시인에 가까운 모습을 한 성좌. ‘인류의 시조’, 마누. 저 녀석도 멜레돈 공단 편이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도와야겠는데.” <베다>의 마누는 설화급 성좌다. 설화급 중에서 격이 낮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유중혁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이미 유중혁은 두 명의 성좌를 격살하느라 이동기와 마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황. 아무리 녀석의 특성이 프로게이머라고 해도 지금부터는 무리······. [참가자 ‘유중혁’이 ‘센티넬 골렘의 가호’를 발동합니다!] 암벽 지대의 고지 위에 자리를 잡은 유중혁이, 거대한 활을 겨누고 있었다. [성유물, ‘로빈후드의 강궁’이 사용자의 명중률을 극대화시킵니다!] 저 자식, 저런 건 또 언제 구한 거야? 저건 15번째 시나리오 지역인 ‘루그라티아’에 가야 구할 수 있는 건데······. 푸슛! 푸슛! 푸슈슛! 쏜살같이 날아든 무형의 화살이 오이디푸스 왕의 몸에 박혔다. [컥······!] 당연한 얘기지만 유중혁의 장점은 ‘검술’만이 아니었다. 녀석은 지난 회차에서 온갖 종류의 병장기를 마스터 클래스의 숙련도로 익혔다. [네놈! 근접 딜러가 아니었······?] 심지어 지금 유중혁의 포지션은 ‘올라운더’. [참가자 ‘유중혁’이 포지션 효과의 보정을 받습니다.] 이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유중혁은 어떤 종류의 무기를 써도 패널티를 받지 않는다. [죽여 버리겠다! 이깟 걸로, 이깟 걸로······!]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린 오이디푸스 왕이 괴성을 질렀다. “우리도 도우러 가자!” “잠깐 기다려 봐.” 지금 상황에서 어설픈 움직임으로 유중혁을 돕는 것은 오히려 녀석의 작전을 방해할 뿐이다. 곧바로 [전지적 독자 시점]을 가동하자, 유중혁의 작전이 영화의 예고편처럼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내 허탈한 웃음에 장하영이 물었다. “······왜 그래?” “저 자식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도 더 무서운 놈이라서.” 유중혁은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일분 일초도 허비하지 않았다. 그 증거가 지금 녀석의 몸에 깃든 ‘센티넬 골렘의 가호’였다. [‘센티넬 골렘의 가호’가 누적되기 시작합니다!] 협곡 외곽에서 서식하는 ‘센티넬 골렘’은 처치할 시 ‘기절’ 효과를 주는 버프를 얻을 수 있다. 단, 이 버프에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푸슛! 푸슈슛! 바로 스무 번의 공격을 성공시켜야만, 기절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푸슈슈슈슛! 이제 유중혁과 오이디푸스 왕의 거리는 십 미터 남짓. [이깟 것, 이깟 거······!] 단숨에 도약한 오이디푸스 왕이 유중혁을 향해 섬광포를 쏘려는 순간. 쩌저저적. 발목부터 굳어진 오이디푸스 왕의 몸이, 석상이 쓰러지듯 앞으로 무너졌다. [조력자 ‘자신의 눈을 찌른 자’가 기절 상태에 빠졌습니다.] 기절의 지속 시간은 3초. 그리고 3초는, 유중혁에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참가자 ‘유중혁’이 조력자 ‘자신의 눈을 찌른 자’를 살해하였습니다!] [참가자 ‘유중혁’의 이름이 전장에 널리 울려 퍼집니다!] [공단 ‘유중혁―김독자’ 팀이 승점 3점을 획득하였습니다.] 이걸로 셋······ 솔직히 감탄 밖에 안 나온다. 부릅 뜬 눈으로 죽어가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정말로, 저 녀석이 ‘별자리의 연회’에서 나를 협박했던 설화급 성좌가 맞는지 믿겨지지 않았다. [건방진 놈!]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중혁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흥분한 ‘인류의 시조’가 달려들었다. 유중혁은 이제 체력도 마력도 아슬아슬해보였다. 쐐애애애액! 인류의 시조가 든 [원시의 창]이 유중혁의 빈틈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겉보기에야 뗀석기 처럼 생긴 물건이지만, 그 위력 하나는 어마어마하다. 콰아아앙! 하지만 유중혁도 만만치 않았다. 녀석은 유연한 동작으로 허리를 비틀며, 거의 동시에 패도를 내질렀다. 꽈가가가각! 창대와 패도가 충돌하며 날카로운 파찰음이 났다. 초월좌들만이 가지는 특유의 샛노란 아우라가, 유중혁의 [흑천마도]를 휘감았다. 