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25화 내가 입을 열려던 바로 그 찰나, 천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독자 씨! 마침 잘 오셨습니다.” 우리를 발견한 천인호가 이쪽을 향해 웃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싶더니 천인호가 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독자 씨가 코인을 많이 갖고 계셨죠! 얼마였더라? 아마 우리 중 가장 부자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등장인물 ‘천인호’가 스킬 ‘선동Lv.2’을 발동합니다!] 군중들이 허둥지둥 내 쪽을 돌아보았다. “코, 코인?” “누가 코인이 많다고?” 모든 시선이 나를 향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천인호, 잔꾀 하나는 정말 대단한 놈이다. “도, 독자 씨라고 하셨습니까?” “살려주세요, 제발!” 숨을 헐떡이며 다가온 사람들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몰려든 사람들의 숫자는 어림잡아도 20명이 넘는다. 만약 이 사람들에게 모두 코인을 준다면 나는 무려 2천 코인을 손해 봐야 한다. 그렇다고 코인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한순간에 금호역의 대악당이 되겠지. [등장인물 ‘천인호’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하하, 독자 씨. 저야 코인이 부족해서 이 불쌍한 분들을 돕지 못하지만······ 독자 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그냥 두고 보실 셈입니까?”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이런 수작에 어울려 주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등장인물 천인호를 ‘악인(惡人)’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조무래기 하나 데리고 이만하면 나도 많이 참았지.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표정을 한 채, 울며불며 달려드는 사람들. [하하핫! 이야기가 재밌게 되어가네요. 참고로, 이제 10분 남았습니다!] 즐거워 죽겠다는 목소리로 떠들어대는 비형과,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일행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군요. 코인을 달라고요?” 그리고 웃었다. “제가 왜요?” 나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곧 원죄(原罪)다. 그러니 이곳의 사람들 중 무고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더 역겹다. 누군가를 짓밟고 자신의 생을 연명한 주제에, 연명한 생애 대해 책임조차 지지 못하는 자들. “왜, 왜라니!” “코인이 많다며! 조금은 줄 수 있는 거 아냐!” 혼란 속에서 천인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독자 씨라면 그럴 줄 알았습니다.” “······.” “독자 씬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랬죠. 가져온 식량을 코인을 받고 팔질 않나. 그때 식량을 사지만 않았어도, 지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옳소! 그 말이 맞다!” “씨발! 내 코인 돌려줘!” 어느새 분위기는 나에 대한 심판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 이것이 천인호가 원했던 그림이겠지. “잠깐만요, 여러분! 지금 여러분 행동은······!” “독자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뒤늦게 유상아와 이현성이 사태를 무마해보려 했지만, 이미 군중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 천인호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독자 씨.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코인을 돌려주십시오.” “싫다면?” “그럼 최악의 일이 벌어지겠지요.” 물경 이십에 달하는 군중들이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이······ 어서! 어서 코인을 내놔!” 그럼에도 선뜻 먼저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결국 보다 못한 철두파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병신 새끼들아! 뭐해? 죽여! 죽이고 코인을 빼앗으면 되지 뭘 망설이는 거야?” 호기롭게 외치며 나온 녀석은 꽤나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다. 나는 [등장인물 일람]을 발동해 사내의 정보를 확인했다. + <등장인물 요약 일람> 이름 : 한민상 전용 특성 : 깡패 (일반) 종합 능력치 : [체력Lv.8], [근력Lv.8], [민첩Lv.8], [마력Lv.2] + 깡패 주제에 제법 준수한 능력치의 소유자였다. 원래부터 이런 수준이었을 리는 없으니······ 역시 이놈들은 ‘그걸’ 한 건가. 그래, 종합 능력치를 믿고 까분다 이거지. “죽어 이 새끼야!” 녀석의 손에 쥐어진 쇠파이프가 움직였다. 근력 8레벨의 전력이 담긴 쇠파이프. 예전의 ‘김독자’라면 무서워서 벌벌 떨 만한 위협이었겠지만······. 지금의 내겐,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스각! 