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26화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금호역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먼저, 한명오가 사라졌다.
싸움이 시작될 무렵부터 잘 안 보이기 시작하던 한명오는, 싸움이 끝난 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역으로 이동했는지, 아니면 지금도 역 어딘가에 숨어있는지는 나로서도 잘 알 수 없었다.
“이제 같이 안 다니려나 보죠. 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게다가 그 사람만 사라진 것도 아니고.”
정희원의 말대로였다. 어제의 싸움 이후 금호역에 남은 인원은 이제 거의 없었다.
생존 인원이 적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원작의 어떤 회차 보다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았으니까.
다만, 살아남은 이들 중 대부분이 어젯밤 사건 이후로 역을 떠났다. 아마 각자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남은 사람들은 괜찮을까요?”
유상아가 생존자들 쪽을 보며 물었다.
나와 유상아, 이현성과 이길영, 그리고 정희원. 이 다섯을 제외하면 아직도 이 역에 남은 사람은 고작 다섯 뿐.
정희원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당신들.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는 게 보였다. 대표로 나선 것은 아이의 손을 쥔 젊은 여인이었다.
“···우리는 따로 갈게요. 코인도 좀 남았고요.”
모녀가 그 혈투에서 살아남다니, 솔직히 감탄했다. 저 정도 담력이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아도 충분히 생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정희원도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운이 좋길 바랄게요.”
정희원이 돌아서자, 사람들의 표정에 안도감이 돌았다.
사실 사람들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어제의 일이 좀 충격적이긴 했으니까.
이해한다. 하나는 적선을 거부했고, 다른 하나는 이유가 있다곤 해도 무참히 사람을 학살했다. 저들에게 나나 정희원은 철두파와 크게 다르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나는 옆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성을 툭툭 건드렸다.
“이현성 씨?”
“아, 네!”
멍한 얼굴로 정희원을 쳐다보던 이현성이 내 말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저 여자가 어제 광기에 휩싸여 철두파를 쳐 죽이던 그 여자가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겠지.
“준비는 다 끝나셨습니까?”
“옙! 조금 미흡하긴 하지만 대충은 끝냈습니다. 수통으로 쓸 페트병도 챙겼고, 방한용품도 확실하게, 그리고 비상용 반합 대신 쓸만한······.”
역시 군인은 이럴 때 편리하다.
“······이상, 여기까지입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필요한 게 더 있을 리가 없다······ 고 말하려 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혹시 휴대용 보조 배터리가 있으면 좀 찾아주시겠습니까?”
“배터리 말씀이십니까? 그건 왜······.”
의아하기도 하겠지. 신호도 안 잡히는 판에 스마트폰 같은 게 있어봐야 무용한 일이니까. 나는 대충 둘러댔다.
“쓸 곳이 좀 있어서요.”
이현성은 찾아보겠다고 말하고는 철두파가 남긴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길영과 유상아도 돕겠다며 나섰다. 정희원이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갈 거죠?”
“가야죠.”
당연하다는 듯, 같이 가도 되냐는 질문 따윈 없다. 그게 정희원이란 사람이겠지. 내 입장에서도 환영이다. ‘멸악의 심판자’는 유중혁조차 탐을 낼만한 인재니까.
“물어볼 게 많아요.”
“지금은 안 됩니다.”
“나 참, 철벽은.”
정희원이 주먹으로 나를 툭 치며 웃었다.
[등장인물 ‘정희원’에게 1500코인을 받았습니다.]
“이건······?”
“나눈 거예요. 혼자 먹기 미안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줬어요.”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했다.
어제 정희원은 혼자서 철두파 대부분을 살해했다. 즉, 이 코인은 놈들이 갖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받기 좀 떨떠름했다.
“저라면 안 줬을 겁니다.”
정희원은 모를 거다. 실은 내가 챙긴 코인이 더 많다는 것을.
“난 독자 씨가 아니잖아요?”
그녀는 주먹으로 내 팔을 몇 번 더 때리더니, 자기 배낭을 메고 터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무리 하고 와요. 난 먼저 가서 정리 좀 해놓을 테니까.”
“너무 앞서 가진 마세요. 혼자서는 위험한 구간도 있습니다.”
걱정 말라는 듯 손을 휘휘 흔들며 멀어지는 정희원.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전우애를 좋아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음흉하게 웃습니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무표정하게 지켜보다가 말했다.
‘어제 많이 벌었지? 좋겠네.’
답변이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보고 있는 거 다 아니까.’
[아, 하하하······ 들켰어?]
비형의 목소리였다.
‘얼마나 벌었어?’
[······그, 그게. 음.]
나는 말없이 허공을 노려보았다.
[휴우, 참. 어떻게 또 알았는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만. 받아.]
[도깨비 ‘비형’이 당신에게 4500코인을 주었습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망할 도깨비 새끼.
