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261화
시스템 메시지와 동시에 주변의 경관이 바뀌기 시작했다.
신화의 전장.
역대 [거대 설화]의 무대였던 곳을 가상으로 빌려오는 것이 바로 이 게임, ‘신화의 전장’의 특징이었다.
―대전장 <하르마게돈>에 입장하였습니다.
―3분 뒤 게임이 시작됩니다.
새카만 하늘의 한편에는 천국의 계단이, 다른 한편에는 지옥의 문이 열려 있었다. 이게 진짜였다면 저 계단에서는 <에덴>의 대천사들이 몰려 나왔을 것이고, 지옥문에서는 <마계>의 마왕들이 몰려 나왔겠지.
다행히도 여기서 그럴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가상의 무대’니까.
[성좌,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가 익숙한 무대에 눈살을 찌푸립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젊은이와 여행의 수호자’에게 적의를 드러냅니다.]
[다수의 성좌들과 마왕들이 서로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진짜로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어째 으스스하네······.”
장하영이 어깨를 감싸 안은 채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배경음인지 뭔지 간간히 오싹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보호막을 바라보았다.
게임 시작 전까지는, 저 보호막이 우릴 보호해 줄 것이다.
“정신들 차리세요. 각자 선택한 포지션 확인하시고요.”
내 말에 다른 일행들도 하나둘 평정을 되찾는 듯했다.
“탱커는 누구죠?”
[나일세.]
탱커는 사명대사, 근접 딜러는 나와 파천신군, 원거리 딜러는 장하영과 오수. 서포터는 한명오. 그리고 ‘올라운더’는······.
“유중혁은?”
“아마 우리랑 다른 곳에 떨어졌을 거야.”
‘신화의 전장’은 소환에 응한 장소에 따라 출발 지역이 달라진다.
[조력자 ‘유중혁’이 소환에 응했습니다.]
메시지는 제대로 떠올랐으니, 유중혁도 이 전장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장하영이 물었다.
“이거 그 시공의 전장인가 하는 게임 같은 거지? 나 해본 적 있어. 적의 본거지를 부수면 이기는······.”
“맞아. 근데 좀 다른 점이 있어.”
보통 AOS게임은 적의 본진을 공략하면 게임이 끝난다.
하지만 이 게임은 다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건 ‘본진’이 아니라 ‘문장’이야.”
“문장?”
나는 한명오의 손에 쥐어진 물건을 가리켰다. 그것은 영롱한 빛깔이 어우러진 작은 비석이었다.
“이, 이게 뭐야!”
“저걸 지켜야 해.”
비석에는 말 그대로 작은 ‘문장’이 쓰여 있었다.
『천국의 사자(使者), 지옥의 수문장(守門將)』
한명오가 기겁하며 비석을 내게 건네려 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것을 밀어내며 말했다.
“지금은 부장님이 갖고 계세요. 중요한 물건이니까 간수 잘 하시고요.”
“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독자 씨가 갖고 있는 게······!”
“중요하니까 부장님이 갖고 계신 게 낫습니다. 보통 ‘문장’은 주요 참가자들이 갖고 있으니까요. 적팀의 예상을 깨야죠.”
“나, 난 못해! 난 이런 게임 해본 적 없다고!”
확실히 한명오는 게임 회사 부장 주제에 게임에는 둔한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게임은 유상아 씨가 잘 했던 것 같은데.
유상아 씨는 혼자서 팀을 캐리해 사내 게임 대회의 결승전까지 올라갔던 적도 있다.
······지금 여기 있는 게 한명오가 아니라 유상아 씨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이 게임에서 승리할 방법은 둘입니다. 하나는 적팀의 ‘문장’을 빼앗는 것. 둘은 적팀의 참가자를 모두 죽이는 것.”
“문장을 빼앗는 게 더 쉽겠네.”
“그렇지, 보통은.”
“좋아! 나한테 맡겨!”
의욕이 충만한 상태로 장하영이 외쳤다.
하지만 이 게임은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다.
“의욕은 알겠지만, 개인 플레이를 하면 곤란해. 이제부터 작전을 짜야······.”
컹컹!
왕왕!
······일행 중 둘이 개라는 걸 잊고 있었다.
‘불길에 몸을 던진 개’ 오수는 아까부터 주변을 킁킁대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파천신군은 관심 없다는 듯 발라당 드러누워 앞발로 배를 긁어대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명대사님.”
아까부터 다른 성좌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것 같았으니, 기대해 볼 건 이쪽뿐이다.
[소승들의 말이 너무 어려워서 잘 모르겠군. 에이오에쓰으······ 게임······이 대체 뭔가?]
사명대사는 굉장히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한반도의 일부 성좌들이 ‘대머리 의병장’을 답답해합니다!]
미처 연장자 배려를 못했다.
사명대사가 최근 게임 용어를 알 턱이 없는데.