쇠파이프와 함께 통째로 토막 난 사내의 팔이 바닥을 굴렀다. “끄, 끄아아아악!” 사람의 피를 묻힌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하얀 백광을 토하며 울었다. 나는 고요히 사람들을 쓸어 보았다. “으, 으으······.” 단 한 방에 철두파가 제압당하자, 주변 모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제 쇼맨십은 충분히 보여줬으니, 슬슬 시작할 때다. “한심하게도······ 당신들은 진짜 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고 믿는 거야?” 나는 좌에서 우로,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건너편에서 당황한 천인호의 얼굴이 보였다. “사실 나 때문이 아니라는 거, 너희들도 잘 알고 있잖아.” 병든 금붕어처럼, 군중들의 입이 뻐끔거린다. 나는 먹이를 흩뿌리듯 말을 이었다. “너희들은 그냥 쟤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사실 뭐가 잘못됐는지 알고 있는데도, 그래서 곧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도, 고작 쟤들이 무서워서 지금 벌벌 떨고 있는 거라고.” “하하, 이보세요, 독자 씨! 지금 무슨 말을······.” “왜냐하면 쟤들이 너희보다 강하니까! 너희보다 종합 능력치가 높고, 코인을 많이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당신들, 그거 알아?” 나는 군중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물었다. 그러자 군중 전체가 놀란 금붕어처럼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이들은 내 어항 속이었다. “쟤들이 왜 너희보다 강할까?” 나는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쟤들은 왜, 늘 너희보다 많은 코인을 가지고 있었을까? 쟤들이 깡패라서? 설마.” [주변의 등장인물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공포 속에서도, 확실하게 전달되는 감정들이 있다. 표정에서 표정으로 옮겨가는 의문들. “그, 그러고 보니 천인호 씨는 어떻게 그리 많은 코인을······.” “하하, 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그게, 여러가질 팔기도 하고, 또―” “그것만으로 저 정도 능력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진짜?” 천인호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우에서 좌로, 군중들의 얼굴을 하나씩 돌아보며 말했다. “며칠 전 내가 금호역에 왔을 때, 이곳의 인원은 총 87명이었어.” “······.” “그런데 지금 총 인원은 몇 명이지? 내가 보기엔, 아무리 많아도 50명이 안 되거든. 왜 그런 지 알아?” “그, 그건 아침에 교대로 정찰을 나갔다가 괴수한테―” “괴수? 아직도 그 말을 믿어?” “그, 그럼 대체······.” “멍청이들아. 머리가 있으면 잘 생각해. 그 사람들이 정말 괴수 때문에 죽었겠어? 그럼 왜 철두파 놈들은 하나도 안 죽었는데?”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왜 저놈들은, 더 강해져서 돌아온 건데?”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당신의 추리력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서, 설마―” 사람들이 하나 둘씩 천인호를 돌아보았다. 주춤거리며 물러서는 철두파들. 이제, 내가 쐐기를 박을 차례였다. “아까 저놈들이 말했지. 나를 죽이면 ‘코인’이 나올 거라고.”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흥분하며 머리털을 뽑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사람을 죽이면 코인이 나온다는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다, 당신들······ 인호 씨! 설마?” “닥쳐라! 모함이다!” 천인호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철두파의 인원들이 하나 둘씩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이 침음을 흘렸다. [하하핫! 이제 7분 남았어요!] 나는 그런 사람들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당신들한테 마지막으로 자존심이 남아 있다면, 자기 손으로 싸워.” 신념의 칼날이 사납게 울었다.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의 눈에 울분이 고이고 있었다. “적어도 너희들이 빼앗긴 것은 너희들 손으로 되찾아.” 기다렸다는 듯, 철두파의 인원들이 나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나 역시, 놈들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 이 세계는 그런 곳이니까.” 하얀 섬광이 움직였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누군가가 외쳤다. “그래, 씨발!” “개새끼들아아아!”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 누군가를 죽인 사람들이었다. “어, 엄마!” “다영아 이리와! 이거 들어! 엄마랑 지하철에서 했던 것처럼 하는 거야!” 아이와 엄마도 있었고. “이 쌍놈들아아!” 나이든 중년인도 있었다. “이 새끼들이!” 