[······성좌들이 후원 시스템을 안 쓰고 나한테 직접 보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전해 주래. 아, 그리고 이 메시지들도.]
뒤이어 폭발적으로 떠오르는 메시지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당신의 시나리오에 만족합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당신의 판단을 애써 납득합니다.]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계략에 흡족해합니다.]
······.
어쩐지, 이래서 어제 후원 메시지가 안 떴었군.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생각보다 들어온 소득이 적어서 좀 의아하던 차였다.
[보유 코인 : 23050 C]
지난번에 벌어둔 코인 중 상당 량을 능력치에 투자했는데도 다시 제법 많은 코인이 모였다.
슬슬 또 능력치를 찍을 시간이 다가왔다는 얘기다.
그럼 어디 또 적당히 찍어 볼까.
나는 특성창이 안 열리기 때문에 내가 올린 레벨 값을 정확히 기억해야만 했다.
일단은······ 중요한 체력부터.
[체력에 12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체력 Lv.12 -> 체력 lv.15]
[육체의 내구도가 증가합니다!]
따로 공격 패시브 스킬이 없으니까, 근력도 튼실히 올리고.
[근력에 16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근력 Lv.11 -> 근력 Lv.15]
[근육에서 강력한 힘이 솟아납니다!]
민첩은 적당히 피할 만큼만.
[민첩에 4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민첩 Lv.10 -> 민첩 Lv.11]
[이제 조금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백청강기를 유지해야 하니까 마력도 10은 돌파해야 한다.
[마력에 1200코인을 투자했습니다.]
[마력 Lv. 6 -> 마력 Lv.10]
[신묘한 기운이 당신의 영혼에 깃듭니다.]
이것 보다 더 과한 양을 찍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충무로에 가면 또 다량의 코인을 쓸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찍은 것만 해도 벌써 4400코인이고······.
벌긴 어렵고 쓰긴 쉽다더니, 다 맞는 말이다. 태생 능력치가 좀 괜찮은 편이었다면 이렇게 까지 코인이 많이 들진 않았을 텐데.
태생 체력이 1이라니······ 멸살법의 조회수도, 아니 이길영의 체력도 그것보단 높았을 거다.
[참, 깜빡했는데······ 시나리오 추천도 두 개나 늘었어. 너 정말 대단하더라. 이대로면 조만간 채널 레벨업도 가능할 것 같아.]
‘그래야지.’
다른 화신들처럼 배후성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나는 더욱 많은 코인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아직 내가 비형과 계약한 효과를 충분히 보지 못하는 것은 비형의 채널이 소규모인 까닭이었다.
‘소수’의 성좌로는 부족하다. 본격적으로 코인을 모으려면, 적어도 ‘상당수’의 성좌들이 들어올 만한 채널을 구성해야 했다.
충무로에 가게 되면 환경은 금방 갖추어질 것이다.
“다들 준비 끝났으면 출발하겠습니다. 빠뜨리신 거 없죠?”
어느새 모인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얼굴들을 보아하니, 모두 어제의 일로 하나씩 깨달음을 얻은 듯했다.
드디어, 충무로를 향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약수 쪽으로 가는 철로를 절반쯤 건넜을 무렵이었다.
[두 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활성화 됩니다.]
+
<메인 시나리오 # 2 ― 조우>
분류 : 메인
난이도 : E
클리어 조건 : 터널을 주파해 첫 번째 거점 지역의 생존자와 만나시오.
제한시간 : 없음
보상 : 500코인
실패시 : ???
+
메시지를 보니 본격적이라는 실감이 난다. 첫 번째 메인과는 달리, 두 번째 메인부터는 ‘주요 거점 지역’이 존재한다. 정희원이 물었다.
“주요 거점 지역? 어딜 말하는 걸까요?”
대답은 필요 없었다. 허공에 추가 메시지가 곧바로 떠올랐으니까.
[다음 ‘주요 거점’은 ‘충무로’입니다.]
“충무로면 금방이네요? 세 정거장만 더 가면 되는 거······.”
원래라면 그렇겠지.
쿠구구구구!
땅강아쥐들이 굴을 파고 나타났다. 물경 30마리가 넘는 땅강아쥐 떼. 정희원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걸 세 정거장이나 가야 되네.”
말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선 것은 이현성이었다.
“제가 전위를 맡겠습니다.”
배후성의 지원을 받은 이현성의 체근민 합은 이제 37이나 되었다. 나보다 코인도 훨씬 적게 벌었는데, 이 정도로 나를 쫓아오다니······ 역시 태생 능력치가 높으면 유리한 게 많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팔굽혀펴기라도 해 놓는 건데.
“뒤는 제가 맡을게요, 형.”
이길영은 아직 종합 능력치는 낮았지만 꾸준한 스킬 훈련을 통해 [다종 교감]을 더욱 유연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저한테도 맡겨주세요.”