[어쨌든 오랑캐 놈들을 다 죽이면 된다 그 말인가?]
“예, 비슷하긴 한데······.”
[그거라면 본승이 앞장서겠네! 가세!]
의기충천한 사명대사가 죽장을 휘두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게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무대의 보호막이 해제되었다.
[게임의 난이도를 고려하여 참가자들의 능력치가 자동 조정됩니다.]
[1차전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본래 능력치의 10%만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회차가 거듭됨에 따라, 이 패널티는 감소합니다.]
이어서 우리 쪽 본진의 ‘천국의 계단’에서 조그만 요정을 닮은 하급 천사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팀의 지원군이 생성됩니다!]
[하급 천사들이 당신들을 돕습니다!]
천사들을 보고 놀란 오수가 컹컹 짖었다.
“야! 걔네 우리 편이니까 물지마. 사명대사님 잠깐만요! 같이 가요!”
시작부터 개판이었다.
최전방의 사명대사를 필두로 파천신군과 오수가 질주를 시작했다.
나와 장하영은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고, 한명오는 일행의 후미에서 소심한 달음박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부장님은 최대한 뒤쪽에 계세요. 괜히 나서지 마시고.”
“······최선을 다해 보겠네!”
도망 하나는 잘 치는 한명오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살길은 찾을 것이다.
“앗, 맵이 바뀌는데?”
본진을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드넓은 평원 지대였다.
평원 지대의 양쪽에는 각각 골짜기와 숲 지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골짜기에는 ‘묵시록의 이무기’가, 그리고 숲 쪽에는 ‘타락한 치천사’가 있다. 그 외에도 맵 곳곳에는 초반에 잡아두면 버프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몬스터들이 꽤나 포진해 있는데······.
“잠깐만요! 사명대사님! 그렇게 빨리 가시면 안돼요!”
쿠구구구구구!
[본승만 믿게나! 이래봬도 전쟁에는 도가 튼 몸일세!]
사명대사가 웅장한 진언을 터뜨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한반도의 영령들이여! 본승에게 힘을 주시오!]
저런다고 누가 사명대사에게 힘을 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좌, ‘매금지존’이 성좌 ‘대머리 의병장’을 응원합니다!]
[성좌, ‘황산벌의 마지막 영웅’이 ‘대머리 의병장’을 응원합니다!]
[성좌, ‘흥무대왕’이 ‘대머리 의병장’에게 100코인을 후원하였습니다.]
말 그대로 소박한 응원이었다.
[오오오오오오오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적이 나타났다.
제각기 병장기를 차거나, 화신체로 화한 성좌들.
[바나라의 장군]
[자신의 눈을 찌른 자]
[우레를 먹는 새]
갑주를 입은 원숭이와 금빛 깃털의 괴조. 거기다 내가 한 번 만난 적 있는 오이디푸스 왕까지······ 아무래도 우리가 조우한 쪽은 [멜레돈] 공단 소속의 성좌들인 듯했다.
하필 설화급 성좌가 섞여 있는 파티라니.
하지만 저쪽도 아직 이 게임에 대한 파악이 덜 끝났을 테니, 아주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덤벼라, 오랑캐들아!]
적들을 발견한 사명대사가 돌격을 감행했다.
목소리가 워낙 우렁찼기 때문일까, 순간 나조차 기대감이 일었다.
그래, 뭐든 싸워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아무리 본 능력치의 10%만 사용할 수 있는 전장이라고 해도, 애초에 나는 사명대사의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위인급 성좌라고 얕볼 게 아니다. 개중에는 척준경 같은 규격 외의 강자들도 있으니까.
[이 호국신승이 전열을 무너뜨려 주겠노라!]
호기롭게 달려간 사명대사가 커다란 죽장을 여의봉처럼 휘둘렀다.
당황한 성좌들이 고성을 질렀고, 폭음이 전장을 휩쓸었다.
콰아아아앙!
푸슈슛! 푸슈슈슛!
곳곳에서 살점이 낭자했고.
쿠과가가가각!
무기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푸우우욱!
꿰뚫린 상처에서 피가 솟았다.
[첫 번째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사명대사는 잘 싸웠다.
나는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모두 도망쳐요!”
[조력자 ‘바나라의 장군’이 조력자 ‘대머리 의병장’를 처치했습니다.]
[공단 ‘멜레돈’ 팀이 승점 1점을 획득하였습니다.]
*
“제기랄, 저 스님 센 거 아니었어? 자기만 믿으라며!”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한명오는 도망칠 때만큼은 제일 빨랐다.
왠지 저렇게 될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사명대사가 트롤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명대사의 원혼’이 전장을 배회합니다.]
[오오오오오오!]
사명대사가 가진 성흔인지 뭔진 모르겠지만, 죽은 사명대사의 혼이 전장 곳곳을 떠돌며 우릴 뒤쫓는 성좌들을 공격했다. 우리가 달아날 기회라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드드드드드드!