하지만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철두파와 남은 사람들의 숫자는 비등했고, 인간 사냥을 통해 코인을 취한 철두파 놈들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으니까. 어디까지나 내가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스가각! 내게 달려든 철두파 몇 명의 팔과 다리가 날아갔다. 사람의 몸을 베는 섬뜩한 감각이 손아귀를 타고 올라왔다. 전투불능이 된 철두파의 조직원들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 살려······.”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쓰러진 철두파의 입에 그대로 칼을 쑤셔 넣었다. “내가 죽인다고 했죠.” [특성 ‘웅크린 자’의 모든 진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개화합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채가, 그녀의 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됐다. [등장인물 ‘정희원’의 특성이 ‘멸악의 심판자(영웅)’으로 개화합니다.] 멸악(滅惡)의 심판자. 삼대 심판자 특성 중에서도 최강의 심판자가, 방금 웅크림 속에서 깨어났다. [당신은 ‘웅크린 자’의 특성 개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등장인물 ‘정희원’은 앞으로 당신의 칼이 되길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당신은 쉬어요.” 새파란 안광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정희원은 말했다. “이놈들은 내 몫이니까.” [등장인물 ‘정희원’이 전용 스킬 ‘심판의 시간’을 발동합니다.] [절대선 계통의 성좌들이 해당 스킬 사용에 동의합니다.] [‘심판의 시간’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전신에 핏빛 오오라를 머금은 정희원의 칼이 섬뜩한 궤적을 그렸다. 가볍고도 정확하게 철두파 사이를 누비는 검도(劍道). 곳곳에서 피보라가 튀었다. “크아아악!” 완전한 학살의 현장. 물론 싸우고 있는 것은 정희원만이 아니었다. 유상아도, 이현성도, 심지어는 이길영조차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희원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마치 살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정희원은 죽이고 또 죽였다. 내가 팔을 베면 정희원은 녀석의 심장을 꿰뚫었고, 내가 다리를 베면 정희원은 녀석의 목을 잘랐다. 정희원은 내가 남긴 뒤처리를 모두 대신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치 오래도록 그 순간만을 바라왔던 사람처럼. “······.” 주변은 핏물로 가득해졌다. 어느새 철두파 중 남은 사람은 천인호 하나 뿐. 그나마도 시민들의 공격에 맞아 몸 곳곳이 꿰뚫린 상태였다. 정희원이 나를 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인호가 나를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후, 후후··· 네, 네놈······.” 녀석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뒤쪽에서 나타난 정희원이, 천인호의 얼굴을 정수리부터 아래로 꿰뚫어버렸기 때문이다. [채널 내의 모든 성좌들이 강렬한 희열을 느낍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이가 행동을 멈췄다. 싸움은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체감할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구운 고기를 나눠 먹고, 삶의 의미를 느끼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걸었던, 잠깐이마나 평화를 누렸던 그 모든 시간들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이 빌어먹을 시나리오 속에서. 유상아는 울고 있었고. 이길영은 눈을 감고 있었고. 이현성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었고. 체력을 다 소진해버린 정희원은 피 웅덩이 속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래, 이것이 이 세계의 진실이다. [생존비가 정산됩니다.] 곳곳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코인을 얻은 자는 살아남았고. 코인을 얻지 못한 자는 죽었다. 그리고 누구도, 서로를 구원해주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일어나요, 다들.” 고개를 들어도, 이곳에서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떤 거대한 운명에 항거하듯, 그 보이지 않는 하늘을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시끄럽던 성좌들조차 이번만큼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시나리오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니까.” 모두가 깊이 고양 되어 있는 가운데, 나는 홀로 다음 시나리오에 관해 생각했다. 하나의 페이지를 넘기고 또 하나의 챕터를 넘기듯이, 그저 고요한 마음이었다. 금호역에서 얻어야 할 것은 모두 얻었다. 이제 다음 무대는 충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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