유상아는 마력으로 만든 실을 사용해 땅강아쥐의 움직임을 봉쇄하고 있었다. 공격성은 떨어지지만, 종합 능력치만 보면 정희원과 비슷한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콰직!
“······숫자만 많았지, 생각보다 별 거 아닌데요?”
마지막으로 정희원에 대해서는, 사실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현성보다 종합 능력치는 낮지만, 전용 스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였으니까.
‘멸악의 심판자’의 전용 스킬인 ‘심판의 시간’.
눈앞의 상대가 성좌들의 판단에 명백한 불의(不義)를 저지르는 ‘악인’인 한, 정희원은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스각― 깨갱!
마지막 땅강아쥐가 바닥에 늘어졌다. 곁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이현성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후······ 이 정도면 할 만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렇게 쉽게 클리어 할 만한 난이도는 아니었다.
땅강아쥐들의 패턴이 아무리 단순하다고 해도 30마리면 절대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으니까.
나조차 [책갈피]를 발동하지 않고서는 혼자 섬멸할 자신이 없었다. 일행들이 그만큼 강해진 것이다.
얼마간 더 터널을 전진했을까. 마침내 눈앞에 새로운 플랫폼이 나타났다.
“약수역이에요. 그런데······ 아무도 없는데요? 아니, 없는 건 아니네.”
약수역은 죽은 사람들과 땅강아쥐의 시체로 가득했다. 상흔으로 보아, 일부는 땅강아쥐가 아니라 유중혁에게 당한 듯했다.
“계속 갑니다. 이제 두 정거장 남았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어차피 약수에서 동대입구까지는 직선거리로 1km도 채 되지 않기 때문에, 갈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가두자는 심산이었다.
동대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우리는 또 한 번 땅강아쥐 무리와 조우했고, 녀석들을 격퇴했다.
단순 거리로는 총 2km남짓을 이동했을 뿐이지만, 싸움이 워낙 고단하다 보니 일행들의 체력은 빠르게 떨어졌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죠.”
“휴······ 어차피 한 정거장 남았는데 그냥 가서 쉬는 편이······.”
“가서 쉴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내 말에 일행들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 세계에서 위험한 것은 괴수들만이 아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보니까 이 역의 사람들은 급하게 이동한 듯하군요. 생필품 같은 게 남아있을지도 모릅니다.”
“아, 저. 그럼······.”
생필품, 이라는 말에 유상아가 살짝 손을 들었다. 유상아와 정희원의 눈이 마주쳤다. 어떤 말도 주고받지 않았는데,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뚱하니 서있자 정희원이 물었다.
“왜요? 독자 씨도 알고 싶어요?”
유상아가 사색이 되었다.
“······희원 씨?”
“아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당연히 안 가르쳐 주지.”
···여자들만의 비밀이라 이거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얘긴지 모르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세상이 이지경이라도, 인간의 생리현상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때마침 이현성도 입을 열었다.
“아, 그럼 잠시 휴식 겸 저도 화장실에 다녀오겠습니다.”
이 판국에 화장실을 가겠다니, 순간 저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멀쩡히 지어져 있는 화장실을 안 쓸 이유는 또 없었다.
이래서 지하철이 편하다니까.
“저도 같이 다녀올게요.”
거기에 이길영까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다정한 형제처럼 보였다.
유상아가 나를 보며 물었다.
“독자 씨는 혼자 계시게요?”
“전 잠시 지상에 올라갔다 올 겁니다.”
“네? 바깥으로 가면 독 안개가 있을 텐데······ 괜찮겠어요?”
“잠깐만 다녀올 거니까요.”
내 말에 정희원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의심스러운데. 독자 씨 혼자 뭐 좋은 거 먹으러 가는 거 아니에요?”
나는 그런 정희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남자만의 비밀입니다.”
*
잠시 후, 나는 동대입구역의 6번 출구 앞에 서 있었다.
미리 읽어둔 정보에 따르면, 이곳이 확실한데······.
[맹독 안개에 노출되었습니다.]
역시, 여기까지도 시독 코뿔소의 영향이 닿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엘라인 원숭이의 허파]를 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나는 숨을 참은 채 동대로 이어진 에스컬레이터를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청회색빛 광택이 도는 동상 하나가 나타났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기대감을 표합니다.]
동상은 조선 중기를 살았던 한 스님의 모습을 본 딴 것이었다. 낡은 장포에 커다란 죽장을 든 스님의 얼굴에선, 동상임에도 알 수 없는 기품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는 동상 밑에 세로로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惟政四溟大師像
유정사명대사상
좋아, 맞군. 아직 아무도 찾아온 흔적도 없고······.
나는 동상 앞에 서서, 그대로 합장을 했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기뻐합니다.]
[100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이어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백청강기로 ‘신념의 칼날’을 발동했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의아해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사명대사 동상을 내리쳤다.
[거적을 걸친 한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