하지만 적의 추적은 빨랐다. 가장 먼저 일행을 쫓아온 것은 상공을 덮는 거대한 새의 그림자. ‘우레를 먹는 새’였다.
쿠르르르르르르!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새의 진명은 ‘가루라’다.
팔부신중의 하나이자, <베다>의 3주신인 비슈누가 타고 다니는 새.
한순간 허공에서 궤적을 바꾼 녀석의 부리가, 내쪽을 향했다.
[성좌,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자신의 몸을 던져 당신을 지킵니다!]
오수가 달려든 것은 동시였다. 거대한 화신체로 화한 오수가 날아드는 가루라를 측면에서 덮쳤다.
크르르렁!
운 좋게도, 오수의 불꽃이 가루라의 깃털에 들러 붙었다. 줄기줄기 불꽃을 뿜어대는 오수는 마치 도망치라는 듯 우리를 향해 짖어댔다.
컹컹! 컹! 깨갱!
이미 다섯 명의 성좌가 오수에게 들러붙은 상황.
녀석을 구하기엔 너무 늦었다.
[조력자, ‘불길에 몸을 던진 개’가 사망했습니다!]
······빌어먹을.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근처에 있던 ‘파천신군’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졸지에 남은 인원은 나와 장하영, 그리고 한명오뿐.
“미, 미안하네!”
한명오가 돌발 행동을 저지른 것도 그때였다.
앞서 나가던 한명오는 갑자기 자신의 한쪽 다리를 잘랐다.
[등장인물 ‘한명오’가 성흔 ‘외발 준족 Lv.10’을 발동합니다!]
······그랬지, 한명오에겐 저 망할 성흔이 있었지.
두두두두두두!
한명오의 한쪽 발이 타조라도 되는 것처럼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한명오가 잡히면 모든게 끝이니 도망이라도 잘 가는 게 낫다.
그나저나 저 성흔, 얼마나 많이 썼으면 벌써 레벨이 10이야.
“김독자. 이제 어떡······.”
나는 장하영의 입을 막고 곧바로 주변의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주변의 지형지물에 은폐했습니다.]
[‘풀숲’의 효과로 주변의 적이 당신을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르르르르······.
창공을 배회하는 가루라를 보며, 나는 숨죽인 채 장하영에게 속삭였다.
―지금 전력으로는 맞서 싸울 수 없어. 우린 어부지리를 노려야 돼. 시간을 끄는 게 중요하다고.
―······시간만 끈다고 될까?
―일단은.
나도 믿는 구석 정도는 있다.
애초에 이 멤버만 데리고 이길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어떻게든 시간만 더 끌면 된다.
그 녀석만 온다면.
[구원의 마왕! 어디에 있는가?]
풀숲 앞쪽에서 진언이 울려 퍼졌다.
[그대와는 악연이 참 길었지. 설마 ‘운명’에서 도망쳐 이런 곳에 살아 있을 줄이야······ 이 눈 먼 예언자도 미처 읽지 못한 것이 있었군.]
겸손한 듯 하면서도 오만방자한 말투를 보아하니,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풀숲 위로 나타난 존재는 허름한 왕의를 걸친 장님, ‘오이디푸스 왕’이었다.
녀석이 이 선발전에 참전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숨어봐도 소용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눈 먼 예언자는 그대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니.]
순간 장하영의 어깨가 움찔했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개소리니까 걱정하지 마. 놈의 능력으로는 내 미래를 읽을 수 없어.
그러니 저건 명백한 함정이었다.
우리의 기척을 감지하는 순간, 인근의 모든 성좌들이 달려들 셈이겠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아직 <올림포스>는 그대에게 열려 있으니.]
[성좌, ‘구원의 마왕’이 개소리 말고 꺼지라고 말합니다.]
[······재미있군 그래······.]
오이디푸스 왕은 껄껄 웃었으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나올 수 있을지 두고 보지.]
주변의 성좌들이 작심한 듯 풀숲을 휩쓸기 시작했다. 범위 공격력을 가진 성흔들이 작렬했고, 이내 인근 풀숲은 온갖 폭연과 산성액, 그리고 튀어오른 불똥들로 가득해졌다. 산성액에 발등이 녹았고, 불똥이 손목과 목의 살점을 태웠다. 나는 장하영의 손목을 꽉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폭격 같은 공습이 한바탕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행히 녀석들은 우리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폭음은 조금씩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소리를 들으며 녀석들의 거리를 어림했다.
열 걸음, 스무 걸음, 서른 걸음······.
그리고 한순간, 갑자기 모든 폭음들이 사라졌다.
“뛰어.”
장하영과 나는 풀숲을 박차고 달렸다.
쫓아오는 성좌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아주 길고, 끔찍한 절규였다.
먼 하늘에서, 거대한 검에 목이 꿰뚫린 새가 떨어지고 있었다.
[조력자 ‘우레를 먹는 새’가 살해당했습니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