그에 맞서 ‘인류의 시조’ 마누가 휘두른 창극에도 새파란 ‘격’이 휘감겼다. [무공이라! 발타(拔陀)가 벌레들에게 남긴 재주였지. 아직도 쓸모가 있는 모양이구나.] 전력의 십 퍼센트만을 쓸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까. 인류의 시조 마누는 아직 자신이 제어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수십 합의 교환이 이루어졌고, 마누가 즐겁다는 듯 껄껄 웃었다. [제법이구나 인간아. 무수한 ‘초월좌’들을 보아왔지만, 네놈만큼의 실력자는 보지 못했다.] “내 스승을 보지 못한 모양이군.” 고오오오오! 마치 무공을 연상시키는 힘이 마누의 창극에서 뻗어 나왔다. 마누는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재능에 통달한 성좌. 본래라면 지금의 유중혁은 마누에게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힘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는 것은, 마누가 오랫동안 이런 긴 전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구나! 성좌가 된 이후 열 합 이상을 겨뤄본 적은 손에 꼽았는데!] 강제적으로 평형을 이룬 힘의 저울추가, 이 대결을 지속시키고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가려는 장하영을 굳게 말렸다. “이대로면 저 자식 죽는다고!” 나도 튀어나가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장이라도 [전인화]를 쓰고 달려 나가, 마누의 목을 쳐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내 생각대로만 된다면, 곧 유중혁은 ‘계기’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건 오직 시간. 시간뿐이다. “장하영. ‘벽’으로 메시지 보내.” “뭐? 누구한테?” “인류의 시조.” “응? ······지금 유중혁이랑 싸우고 있는 저 놈? 아······!” 영리한 장하영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정체불명의 벽’을 켠 장하영은 곧바로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누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냐! 이 메시지들은······!] 마누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을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15세 여중생’이 보낸 무수한 메시지들이, 녀석의 시야에 팝업 창처럼 마구 떠오르고 있겠지. [가소로운 전술을!] 마누의 움직임이 머뭇거리는 사이, 유중혁의 몸에서 새하얀 빛살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저 영롱한 빛을 본 적이 있었다. 정희원이 ‘웅크린 자’에서 ‘멸악의 심판자’로 진화했을 때. 그리고 이현성이 ‘태산 부수기’를 터득했을 때······. [등장인물 ‘유중혁’이 특성 진화의 계기를 맞이합니다!] [등장인물 ‘유중혁’의 특성 ‘프로게이머’가 진화합니다!] 특성 진화. 마침내, 유중혁의 두 번째 특성이 본격적인 개화를 맞이한 것이다. 대경한 마누가 섬전 같은 속도로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부신 빛이 유중혁의 몸에서 터져 나왔다. 그 황홀한 광경을 보며, 나는 ‘멸살법’의 후반부에서 이지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사부가 가진 특성이야 셀 수 없이 많지. 흠······ 물론 최고는 <회귀자>겠지. 그 외에는 <만병의 달인>도 괜찮고, <신과 악마의 대적자>도 훌륭하고······ 응? 그 중에서 제일 부러운 특성? 아하하, 그야 당연히······.”」 마누가 휘두른 필살의 일격은, 허망하게 유중혁을 스쳐갔다. 「“<유희의 지배자>. 그거지.”」 천천히 눈을 뜬 유중혁은, 내가 몇 번이고 되풀이해 읽었던 바로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순간, 유중혁은 마치 이 ‘게임’의 모든 것을 이해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마 지금 유중혁의 눈에는, 마누의 모든 공격이 0과 1의 조합으로 보일 것이다. 전설급 특성 ‘유희의 지배자’. 이 무대가 ‘게임’인 한, 유중혁은 이 세계의 그 어떤 성좌보다도 더 신(神)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 인덱스 ← 이전 화 다음 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